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500화 (500/500)

 500화 화산권마[완결] 

500화 후(後)

모두가 꿈을 꿨다고 생각했다.

환청을 들은 거라 생각했다.

한밤에 꾸었던 꿈은 다음 날 일어나면 기억에서 사라지듯 사람들 역시 그날의 기억을 잊었다. 특히 종남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사람들일수록 기억이 더욱 깔끔하게 지워졌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날의 기억을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 가장 가까이서 균열이 열리는 것을 지켜봤던 이들이었다.

초연운, 검율천, 방진보, 종리연, 음유경, 그리고 현소 진인 등은 그날의 기억을 절대 잊지 않았다. 어쩌면 현소 진인의 선기가 균열에서 흘러나온 기운에서 일행들을 보호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담호가 들어간 직후 균열은 닫혔다.

마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하늘은 원래대로 돌아갔고, 균열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균열이 생성되었던 공간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혹시나 담호가 다시 나오지 않을까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담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사이 척관혈이 죽었고, 균열을 여는 데 동원되었던 혼술사들도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겨우 살아남은 이들도 상태가 좋지 않아 기식이 엄엄했다. 그들은 며칠을 더 버티다가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담호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단 사실을 제일 먼저 인정하고 자리를 뜬 사람은 검율천과 음유경이었다.

그들에겐 엉망이 된 마교를 수습할 책임이 있었다. 혹시나 담호가 돌아올지 몰라 종남산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돌아가야 했다.

검율천과 음유경은 현소 진인 등에게 작별을 고하고 다시 마교로 돌아갔다.

그다음 떠난 이는 초연운이었다.

검율천과 음유경이 마교를 수습해야 하는 것처럼 그에겐 창천맹을 수습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는 결국 며칠 더 있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야 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이들은 현소 진인과 종리연, 그리고 방진보였다. 그들은 석 달이 지나도록 종남산에 남아 담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담호는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었고, 대회전에서 살아남은 종남파의 제자들이 돌아오면서 자리를 비워 줘야 할 상황이 됐다.

본산이 무너지고, 마교와의 대회전에서 수많은 제자들이 죽은 종남파였다. 문파를 재건해야 하는 그들 앞에서 언제까지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현소 진인과 방진보, 종리연도 종남산을 내려와야 했다.

그들이 종남산에 머물고 있었던 시간 동안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바로 마교가 신마련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검율천이 교주로 정식 취임하자마자 종교 색을 싹 빼고 신마련이라는 이름을 썼다. 마교 본류의 무인들이 격렬히 반대했지만 십삼지파를 등에 업은 그는 거침없이 개혁을 단행했다.

검율천은 신마련을 완벽하게 장악한 후 원설화를 찾았다. 그녀가 관리하고 있는 천문학적인 재산을 환수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어디서도 원설화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고, 그 많은 재산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중원에 계속해서 자리를 잡고 있기 위해서는 막대한 금전이 필요했다. 중원의 패자를 가리는 싸움은 무력뿐만 아니라 금전적인 지원도 받쳐 줘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시기에 신마련을 후원하는 상단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검율천은 본거지를 중원 남단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초연운과의 약속 때문이기도 했지만, 중원 한복판에서 버틸 수 있는 금력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무엇보다 중원 일통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너무 많은 무인들과 문파들이 마교에 의해 죽었다. 마교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는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창천맹에 의해 날카롭던 예봉이 꺾이자 곳곳에서 저항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외부 활동을 하는 신마련의 무인들을 습격했다.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자 신마련 또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중원 전체가 신마련의 적이 된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중원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검율천은 신마련을 이끌고 중원 최남단인 운남성으로 이동했다. 운남성에는 마교 시절 비밀리에 만들어 두었던 분타가 있었기에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구대문파 중 하나였던 점창파였다. 점창파는 운남성에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던 터줏대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교와의 대전 이후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때문에 신마련이 뻔히 그들의 앞마당에 자리를 잡는 것을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

점창파는 창천맹과 중원 유수의 문파들에 도움을 청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제대로 된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신마련은 점창파에 그 어떤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운남성에서 점창파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결국 점창파는 그나마 남은 명맥을 잇기 위해서라도 터전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수백 년이나 한 지역에서 패주로 군림해 온 문파가 자리를 옮긴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전쟁은 중원 전역을 초토화시켰고, 그 때문에 이제까지 불가능했던 많은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중 상당수가 쇠락하거나, 아예 문파의 명맥이 끊어졌다. 많은 이들이 그들의 공백을 우려했지만 강호는 빈자리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이 신흥 문파들이 일어나 공백을 메웠다.

