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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화 6장.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3)
담호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보이는 종남산을 바라봤다.
구대문파 중 하나였던 종남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었다. 비록 화산과 같은 현기는 담고 있진 못했지만, 그래도 구대문파 중 하나를 넉넉하게 품을 만큼 거대한 품을 자랑하는 신령한 산이었다. 하지만 담호의 눈에 비친 종남산은 더 이상 신령해 보이지도, 또 현묘해 보이지도 않았다.
종남산에 거대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똑같은 모습으로 보일 뿐이지만, 담호와 같은 수준에 이른 고수의 눈엔 종남산에 어려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이 선명하게 보였다.
굳이 오극에게 확인하지 않아도 될 뻔했다. 기산월의 흔적을 쫓아오지 않아도 되었었다. 저렇게 선명한 어둠이라면 섬서성 어느 곳에 있든 볼 수 있었을 테니까.
담호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전장이 저곳에 있다는 것을. 호천명은 저곳에서 천하를 굽어보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담호가 종남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천천히, 하지만 절대 멈추는 법 없이 그렇게 걸어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담호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는 바로 산을 내려온 귀사였다.
“오랜만이구나.”
그가 입을 열었다.
담호는 그런 귀사를 말없이 바라봤다.
귀사가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제대로 찾아왔다는 증거였다. 귀사의 전신에서는 지독한 사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동안 담호를 죽이기 위해서 그와 천사교가 들인 노력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차도살인지계도 써 봤고, 절대고수도 투입해 봤다. 하다 하다 백여 명의 혼술사를 희생해 무간지옥에도 가뒀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담호를 죽일 수는 없었다.
마치 생명이 아홉 개인 구미호처럼 담호는 끈질기게 다시 살아났다. 그런 담호의 모습은 질리다 못해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호천명을 따라 수많은 무인들을 경험한 귀사였지만 담호와 같은 상대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담호의 목숨을 확실히 빼앗을 수 있을지 더 이상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이젠 담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신물이 넘어올 것 같았다. 그래서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키워 온 수족들과 동료들이 담호와 하오문에 의해서 모두 잘려 나갔다. 천사교의 남은 전력이라고 해 봐야 종남산에 있는 이들이 전부였다.
귀사의 눈이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부분에서 강렬한 빛이 폭사되어 나왔다.
“너는 결코 이 자리에 와서는 안 됐다. 권마.”
그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담호가 귀사를 빤히 바라봤다.
귀사의 섬뜩한 목소리도 담호에겐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 모습이 귀사의 화를 더욱 북돋았다.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반드시!”
“비켜!”
“…….”
담호의 무심한 한마디가 귀사의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담호의 무심한 표정에 균열이 가게 만들 수는 없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너는 반드시 죽는다. 웬 줄 아느냐?”
“…….”
“내가 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츠으으!
그의 몸에서 사이한 기운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났다.
***
귀사의 본래 이름은 소류관이었다.
그의 고향 마을은 설산 절명애 근처에 있었다. 그의 마을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거 중원을 어지럽혔던 천사교의 후신들이 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중원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천사교였다. 천사교라는 이름처럼 온갖 사술의 총본산이었다. 강호에선 실전된 사술도 천사교에서는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천사교는 사술을 믿고 중원을 장악하고자 했다. 하지만 중원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후퇴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중원의 무인들은 후퇴하는 천사교를 가만 뇌두지 않았다. 그들은 집요하게 추적해 천사교의 씨를 말리고자 했다. 그 때문에 천사교의 수많은 무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많은 비전들의 명맥이 끊겼다.
비전을 잃은 천사교는 희망도 잃었다. 희망을 잃은 그들은 설산 근처 절명애 쪽에 마을을 만들고 칩거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과거의 웅지를 잃었다. 그들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살았다. 야성을 잃은 늑대처럼 그렇게 순화되어 간 것이다.
