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1화 (1/916)

서장

한 없이 넓은 우주의 어느 곳, 한 어렴풋한 금색 빛이 쏴아아- 소리를 내며 일정한 속도로 칠흑 같은 우주를 비행하고 있었다. 끊길 듯,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이 금빛 소리는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꼭 섬뜩한 지옥을 연상케 하는 소리였다.

그로부터 셀 수 없는 세월이 지났을 즈음, 돌연 금색 빛 앞에 짙은 남색의 거대한 행성이 나타났다.

쾅!

빛은 거대한 폭음과 함께 행성이 이끄는 힘에 의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행성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빛은 행성 표면의 대기와 맞닿았고, 그 순간 빛은 맹렬하게 타오르는 유성이 되어 바다로 추락했다.

* * *

대제(大齐) 천원(天元) 9년.

한 관원이 조정에 고하길, 정체불명의 물체가 동쪽 바닷가에 떨어져 해일을 일으켰고, 그 결과 섬 20여개가 물에 잠겼으며 거대한 파도가 월부시(越府市) 해안을 덮쳐 수만 채의 가옥이 파괴되고 무수한 백성과 가축이 죽었다고 고하였다.

-《동주기(东洲记)》

1화. 어촌의 소년

대제(大齐) 개원부(开元府) 천주(泉州)의 어느 외진 어촌에 조그만 소란이 일어났다. 이 어촌에 있는 한 허름한 통나무집 앞에서 일어난 소동이었다.

집 앞에는 웬 화려한 장식의 마차와 칼로 무장한 검은 옷의 기사들이 서 있었고, 이를 목도한 마을 사람들이 흥분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싼 채 저마다 조용히 수군거리고 있었다.

“정말로 금씨 가문인가? 풍성(丰城)의 그 금씨 가문?”

“응! 확실해! 저 사람들 옷에 수놓인 금색 문양을 좀 봐! 개원부에 저런 문양을 수놓을 수 있는 건 풍성의 금씨 가문뿐이라고!”

“쯧쯧, 석정(石亭)이 아내와 자식을 두고 떠난 후 10년간 소식이 없어 진즉 죽은 줄 알았더니……. 금씨 가문 일원이 돼 석목(石牧)을 데려가려 사람까지 보낼 줄이야. 상상도 못했네. 몇 년 전 석목의 모친이 병사하지 않았다면 모자 둘이 평생 부족하지 않을 부귀영화를 누렸을 텐데……. 안타깝구먼!”

“꼭 그렇다 할 순 없지! 방금 전 금씨 가문 사람들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석정은 이미 금씨 가문 사위가 되었다고 하네. 만약 석목의 모친이 죽지 않았다면 석정은 애초에 석목을 데리러 오지도 못 했을 걸세.”

“어쨌든 석목도 출세한 게지. 어제까지 고아였던 석목이 오늘은 금씨 가문의 큰 도련님이 됐지 않은가.”

모두가 집중하고 있는 시선을 따라가니, 수군대는 사람들 너머 푸른 옷을 입은 노인과 함께 유난히 사람의 이목을 사로잡는 한 소년이 보였다.

나이는 열넷이 채 되지 않아보였고, 바닷가에서 자란 까닭에 피부는 살짝 검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짙은 눈썹과 큰 눈은 아주 인상적이었고, 키 역시 또래들보다 한 뼘 정도는 더 커서 누구의 눈에도 쉽게 띄였다. 거기다 낡은 옷 사이로 어렴풋이 비치는 탄탄한 근육까지 더해져, 소년에게선 전체적으로 또래답지 않은 야성미가 느껴졌다. 이 소년의 이름이 바로 석목이었다.

“아버지께선 병이 깊어 병상에 누워 계시는데다, 저한테 저도 모르는 누이동생이 있다고요?”

