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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3화 (3/916)

3화. 진 이모

석목 일행은 성 2개를 지나, 장장 한 달여 만에 마침내 풍성에 도착했다.

마차는 그대로 성문을 지나 성의 서북쪽으로 이동했고, 석목은 마차의 창가에 앉아 거리를 구경하기 바빴다.

석목은 어려서부터 어촌에서 자라, 집에서 멀리 떠나 본 경험이 없었다. 이전에 가봤던 가장 큰 도시는 기껏해야 근처의 현성 정도를 꼽을 만했다.

풍성은 과연 천주의 가장 큰 성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거리는 왁자지껄하며 떠들썩했고, 높고 큰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지만 석목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아주 차분했다.

일행은 속도를 늦춰 반 시진을 더 이동했고, 곧 허름한 저택 앞에 멈췄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석목의 시야에 들어온 건 대문에 걸린 흰색 천이었다. 순간 안색이 굳은 석목은 집사 금성과 함께 천천히 저택에 들어섰다.

하얗게 꾸며진 장례식장엔 소복을 입은 여인과 10살 정도 돼 보이는 소녀가 함께 있었다.

여인의 나이는 20대 후반정도로 보였고, 외모는 단아했다.

곧 석목을 발견한 여인이 말했다.

“늦었구나, 네 아버지는 이미 몇 일전에 돌아가셨단다. 네가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던 자식이니 명복을 빌어드리고 오렴. 다른 일은 돌아와 다시 얘기하자꾸나.”

여인의 곁에 있던 소녀는 울어서 발갛게 부은 눈에 호기심 어린 빛을 일렁이며 석목을 쳐다보았다.

이내 석목은 방 중앙에 있는 검은색 목관을 보고 심경이 복잡해졌다.

여인도 석목을 재촉하지 않았고, 금성은 그 틈에 여인의 앞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 이야기를 건넨 뒤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석목은 목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차분하게 말했다.

“관 뚜껑을 열어주십시오. 아버지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래, 그리하려무나.”

곧 여인이 박수를 치자, 양쪽에서 두 사내가 나타나 관 뚜껑을 열어줬다.

석목은 고개를 숙여 목관에 누워있는 자신과 똑 닮은 사내를 마주했다.

일순 낯빛이 창백해진 석목이 잠시 후, 허리춤에서 평범해 보이는 거울을 꺼내 아버지의 시신 곁에 내려놓았다.

“그건…….”

여인이 눈썹을 찡그렸다.

“저는 아버지가 어떤 사정이 있어 우리 모자를 버린 채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곤 임종 직전에 이 거울이 아버지와 함께 묻히길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석목은 그렇게 천천히 말한 뒤, 향로에 향초를 꼽고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3번을 절했다. 고요한 방 안에 바닥이 쿵쿵, 울릴 정도의 소리가 퍼졌다.

여인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석목의 행동을 막지는 않았다.

다시 일어난 석목은 잠시 넋이 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게 목관만 내려다보았다.

이내 여인이 손을 흔들자 두 사내는 다시 관 뚜껑을 덮었다.

“따라 오너라, 이곳은 대화를 나누기 적절한 장소가 아니구나. 네 아버지가 생전에 너에게 전해 달라고 한 말이 있다.”

여인은 석목을 데리고 옆방으로 이동했고, 석목도 조용히 뒤를 따랐다.

* * *

여인은 옆방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돌아서 말했다.

“네가 아버지에게 기꺼이 절을 하고 널 데려온 나를 원망하지 않았으니, 나 또한 너에게 어머니라 부르라 고집하지 않겠다. 원한다면 나를 진 이모라고 부르려무나. 이 아이는 너와 배다른 누이동생인 옥환이란다. 옥환아, 이리와 네 오라버니께 인사하렴.”

“네, 오라버니를 뵙습니다.”

석옥환의 깜찍한 인사가 이어졌다.

석옥환은 둥근 눈썹과 큰 눈, 아담한 코와 입술을 가진 소녀였다. 여인의 곁에서 눈동자만 귀엽게 굴리던 석옥환은 어머니의 말에 금세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화답했다. 굉장히 듣기 좋은 낭랑한 목소리였다.

석목은 석옥환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네 아버지는 비록 데릴사위로서 금씨 가문에 들어온 건 맞지만 생전에도 성밖 사유지를 포함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모두 장남인 네게 물려주는 게 옳겠지. 나와 옥환에겐 이 저택만 있으면 돼.