간신히 보존한 비전조차 봉인한 채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마을 사람들을 소류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영특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소류관이었다. 그는 모두가 쉬쉬하며 숨긴 마을의 비밀을 우연히 알아낸 후 어른들이 숨겨 둔 사술을 하나씩 찾아내서 익혔다.
수많은 사술을 익혔지만, 단 하나만큼은 익힐 수 없었다. 바로 금서(禁書)로 규정한 사술이었다.
금서는 마을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었다. 수많은 기관진식이 가로막고 있었기에 사술을 익힌 소류관도 감히 접근할 수 없었다.
처음엔 그냥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욕망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어떻게든 금서를 익히고 싶었다. 금서를 익혀 천하를 다시 천사교 세상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마을 어른들은 그런 소류관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했다.
결국 소류관은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해 늘 혼자 지내야 했다. 하지만 소류관은 금서를 익히고 싶은 욕망을 결코 버리지 않고 기회만 노렸다.
무려 십여 년 동안이나 말이다.
기회는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바로 사신제가 인근을 지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그는 은밀히 사신제를 찾아 관찰했다.
풍월제 단공월이나 서왕모 용화설은 목표에서 제외했다. 그들의 눈 어디에도 욕망의 빛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철혈무신 이관과 혈광사신 호천명이었다. 우연을 가장해 이관과 몇 마디 대화를 해 본 끝에 그 역시 명단에서 제외됐다. 그가 가진 바른 사고관과 웅지는 소류관과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은 이는 호천명뿐이었다. 어떻게 그에게 접근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바로 호천명이 먼저 그의 존재를 인지하고 접근해 온 것이다.
소류관은 호천명의 눈에서 아귀 같은 탐욕과 불같은 야망을 읽었다. 그것은 호천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천명은 소류관의 가슴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욕망을 보았다. 자신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는 어두운 욕망을.
소류관은 기꺼이 호천명의 수하가 되었고, 그와 사신제를 자신의 마을로 이끌었다. 정의감에 불타 있던 사신제는 천사교의 후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소류관의 마을을 전멸시켰다.
그사이 호천명과 소류관은 금지에서 금서를 빼돌릴 수 있었다. 금서를 먼저 익힌 이는 호천명이었다. 그는 단지 금서를 한번 본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원리를 이해했다. 그야말로 무서울 정도의 통찰력과 오성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천사교의 금서는 그저 호기심의 대상일 뿐, 궁극의 목적은 아니었다.
금서를 읽음으로써 얻은 것도 많았지만, 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무인이었다. 천사교의 사술은 그저 곁가지로 익히면 충분할 터였다.
반대로 소류관에겐 금서가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는 오랜 염원이었던 금서를 읽고 그 안에 있던 사술을 익혔다. 그리고 소류관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귀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같은 혈족이라 할 수 있는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키면서까지 얻어 낸 사술의 이름은 사령혈무환술(邪靈血霧幻術)이라는 것이었다.
천사교의 교주가 익혔던 사술로 전신을 안개화시킨 채 상대를 현혹시켜 원정이 고갈되어 죽게 만드는 무서운 사술이었다.
츠츠츠!
분명히 피륙으로 이뤄진 인간의 육신일진대 귀사의 몸은 안개가 되어 불길하게 넘실거렸다.
붉은 안개는 넓게 퍼져 담호의 육신을 집어삼켰다. 붉은 안개 전체가 바로 귀사의 육체나 다름없었다. 붉은 안개 속의 공간은 세상과 격리된 또 하나의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예전에 담호가 갇혔었던 무간지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생명을 가두고 영원히 격리하기엔 충분한 공간이었다. 한 가지 약점이라면 사령혈무환혼술이 시전자의 목숨을 담보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모조리 불태워야만 쓸 수 있는 수법이었기에 귀사는 이제까지 사령혈무환혼술을 펼치는 것을 자제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비록 이곳에서 천사교는 사라지겠지만, 그의 주군과 함께 육도에서 화려하게 부활할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귀사는 웃으며 죽을 수 있었다. 담호를 저승길 동무 삼아서 말이다.
