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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화 6장.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2)
“후!”
기예화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주위엔 일단의 무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하오문의 최정예라 할 수 있는 탈명대(奪命隊)였다. 탈명대는 마치 피로 목욕을 한 것처럼 전신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탈명대의 어깨에서는 붉은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이 발산하는 열기가 뒤집어쓴 피를 증발시키는 것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들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만일 그 광경을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그들을 살인마라 부르며 비난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천하인들의 시선은 이곳이 아닌 섬서성에 쏠려 있었다. 그곳에서 창천맹과 마교의 대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섬서성에서 승리하는 자가 곧 천하를 지배하게 될 거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모두가 섬서성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기예화와 탈명대는 타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들의 손에 죽은 자들의 수가 무려 수백 명이 넘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무림에서도 상당한 위명을 날리고 있던 자들이었다.
강호의 대협이거나 명망가였고, 지역의 유력자들이었다. 하오문과는 접점이 없는 그런 자들이었다.
평소 하오문이 그런 자들을 죽였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후폭풍이 불어닥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하오문의 행보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있었다. 그야말로 모든 신경을 섬서성의 대전에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 누구도 하오문의 행보를 견제하지 못했다. 그 덕에 기예화와 하오문은 원하는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이제까지 하오문이 척살한 이들은 바로 대협으로 위장한 채 천사교에 동조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정체를 철저히 숨긴 채 천사교에 협조를 했다. 심지어는 그들의 가족조차도 천사교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철저하게 위장을 하고 있었다.
기예화와 탈명대가 죽인 자들은 바로 그런 자들이었다. 이 세상의 음지에서 정체를 철저히 숨긴 채 좀먹어 가던 자들.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 그들의 반응은 하나같았다. 바로 가족들에겐 자신들의 정체를 비밀로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죽음보다 명예가 손상당하는 것을 더욱 두려워했다. 그럴 거면 도대체 왜 천사교에 협력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영원히 그런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가?’
기예화가 하오문의 부문주가 되면서 새삼 깨달은 사실 중 하나는 바로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이야 어찌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은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그런 간단한 이치조차 모르는 자들이 음지에 숨어 세상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예화는 이제 음지에 숨어 있던 마지막 무인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홍가장(洪家莊)이라는 현판이 보였다.
이 지역에서는 꽤나 유력가 집안이었다. 최소한 일대에서 홍가장을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덕을 많이 쌓았다. 때문에 평소에 홍가장에는 장주인 홍화경을 만나러 오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홍가장은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고요했다.
그 많던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는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조차 자리에 없었다.
기예화와 탈명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망설임 없이 홍가장 안으로 들어갔다.
홍가장 안도 바깥만큼이나 고요했다. 그 많던 식솔들은 온데간데없고 연무장에는 한 명의 노무인이 홀로 좌정을 하고 있었다.
노무인을 보는 순간 기예화의 눈빛이 반짝였다. 정체를 단박에 알아봤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홍가장의 장주이자 정신적인 지주인 홍화경이었기 때문이다.
번쩍!
인기척을 느낀 홍화경이 눈을 뜨자 날카로운 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탈명대가 움찔할 정도로 강렬한 눈빛이었다.
홍화경이 입을 열었다.
“왔군!”
“기다리고 있었나 보군요.”
“나도 눈과 귀가 있는데 그대들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모를까?”
“그래서 식솔들을 모조리 내보내신 건가요?”
홍화장 내부를 둘러보며 말하는 기예화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홍화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네. 나의 치부를 굳이 가족들이 알 필요는 없으니까.”
“부끄러운 것은 아시는 겁니까?”
“나의 행위에 한해서는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네. 하지만 나의 행적을 가족들이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더군. 굳이 알 필요도 없고. 그래서 내보냈네. 굳이 알지 않아도 될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홍화경의 태연한 대답에 기예화는 속에서 열불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껏 천사교에 동조하던 무인들 중 뻔뻔하기로는 홍화경이 제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렇게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지 기예화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스르릉!
그때 홍화경이 검을 꺼내 들었다.