신흥 문파들은 대부분 마교와의 대전에서 날카로운 예봉을 드러냈던 곳들이었다. 그들은 기존의 질서가 흔들린 틈을 타서 재빠르게 영역을 확장했고, 또 공고히 했다.

난세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창천맹과 마교의 대전은 그렇게 강호를 바꾸어 놓았다.

강호에는 새로운 질서가 태동했고, 그 중심엔 바로 창천맹이 존재했다.

맹주인 초연운은 신마련을 몰아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창천맹을 해체하길 원했지만, 많은 이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강호는 아직 어지러웠고, 많은 이들이 창천맹이 질서를 유지해 주길 바랐다. 때문에 창천맹은 해체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유지됐다.

창천맹이 자리를 잡은 곳은 바로 호남성의 악양이었다.

무림맹, 마교의 본단을 거쳐 간 악양에 다시 창천맹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창천맹은 그렇게 새로운 강호의 중심이 되었다.

***

세월은 흘러가는 물 같고, 인심은 무상했다.

강호에는 새로운 질서가 태동했고, 자리를 잡았다. 옛것은 시간 속에 잊혀져 갔고,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만 관심을 쏟았다.

강호는 급변했고, 예전과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너무나 급격한 변화에 오히려 사람들이 쫓아가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세상의 급격한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곳도 있었다.

안휘성의 성도인 합비에서 관도를 따라 수백여 리를 벗어난 곳에 있는 육안(六安)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육안의 외곽, 제법 커다란 강이 흐르는 그곳에 조그만 객잔이 있었다. 방가객잔(方家客棧)이라는 소탈한 이름을 가진 객잔은 무척이나 아담했다. 예전엔 태평객잔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었지만 새로운 주인이 인수한 후에 방가객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탁자라고 해 봐야 겨우 여덟 개밖에 되지 않았고, 손님이 잘 수 있는 방도 겨우 다섯 개밖에 되지 않았다.

바로 앞에 강이 흐르고 매화가 흐드러진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져 있었지만, 너무 외진 곳에 있었기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방가객잔 앞마당에는 너른 평상 서너 개가 놓여 있었다. 그중 가장 넓은 평상 위에 아름다운 미부가 앉아 있었다.

이제 서른 초반으로 보이는 미부는 혜지가 가득한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객잔 앞 강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강가에는 소동 두 명이 뛰어놀고 있었다. 소동들을 바라보는 미부의 눈동자엔 깊고 그윽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때 그녀의 청정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째가 벌써 저만큼 큰 건가?”

“아!”

미부가 탄성과 함께 뒤를 돌아봤다.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에 탄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미부가 살짝 코끝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그녀는 일부러 새침하게 말했다.

“맹주님께서 이런 촌구석엔 어인 일이신가요?”

“맹주 때려치운 지가 언젠데 아직도 맹주래? 그냥 평소처럼 오라버니라고 불러라.”

남자가 말에서 내리며 웃었다. 그제야 미부도 새침한 표정을 풀고 활짝 웃었다.

“오라버니.”

“잘 지내고 있나 보구나.”

“연락도 없이 어떻게 오셨어요?”

“어떻게 오긴? 너와 진보 보려고 왔지.”

“흥! 그이의 음식이 그리워서 온 건 아니구요?”

“하하! 그것도 맞아. 진보가 도통 오지 않으니 나라도 찾아올 수밖에 없잖느냐?”

미부의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남자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남자를 보며 미부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저렇게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가 불과 얼마 전까지 창천맹의 지존이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나 있을까?

남자의 이름은 초연운.

창천맹의 초대 맹주이자 강호를 마교의 환란에서 구한 영웅이었다. 그런 초연운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미부의 이름은 은소청이었다.

그녀는 모두가 어려워하는 창룡신협 초연운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천하제일의 재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은가보의 여주인이었다. 은가보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십여 년 전 창천맹이 마교를 상대로 그렇게 선전할 수 없었을 거라는 것이 강호의 중론이었다. 때문에 강호의 많은 이들이 은가보를 은인으로 여기고 귀하게 대접했다.

덕분에 은가보는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해 천하제일의 부를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은가보의 주인인 은소청은 그 후 강호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은거했다.

많은 이들이 은소청의 행방을 궁금해 했지만 그녀의 거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천하제일의 거부인 그녀가 이렇게 아담한 객잔에 은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잠시 은소청을 바라보던 초연운이 갑자기 객잔 안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이놈! 진보야, 형님 오셨는데 무얼 하고 있는 거냐?”

그의 목소리가 객잔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잠시 중년의 남자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거참! 왔으면 그냥 조용히 앉아서 음식이나 주문할 것이지,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어요?”