“같이 가는 거다, 권마!”
붉은 안개 속에서 귀사의 목소리가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담호는 말없이 그 모든 광경을 바라봤다.
붉게 물든 세상과 그곳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거대한 두 눈을.
보통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빠질 만한 광경이었지만, 담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붉은 안개가 담호의 모공을 파고들려 했다. 일단 모공을 파고들어 한 줄기라도 연결이 되는 순간 정신을 온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육신까지는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어 영원히 이곳에 가둬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쾅!
담호가 갑자기 발을 크게 굴렀다.
대지를 진동시키는 힘찬 발 구름, 바로 대진각이었다.
순간 귀사가 만들어 낸 붉은 공간이 통째로 흔들렸다.
쿠쿠쿠!
그 진동이 온몸을 울리고 붉은 안개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담호는 침묵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에 귀사가 분노했다.
“이놈!”
그의 목소리가 붉은 공간 안에 울려 퍼졌다.
하늘을 찌르는 분노와 적의가 그의 목소리 안에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담호는 그 안에 은밀히 숨겨진 진짜 감정을 읽고 있었다.
“두렵나?”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두렵군!”
담호의 눈빛이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귀사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공포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공포에 침식된 자가 내뱉는 특유의 숨결이 배어 있는 것이다.
콰앙!
담호가 다시 한 번 대진각을 펼쳤다. 그러자 정말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붉은 공간이 요동쳤다. 순간 귀사가 큰 타격을 받았다.
제아무리 육신을 안개화했다고 하지만 실체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붉은 안개가 받는 타격이 고스란히 귀사에게 층층이 쌓였다.
“크윽!”
귀사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담호는 그의 신음에 배어 있는 공포의 냄새를 맡았다.
귀사는 강호의 음지에 모습을 감춘 채 조롱해 왔다. 그가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이는 오직 호천명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그 어떤 사람도 그와 동등한 선에 설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발아래 두고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음껏 조롱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가 직접 나서서 누군가와 싸워 본 적은 없었다.
일전에 담호와 조우했을 때도 그는 이형전혼술(異形轉魂術)을 이용해 멀찍이 떨어져서 대화를 했을 뿐이다. 수하들을 보내 담호를 상대하게 했지, 정작 그 자신은 멀리 떨어져 안전을 도모했을 뿐이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고, 사람도 죽여 본 놈이 더 잘 죽이는 법이다.
세상의 이치가 그랬다.
스스로의 손에 한 번도 피를 묻혀 보지 않은 자가 타인을 직접 죽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독심을 소유한 장부일지라도 말이다.
귀사는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사술을 익힌 존재였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사술이 무서운 거지, 그라는 존재가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담호의 눈에 비친 귀사는 그랬다.
저벅!
담호가 발걸음을 옮겼다.
특유의 엇박자 걸음이었다. 한쪽 다리가 불편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무인으로서 치명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담호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불편한 몸으로도 수많은 격전을 치르고, 셀 수도 없는 사선을 넘나들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무공을 믿고 있었고, 스스로의 의지를 믿었다.
그런 믿음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걸어온 족적이 대지를 단단하게 만들고, 그런 기반 위에 독행류가 만들어졌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믿기에 담호는 스스로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귀사와 그의 다른 점이었다.
쾅!
그의 주먹이 터졌다.
파성추였다.
그 한 방에 공간 전체가 또다시 흔들렸다.
“어떻게?”
귀사의 눈에 불신의 빛이 떠올랐다.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령혈무환혼술로 만든 공간은 물리적인 타격이 전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한에선 그랬다.
그때 귀사의 머릿속에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화산파!’
담호는 화산파 출신이었다.
그의 무공이 너무 패도적인 데다가 이질적이어서 화산파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의 사부는 분명 화산파의 현소 진인이었다. 그렇다면 현문정종인 화산파의 정수가 그에게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도가의 무공은 모두가 알다시피 사술의 상극이나 마찬가지였다. 파사현정의 묘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담호가 다시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공간을 내리쳤다.