“이야기가 쓸데없이 길어졌군. 다른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네. 내 목숨을 노리고 왔다면 빨리 승부를 내지.”
“지금 섬서성에서는 중원의 운명을 건 대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었고, 또 앞으로 죽어 갈 겁니다. 그들에게 사과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없네!”
홍화경이 단호히 대답했다. 그에 기예화가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어떻게 사람이?”
“제각기 입장이란 것이 있는 법이야. 자네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는 나의 운명에 최선을 다했네. 그리고 원하는 결과를 얻어 냈지. 비록 내 눈으로 결과를 보고 가지 못하는 것이 원통하지만,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네.”
홍화경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그의 눈은 이곳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곳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 그의 주인이 있었다.
평생 그를 위해 살아왔다.
강호에서 힘겹게 쌓은 명성도 버리고, 이름도 버린 채 그를 따랐다. 그 모든 것이 주군의 꿈을 위해서였다.
남들은 바보 같다고 욕할지 모르지만, 홍화경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구함받은 목숨이었기에 그를 위해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홍화경이 검을 들어 기예화를 겨눴다.
촤촤촹!
그 순간 탈명대가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수백 명의 탈명대가 발산하는 기세는 실로 무서웠다. 전대의 고수였던 홍화경도 움찔할 정도로.
“챠아앗!”
그가 연무장 바닥을 박차며 탈명대에 달려들었다.
평소 그라면 선공을 후배들에게 양보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비무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정정당당한 대결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목숨을 건 마지막 싸움이었다.
그는 마지막을 누구보다 화려하게 불태우고 싶었다.
‘평생 당신을 위해 싸워 왔지만, 지금의 싸움은 오직 나를 위한 싸움입니다. 주군, 부디 꿈을 이루시길…….’
홍화경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탈명대와 싸웠다.
그의 가공할 무공에 탈명대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대의 고수라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은 엄청난 무위였다. 하지만 탈명대 역시 하오문에서 고르고 고른 고수들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천사교의 무인들을 추적해 척살하면서 수많은 실전을 경험한 상태였고, 또 독이 바싹 올라 있었다.
동료를 잃은 슬픔은 분노가 되었고, 그들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고 올라온 분노를 홍화경에게 풀어냈다.
결국 홍화경은 온몸이 난도분시 된 채 바닥에 쓰러졌다.
“쿨럭!”
토해 낸 피가 가슴을 붉게 적셨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눈빛과 표정은 묘하게 평온해 보였다.
“흐흐! 주……군.”
마지막까지도 그는 호천명을 부르다 숨이 끊어졌다.
기예화는 그런 홍화경을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와 탈명대가 이제까지 죽인 대부분의 천사교도들이 홍화경과 같았다.
그들이 보이는 맹목적인 충성심을 기예화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천사교주가 뭐기에, 그의 꿈이 무엇이기에 이들이 이렇게 거침없이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지는 거지?’
갑자기 몸에 오한이 느껴졌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이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기예화는 자신도 모르게 양팔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
***
거대한 제단이 완성되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오른 제단은 차라리 커다란 탑을 연상시켰다. 하늘에 도전하는 인간의 의지를 그대로 대변하는 것 같았다.
“완성했습니다, 교주님.”
귀사가 호천명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고생했군.”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호천명의 담담한 한마디에 귀사가 더욱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호천명의 시선이 제단을 향했다.
제단은 급조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종남파의 주춧돌로 쌓은 제단이었다. 종남파의 전각을 떠받들던 커다란 기둥이 제단의 기둥이 되었고, 연무장에 깔려 있던 청석이 제단의 계단으로 재탄생됐다.
그렇게 종남파의 모든 것이 제단의 일부가 되어 재탄생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재활용이었다.
제단 주위엔 백여 명의 혼술사들이 포진한 채 호천명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자리에 이백 명이 넘는 혼술사들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백 명이 담호를 무간지옥에 가두느라 모든 힘을 소진했다. 때문에 남은 백 명으로 대법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귀사는 자신 있었다.
인원은 반으로 줄었지만, 제반 여건은 더욱 좋아졌으니까.