“흐흐! 형님이 왔으면 알아서 재깍 나올 것이지, 왜 이렇게 꼼지락거리는 것이냐?”

“아, 정말!”

중년의 남자, 방진보가 초연운을 노려봤다. 하지만 초연운의 웃는 얼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어서 와요.”

“다른 사람들은?”

“형이 제일 먼저 왔어요.”

방진보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를 보는 초연운의 눈에 만감이 교차했다. 마냥 어리게만 보였던 방진보는 이제 어엿한 가장이 되었다. 애티가 사라진 얼굴에는 중년의 완숙함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앗! 백부님이다.”

“정말?”

그때 강가에서 뛰어놀던 소동들이 초연운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이런! 악동들이 먹이를 발견했구나.”

초연운이 짐짓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에 객잔으로 달려온 소동 둘이 초연운의 품에 와락 안겼다.

“하하! 백부님!”

“초 백부님!”

소동들은 초연운의 목에 매달려 볼을 마구 비벼 댔다. 그러자 은소청이 소동들을 말렸다.

“백부님 힘드시잖니. 그만해라.”

“하하! 괜찮다. 요놈들, 진보를 닮아 둘 다 묵직하구나.”

초연운은 소동들을 품에 안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 모습에 방진보와 은소청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소동들은 방진보와 은소청 사이에서 난 아이들이었다.

첫째의 이름은 방원호, 둘째의 이름은 방신호였다.

방원호는 방진보를 닮아 요리를 좋아했고, 방신호는 은소청을 닮아 계산이 빨랐다. 성격은 달랐지만 형제간의 우애는 무척이나 좋아서 늘 함께 어울렸다.

방원호를 보는 초연운의 눈에 문득 그늘이 드리워졌다.

원호(願虎), 호를 그리워한다.

방진보는 첫째 아들의 이름에 자신의 염원을 담은 것이다.

부모를 제외하고 두 형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초연운이었다. 초연운도 두 형제를 무척이나 아끼고 좋아했다.

“하하하!”

객잔 마당에 그들의 웃음이 울려 퍼졌다.

방진보와 은소청은 미소를 지은 채 초연운과 형제들이 웃는 모습을 지켜봤다.

문득 방진보의 얼굴에 그늘이 살짝 드리워졌다.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형!’

이십여 년 전 그날 이후 담호는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세상은 담호를 잊었지만, 방진보는 담호를 잊지 않았다.

오늘날 그가 누리고 있는 행복은 모두 담호 때문이었다. 강호가 평화를 유지할 수 있고, 아직 존속할 수 있었던 것도 담호 덕분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인심은 무정했고, 담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것 또한 세상의 흐름이었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방진보는 애써 웃으려 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 날이기 때문이다.

첫 손님인 초연운에 이어 현소 진인이 도착했다.

이십 년이란 세월은 현소 진인의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리게 만들었다. 머리는 온통 하얗게 세었지만 눈에 어린 현기는 더더욱 깊어졌다.

그의 곁에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도사가 수행하고 있었다. 젊은 도사의 도명은 수경, 옛 이름은 남서일이었다. 현소 진인이 말년에 거둔 제자이자, 화산파의 당대 학도사였다.

“오랜만이구나, 진보야!”

“화산파의 제자 수경이 화산대숙수 방 대협을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일 년 만에 만났지만, 그들은 정답게 인사를 나눴다.

뒤이어 초연운이 현소 진인에게 알은척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운경이 호위를 붙여 준다는 것을 사양하느라 조금 늦었구나.”

“하하! 운경 장문인께서도 안녕하시지요?”

“운경이야 늘 똑같지. 너도 좋아 보이는구나.”

“덕분에 잘 살고 있습니다.”

“그래!”

현소 진인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방진보는 도를 깨달은 자의 눈빛이 있다면 현소 진인 같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현소 진인의 깊은 눈 속에는 현묘한 기운이 가득했다.

방가객잔에 가장 마지막에 나타난 이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세월의 흐름을 거스른 듯한 미모를 가지고 있는 여인은 바로 신의 종리연이었다.

그녀는 담호의 말, 흑귀를 타고 있었다.

“언니!”

은소청이 종리연에게 손을 뻗었다. 종리연은 그녀의 손을 잡고 흑귀의 등에서 내렸다.

“동생!”

“언니는 어떻게 그대로예요? 너무 아름다워요.”

“동생이야말로 애 엄마로 보이지 않아.”

“다 언니가 주신 영약 덕분이죠. 우리 애들도 언니 덕분에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잘 자라고 있어요.”

“다행이네!”

종리연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은소청의 얼굴에 살짝 안타까운 빛이 떠올랐다.