석목이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맞습니다, 어르신의 병이 위중해 어쩌면 이번엔 더 버티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하여 부인께서 이 노인네를 보내 석목 도련님을 모시고 오라 분부하셨습니다. 이젠 정말 어르신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노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부인께서요? 아버지는 그 오랜 세월 내내 어머니를 방치하더니 이제와 저를 아들로 인정하려 하신다고요? 돌아가십시오. 저는 당신과 금씨 가문으로 가지 않을 겁니다.”

석목은 굳은 표정으로 망설임 없이 말했다.

“허! 아무래도 석목 도련님께서 어르신에 대한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어르신이 몇 년간 마을로 돌아오지 않은 것은 사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련님과 어르신이 만나기만 한다면 모든 오해는 다 눈 녹듯이 풀릴 것입니다.”

노인이 잔기침을 하며 말했다.

“당신이 아무리 좋게 말하려 한들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석목이 콧방귀를 뀌는 것을 보며 노인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한참을 석목의 눈만 바라보던 노인이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최근 몇 년간 도련님이 마을에서 사들인 약초가 말도 안 될 정도로 값이 싸지 않았습니까? 현성무관의 수업료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많이 저렴하지 않던가요? 게다가 석목 도련님이 바다에서 잡아온 해산물이 비싼 값에 잘 팔리지는 않았습니까?”

석목의 낯빛이 변했다.

“그 말은 그 모든 걸 아버지가 도운 것이란 말입니까?”

“그건 이 노인네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모두 부인께서 직접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일순 안색이 급변한 석목은 할 말을 잃고 그저 우물쭈물하기만 했고, 그를 보며 노인은 마침내 비장의 수를 내놓았다.

“참, 석목 도련님께선 쉬체지술(淬体之术)을 수련하고 계시지요? 분명 진정한 무인이 되고 싶으실 겁니다. 도련님께서 어르신을 만나러 가겠다고만 한다면 부인께서 개원무원(开元武院)에 입교할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물론 실제로 입교할 수 있을지는 석목 도련님의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지만요.”

“개원무원이라고요?”

석목이 살짝 동요했다.

“도련님도 무인의 길을 걷고 있으니 잘 아시겠지만, 본국의 4대 무원은 5년에 고작 단 한 번만 사람을 모집합니다.

입교시험에 참가하기 위한 자격은 크게 두 가지로, 15세 이전에 쉬체지술을 대성해야 하며 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하지요. 기를 느껴야만 진기를 수련하고 경맥을 뚫어 진정한 무인이 되는 겁니다.

기를 느끼기 위해선 반드시 기령단(气灵丹)을 복용해 기를 이끌어야 하는데 이 단약은 매우 귀해 설령 금씨 가문이라도 10개 이상을 구하기 힘듭니다. 도련님 혼자서는 한 평생 노력하더라도 꿈을 이룰 수 없을 겁니다.”

노인이 침착하게 말했다.

한참 침묵하던 석목이 차갑게 입을 뗐다.

“3일 뒤에 다시 오십시오. 그 때 다시 대답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 노인네는 3일 후에 있을 기쁜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노인은 석목의 마음이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더 이상 집요하게 권하지 않고 곧바로 허리를 숙이며 작별을 고했다.

* * *

기사(騎士)들이 둘러싼 마차가 어촌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았을 즈음이었다.

한 덩치 큰 기사(騎士)가 더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성(成) 집사님, 정말 이렇게 돌아가는 겁니까? 사람을 시켜 강제로 데려간다면 시간을 허비할 필요도 없을 텐데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석목 도련님이 금씨 가문 적통은 아니지만 어르신의 혈육이다. 절대 소홀히 대접해서는 안 돼. 만약 어르신과 부인께서 알게 된다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야!”

노인이 곧장 낯빛을 흐리며 꾸짖었다.

“알겠습니다. 소인이 어리석었습니다.”

덩치 큰 기사는 금세 두려워하며 움츠러들었다.

바로 그 때였다. 길가에 돌연 인영이 스치고, 노인의 무리와 같은 복장을 한 기사가 나타나 노인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급하게 말했다.