어찌됐건 금씨 가문의 사람이니 재물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게다. 네 아버지는 금씨 가문을 위해 많은 공을 세웠단다. 이리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게야……. 그 이는 이 공로에 대한 대가를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으니 그 이를 대신해 네게 두 가지 선택권을 주겠다.”

진 이모는 여기까지 말한 뒤 잠시 말을 멈췄다.

석목은 그녀의 말에 매우 의외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 집사처럼 강해지고 싶다면 그 공로를 대신해 우리 가문의 기령단을 주겠다. 추후 개원무관에 입교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야. 둘째는 금씨 가문의 힘을 빌려 대제국의 작위를 받는 것이다.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되고 그 명예와 봉록이 후대까지 이어지겠지.”

진 이모가 석목을 보며 말을 이었다.

“작위요?”

석목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 대제의 작위는 공(公), 후(侯), 자(子), 남(男), 훈(勋)으로 나뉘고 각자 그에 맞는 신분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 높은 작위는 불가능 하겠지만 네 아버지의 공로와 금씨 가문의 세력이라면 훈 정도의 작위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네가 관직을 꿰찰 수 있게도 도와줄 거야.”

진 이모가 몇 마디 덧붙였다.

“아닙니다! 기령단을 받겠습니다.”

석목은 진 이모의 말을 다 듣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

“잘 생각하는 것이 좋을 거야. 내가 너라면 분명 작위를 선택할 텐데.”

진 이모가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너는 기와 무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진 이모가 물었다.

“그렇게 물으시는 진 이모는 무인에 대해 잘 아십니까?”

석목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진 이모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말없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한쪽 벽에 걸려있던 금으로 장식된 검이 순식간에 그녀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휙휙-, 진 이모는 파공성을 내며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 주위로 검의 잔상이 겹겹이 드리워졌고, 순간 검광이 번쩍이는 빛을 내며 검은 손잡이만 남긴 채 벽에 완전히 틀어박혔다.

석목은 흔들리는 벽을 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이래봬도 금씨 가문 3대 후천무인 중 한 명이란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무슨 능력으로 금씨 가문에 기령단을 요구했겠느냐. 기령단의 가치는 만금에 버금가 돈을 내고도 살 수 없는 귀한 물건이다.

아무리 네 아버지가 생전에 어마어마한 공로를 쌓았다 하더라도 금씨 가문의 일부는 분명 진귀한 단약을 네게 주는 것에 불만을 가지겠지. 하여 내가 두 번째 선택지를 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한동안 널 그들로부터 보호해줄 순 있겠지만 평생을 보호해주진 못할 테니.”

“어떠한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전 반드시 진정한 무인이 될 것입니다.”

석목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얘기하니 나도 더 이상은 권하지 않으마. 그럼 무인의 경지를 어떻게 구분하는지는 알고 있느냐?”

진 이모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무인은 쉬체, 정식(正式)무인, 호국(护国)무인으로 나뉜다고 알고 있습니다. 호국무인이 된다면 왕후대신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지요!”

석목이 말했다.

“그래, 마을의 무관에서 들은 것이겠지.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마을무관의 사부 중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고 해봐야 후천의 경지에 갓 올랐을 테니 제대로 된 구분법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했겠지.”

진 이모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진 이모의 가르침을 원합니다.”

“쉬체, 정식무인과 호국무인은 일반인이 부르는 명칭이란다. 동주 대륙에서는 쉬체를 수련자, 정식무인은 후천(后天)무인, 호국무인은 선천(先天)무인이라 불러.

수련자 단계면 누구나 쉬체지술을 훈련할 수 있지만, 근골이 약한 사람이라면 평생을 노력해도 대성하지 못한단다. 후천무인은 기를 느끼고 진기를 단련하는 진정한 무인이야. 후천무인이 진기를 운용한다면 무장한 병사 100명을 대적할 수 있지.

보통 사람이 보기엔 진정한 무인으로 보일거야. 하지만 선천무인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고수란다. 선천무인은 10명 이상의 쉬체지술을 대성한 무인과 대적하면서도 후천무인을 죽일 수 있다. 100명의 후천무인이 선천무인 한 사람에게 달려들어도 어쩌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

선천무인의 경지에 오른 이는 진기를 쏘아 멀리 있는 사람도 죽일 수 있기 때문이야. 일반적으론 후천무인은 선천무인에게 근접하지조차 못한단다. 선천무인의 경지에 오르는 건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어려워. 알다시피 전 대제국을 통틀어 선천무인의 수는 불과 7~8명에 불과하고.”