이십 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녀의 얼굴에 어린 고독과 그리움은 전혀 옅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시간은 이십 년 전에 멈춰 있었다.

어디 종리연뿐일까? 오늘 이곳에 모인 모두가 그랬다. 그나마 다른 이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그리움을 해소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종리연은 아직도 담호의 잔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은 그녀를 신의라 부르며 존경의 염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녀에겐 그 어떤 위안도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은거를 한 채 세상과 완전히 담을 쌓고 지내고 있었다. 그녀가 어디에서 은거를 하고 있는지 초연운이나 현소 진인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세상에 모습을 보이는 날은 오직 일 년에 한 번, 방가객잔에 모일 때뿐이었다.

“어서 오거라.”

“종리 소저!”

“누나!”

현소 진인과 초연운, 방진보가 뒤이어 그녀를 맞이했다.

마지막으로 합류한 이는 황혜령이었다.

황혜령은 묵일광과 함께 왔는데, 무려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난 아이들이었다.

첫째는 겨우 열대여섯밖에 되지 않았는데 덩치가 묵일광에 육박하고 있었다. 녹림에서는 그를 벌써 차기 총채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담소를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이젠 각자의 길을 가고 있기에 일 년에 한 번밖에 만날 수 없었다. 때문에 할 말이 무척 많았다.

방진보가 그들에게 말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모두 안에 들어가세요. 안에 모든 음식을 차려 놨어요.”

“너는?”

“저는 어죽을 가지고 들어갈게요.”

초연운의 질문에 방진보가 객잔 한쪽에서 끓고 있는 커다란 솥을 바라봤다. 솥 안에는 객잔 앞에 있는 강에서 잡은 물고기들이 각종 양념과 함께 끓고 있었다. 이른 아침 두 아들과 함께 잡은 물고기들로 어죽을 끓인 것이다.

초연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현소 진인 등을 바라봤다.

“자자, 우리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시죠. 오랜만에 화산대숙수의 음식을 먹을 생각에 아침도 안 먹고 달려왔더니 배고프네요. 하하!”

그가 사람들을 이끌고 객잔 안으로 들어가고 앞마당에는 방진보와 흑귀만이 남았다.

방진보는 가만히 흑귀의 목덜미를 두들겼다.

“너도 참 어지간하구나.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해도 주인을 그리워해 떠나지 않으니.”

푸르르!

흑귀가 눈을 감은 채 방진보의 손길을 즐겼다.

담호가 사라진 후 흑귀도 한동안 종남산에서 떠나지 못했다. 마치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물 한 모금, 풀 한 포기 먹지 않고 석상처럼 서 있기만 했다.

보다 못한 종리연이 흑귀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서 있었을 것이다.

주인을 기다리는 흑귀의 충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시울 붉히게 만들기 충분했다.

“먼 길을 오느라 힘들었지. 조금만 기다리거라. 너를 주려고 따뜻한 여물을 쒔으니까.”

방진보가 속삭이자 흑귀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꼬리를 흔들었다. 방진보는 다시 흑귀의 목덜미를 두들겨 준 후 솥으로 걸어갔다.

일단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에게 어죽을 갖다준 후 흑귀를 챙겨 줄 생각이었다.

솥뚜껑을 열자 매콤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반나절을 푹 끓였더니 제대로 익었다.

방진보가 미소를 지으며 커다란 국자로 솥 안을 휘휘 저을 때였다.

푸르르!

갑자기 흑귀가 투레질을 했다.

방진보는 흑귀의 반응이 여물을 달라고 하는 줄 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갖다줄 테니까.”

두두두!

갑자기 흑귀의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멋대로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이다.

방진보가 당황해서 국자를 놓고 뒤돌아봤다.

“야!”

휘잉!

그가 뒤돌아보는 순간 강렬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매화 잎이 흩날렸다.

난무하는 매화 잎에 가려 흑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방진보는 잔뜩 인상을 쓴 채 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잠시 후 바람이 지나가고, 흩날리던 매화 잎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제야 흑귀가 보였다.

저 멀리 흑귀가 누군가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누구?’

방진보가 눈을 잔뜩 찌푸렸다. 흑귀의 커다란 머리에 가려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귀의 두툼한 목덜미를 두들기는 손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온통 흉터로 뒤덮인, 굳은살이 마치 정(釘)처럼 박여 있는 그 손을 보는 순간 방진보는 그만 국자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챙그랑!

“왜?”

“무슨 일이야?”

객잔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소리에 놀라 창문을 열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국자를 바닥에 떨어트린 채 멍하니 서 있는 방진보의 뒷모습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방진보가 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흑귀, 그리고…… 그가 있었다.

완(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