“성 집사님, 근처에서 다섯째 어르신의 수하인 표(彪)씨 형제를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 아직 다섯째 어르신이 포기하지 않은 듯하구나. 표씨 형제는 후천(后天) 초기 경지에 올랐으니 내가 직접 대적하는 수밖에 없다. 너희 중 몇은 여기 남아 기다리고 너는 길을 안내해라! 내가 직접 나서서 해결하겠다.”

성 집사가 미간을 찡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예!”

기사는 즉시 왔던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성 집사도 곧 휙, 소리와 함께 말에서 내려 기사와 같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이 동작은 매우 가벼워 마치 무게가 아예 없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머지않아 그들은 수풀 속으로 사라졌고, 덩치 큰 기사는 남겨진 몇 사람과 마차를 둘러싸고서 조용히 돌아올 이들을 기다렸다.

* * *

저녁 무렵, 어촌에서 1리 떨어진 어느 이름 없는 언덕 위에 석목이 보였다. 석목은 어렴풋이 비추는 달빛 아래서 홀로 묘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묘 앞의 노란 비석엔 ‘석문 왕씨(石门王氏)의 묘’ 라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어머니, 무인의 꿈을 쫓겠다는 핑계로 어머니를 떠났던 아버지는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아내와 혼인해 데릴사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상상도 못했지요. 어머니께서 저승에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이 목이는 반드시 진정한 무인이 될 것입니다. 그것도 세상에서 제일 강한 무인이요!”

묘 앞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석목이 갑자기 일어나 무술을 펼쳐보였다.

석목의 모습은 마치 날랜 호랑이 같았고 동작은 점점 빨라졌다. 석목이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주변의 흙은 모래구름을 만들었고, 석목은 곧 그 뿌연 연기 속에 가려졌다.

그 순간 석목이 휙, 하고 안개 속에서 튀어나왔다. 곧이어 근처 나무를 향해 주먹을 거세게 내지르자, 거대한 폭음과 함께 나무가 흔들리며 무수히 많은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나무엔 주먹 모양으로 패인 옴폭한 무늬가 새겨졌다.

석목은 패인 나무를 보며 눈꼬리를 올렸다.

이 권법은 석목이 마을 무관에서 배운 유일한 권법이었고, 이는 대제국에 가장 널리 퍼져있는 무공이었다.

무관 사부는 석목의 쉬체지술이 이미 7성의 경지에 올랐다고 말했었다. 이제 쉬체지술을 대성하고 소문으로만 듣던 기를 느낄 수 있기까지 단 2단계 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

석목이 이 경지에 오르기까지는 겨우 4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항간엔 돈이 없다면 공부를 하고 돈이 있다면 무술을 배우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석목이 무술을 배우겠다고 결심한 후 무관 수업료 은자 32냥을 벌기 까지는 장장 반년 가까이 걸렸다. 이 수업료마저도 무관에 사정해 깎은 것이기에 이조차 다른 제자들보다 매우 적은 돈을 내고 입관한 것이었다.

석목은 쉬체지술을 수련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약욕을 받기 위해 생선을 잡아 번 돈 전부를 다 투자해서 수중엔 항상 돈이 없었다.

그런 석목이 쉬체지술 7성이라는 높은 성취를 이루자 무관의 모두가 놀랐다. 몇몇 사부는 석목이 뛰어난 근골과 타고난 재능을 가진 것에 아주 경이로워하기도 했다.

석목은 그간 무관의 약사에게 탕약을 조제 받아 몸을 담그긴 했었지만, 가난한 소년이 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당연하게도 평범한 약초뿐이었다. 하여 매우 미미한 약효만 얻었을 뿐이었다.

석목은 여기까지 생각하다 한숨을 내뱉었다.

석목도 제 근골이 매우 평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석목이 짧은 시간 안에 높은 경지에 오른 건 바로 2년 전 기연 덕분이었다. 이는 성 집사에게 당장 금씨 가문으로 가겠다고 답하지 않은 이유와도 같았다.

석목은 생각을 접고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의 달과 눈을 맞춘 뒤, 홀연히 몸을 돌려 언덕 아래로 달려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