우우웅!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슬퍼하기라도 하듯이 하늘이 울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하늘의 울음을 듣지 못했지만 호천명과 귀사의 귀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
하늘은 무심한 듯하지만 결코 세상을 외면하지 않는다.
세상이 혈란에 휩싸이면 하늘도 슬퍼하고, 천기 역시 흔들리기 마련이다. 수많은 이들이 흘린 피와 눈물은 하늘을 자극하고, 그로 인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인과의 법도가 느슨해진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순양의 평원에서 벌어진 창천맹과 마교의 대회전으로 인해 인과가 일시적으로 무너지고, 천기가 유례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이 도래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완벽한 여건이 갖춰질 터였다.
제단을 바라보는 호천명의 입가에는 옅은 호선이 걸려 있었다. 웃고 있는 것이다.
그의 곁에서 수십 년을 지켜본 귀사마저도 처음 보는 미소였다.
“교주님.”
“참으로 보기 좋지 않은가?”
호천명이 제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을 움켜쥐면 금방이라도 잡힐 것 같았다. 하지만 호천명은 금세 손을 거둬들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제를 올리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한데, 아직 제물이 도착하지 않았다.
호천명의 시선이 산 아래를 향했다. 그런 그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오고 있군. 금방 도착하겠어.”
“그렇……습니까?”
“마치 바다로 떠난 연어가 다시 개울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지. 그에겐 내가 고향과 같은 개울이니까. 단지 그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귀사는 용케도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만큼 오랜 세월 곁에서 보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수하 한 명이 다가와 보고를 했다.
“산 아래서 급보입니다. 권마가 종남산 지척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의 보고에 귀사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귀사의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지금 방해를 받으면 대업에 막대한 차질을 빚는다.’
그의 시선이 호천명을 향했다.
호천명은 혀를 차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군. 조금만 늦었으면 좋았을 텐데. 역시 세상일은 뭐하나 뜻대로 되는 법이 없군.”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교주님.”
“가능하겠나? 오극마저도 그에게 목숨을 잃었는데.”
“제 목숨을 바친다면 가능합니다.”
“자네마저 없다면 내가 무슨 재미로 이 세상을 살아가겠나?”
“여기까지가 제 역할인 듯싶습니다.”
“귀사!”
호천명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그러자 귀사가 웃었다.
“저 아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저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십시오.”
귀사가 보고 있는 이들은 바로 혼술사들이었다.
백여 명의 혼술사.
담호를 무간지옥에 가둘 때 소모했던 혼술사들과 달리 그들은 귀사가 각별히 아끼는 이들이었다.
더 재능 있고, 더 충성심이 강한 이들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천사교의 진정한 미래라 할 수 있었다.
“진심인가?”
“그렇습니다.”
“아쉽지 않은가? 우리가 수십 년을 기울여 온 노력의 결과가 바로 저곳에 있는데.”
“제 인연이 아닌 모양입니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가?”
호천명의 물음에 귀사가 잠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라고 왜 호천명을 따라 대업을 완성하고 싶지 않겠는가? 평생을 그 한 목표만 보고 달려왔는데. 하지만 때로는 간절히 원하던 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귀사는 지금이 바로 그 시기라고 생각했다.
“부디 그곳에도 천사교를 세워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 하나면 족합니다.”
“알겠네! 약속은 반드시 지키지.”
“감사합니다. 그럼…….”
귀사가 호천명에게 큰절을 올렸다.
수하가 주군에게 마지막으로 올리는 인사였다.
고개를 든 귀사가 혼술사들과 함께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담호와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환마사자였다. 담호가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그 마귀가 온다고? 천병왕도 그를 막지 못했구나.’
세상 두려울 것이 없는 환마사자였지만, 담호는 달랐다. 그의 이름이 언급된 것만으로도 그는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때 귀사가 환마사자를 불렀다.
“환마사자.”
“예? 예!”
“자네가 제를 주관하게나.”
“하지만…….”
“할 수 있겠지?”
“예!”
“시간이 없네. 어서 시작하게. 내가 그를 막을 테니.”
“알겠습니다.”
환마사자가 급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