진 이모가 자세히 설명했다.

“선천무인의 수가 그렇게 적을 줄이야…….”

석목은 크게 놀랐다.

“7~8명이 적은 수라곤 볼 수 없어. 선천무인으로 키워내기 위해 투입되는 자원은 천문학적이거든. 관건은 그만큼 투자를 하더라도 선천무인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가능성이 극미하다는 것이지.”

진 이모는 씁쓸하게 웃었고, 석목은 침묵했다.

“좋아. 선천무인은 아직 너무 먼 이야기겠지. 하지만 만약 네가 그 경지에 진입하게 된다면 너는 그 즉시 대제국의 가장 높은 사람이 될 거야. 황제조차 네게 공손하게 대하며 관계를 맺고자 할 테지. 이것이 바로 호국무인이란 호칭이 붙게 된 이유야. 이제부턴 쉬체와 기에 대해 가르쳐 주도록 하마. 쉬체신공의 몇 단계까지 올랐지?”

진 이모가 질문했다.

“7성까지 올랐습니다.”

석목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를 느끼고 개원무원에 입교하는 건 석목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7성이라면 조금 낮구나. 개원무원이 1년 뒤 모집을 시작할 텐데 그 안에 9성에 도달할 수 있겠니?”

석목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원래대로라면 가망이 없었겠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네가 1년 내 쉬체지술 9성의 경지에 오르게 돼 기를 느끼더라도 이는 개원무원에 입교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했을 뿐이란다. 그 시기가 되면 맹렬한 경쟁이 벌어질 거야.”

석목은 진 이모의 말을 더욱 집중해 들었다.

“이번에 개원무원에 입교하려는 수련자 중엔 어려서부터 일찍이 쉬체지술 9성 혹은 10성에 달성한 천재들이 많이 있다고 해. 쉬체지술의 높은 경지에 오를수록 기를 느낄 수 있는 확률은 더 훨씬 높아지지.

이제까지 여러 사례를 봤을 때, 기령단의 도움을 받더라도 네 나이에선 기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란다. 대부분의 수련자들이 30대가 넘어서야 수차례 기령단을 먹고 겨우겨우 기를 느껴 후천무인의 경지에 들어선다.

개원무원에서 10~15세 사이의 수련생만을 뽑는 이유는 10세 이하는 근골이 아직 자리를 잡지 않아 쉬체지술을 수련할 수 없고, 15세 이상은 선천무인을 바라 볼 수 있는 잠재력이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야.

대제국엔 많은 후천무인이 있지만 그중 선천무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무인은 100명조차 되지 않아. 우리 금씨 가문이 천주의 명문세가일 수 있는 건 선천무인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는 어르신이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단다.”

말을 끝낸 진 이모의 얼굴엔 어쩐지 오만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기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습니까?”

석목은 이야기를 듣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석목도 기령단을 복용한 모든 사람이 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성공할 확률이 그 정도로 낮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후회할 것 같다면 다른 선택지를 골라도 돼.”

진 이모가 석목을 보며 웃었다.

“아니에요. 저는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석목이 고개를 저었다.

“성밖 사유지의 땅문서와 그 외에 필요한 것들을 줄 테니 우선 사유지에서 생활하도록 하려무나. 금성 집사가 안내해 줄 것이다. 만약 필요한 것이 있다면 금성에게 전달하면 돼.

1년 후, 기령단을 얻어오면 따로 기별을 줄 테니 그때까지 쉬체지술을 훈련하는 것 외에도 다른 실전무공을 배울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거야. 금씨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무공들은 많이 있지만 다른 성씨를 가진 사람에게는 전수해 줄 수 없으니까.”

진 이모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약속을 해줬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했던 석목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감격에 젖어 있었다.

1각 후, 석목은 나무상자를 받아 들고 금성의 안내에 따라 저택을 나섰다.

나무상자 안엔 토지문서와 같은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이 들어 있었다. 교외에 위치한 3~4만평 크기의 논밭을 끼고 있는 넓은 사유지와 성 안에 있는 시설이 좋은 주루 그리고 3천 냥의 은전이었다.

그렇게 석목은 하루사이에 지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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