쩌어엉!
“커헉!”
붉은 공간에 균열이 갔다. 균열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담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담호는 그러지 않았다. 안에 있는 것이 귀사를 처리하기 쉽기 때문이다.
귀사의 실책이라면 무간지옥과 같은 수법을 펼쳤다는 것이다. 무간지옥을 이미 경험한 담호에게 귀사가 만들어 낸 붉은 공간은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귀사는 차라리 무공으로 담호를 상대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일말의 가능성이 있었을지 몰랐다. 사술을 펼친 그 시점에서 그에게 승산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쿠콰콰콰!
폭풍이 휘몰아쳤다.
담호의 주먹이 만들어 낸 폭풍이었다.
붉은 공간이 찢겨 나가고, 안개가 증발했다.
구중포(九重砲), 일대 다수의 대결을 상정하고 만들어 낸 초식이었다. 지난 일 년 동안 담호가 소화산에 은거하며 가장 심혈을 기울여 다듬은 초식이기도 했다.
주먹을 휘두르는데 얇게 응축된 칼날 같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칼바람은 귀사가 만들어 낸 붉은 공간을 갈기갈기 잘라 내며 난도질했다.
“크아악!”
결국 귀사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처절한 비명을 내뱉었다. 순간 담호를 에워싸고 있던 붉은 공간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릎을 꿇고 있는 귀사의 모습은 실로 처참했다. 전신 곳곳에 뼈가 드러날 정도의 자상이 깊이 패여 있었다. 도저히 주먹에 당했다고 믿기 힘든 상처였다.
담호의 구중포는 귀사의 근맥과 심맥, 뼈까지 모조리 잘라 냈다. 그 때문에 귀사는 스스로의 의지로는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무릎을 꿇은 채 흔들리는 그 모습이 마치 허허벌판에 세워진 허수아비처럼 공허하게만 보였다.
천하에 다시없을 명의가 와도 살리지 못할 상처였다. 귀사는 이미 저승길에 반쯤 몸을 걸치고 있었다.
저벅!
담호가 걸음을 옮겼다. 그가 무릎을 꿇은 귀사를 스쳐 지나갈 때였다.
“가지…… 마라.”
귀사의 원독 가득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귀사의 목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건만 담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가지 말란 말이다, 권마!”
피를 토하는 외침이었다. 하지만 그런 귀사의 외침도 담호의 발을 붙잡진 못했다.
“가지…… 말란 말이다, 이 악귀 같은 놈아!”
귀사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멀어지는 담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피를 토하며 담호를 붙잡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담호는 멈추지 않고 종남산을 향했다.
그의 주군이 있는 곳이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그곳이었다.
오늘 하루를 위해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을 쏟아부었고,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도록 유도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날이었다.
담호라는 존재만 없다면 말이다.
투툭!
귀사의 눈가가 찢어지며 핏물이 터져 나왔다. 붉은 핏물은 눈물과 뒤섞여 그의 뺨을 적셨다.
이제까지 수많은 이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했지만, 정작 자신이 피눈물을 흘리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귀사는 담호에게 저주를 퍼부으려 했다. 귀사 같은 사술의 대가가 퍼붓는 저주는 단순히 폭언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원념이 천기와 뒤섞여 평생을 괴롭힐 수도 있었다. 그것이 현재 귀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였다.
쾅!
하지만 귀사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담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린 일격이 그의 머리를 송두리째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머리를 잃은 귀사의 몸뚱이는 허우적거리다가 모래성처럼 힘없이 주저앉았다.
담호는 등 뒤에서 무너져 내리는 귀사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보이는 종남산에 고정되어 있었다.
종남산에 내린 어둠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담호의 눈에 어린 어둠도 더욱 깊어졌다.
“호천명!”
이 모든 사태의 시작이자 마지막인 호천명이 그곳에 있었다.
음습한 바람이 종남산에서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담호는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