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사유지
석목이 저택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중년의 사내가 찾아와 진 이모를 향해 분노를 토해냈다.
“일곱째야. 네가 정녕 기령단을 네 조카가 아닌 그 놈에게 주려는 것이냐?”
“이 일은 아버지께서도 허락하신 일이에요. 무슨 이의라도 있으신지요?”
“있고말고! 표씨 형제 일은 그냥 넘어간다 치더라도 그 석목이란 놈은 우리 금씨 가문도 아닌데 어째서 그런 외지인에게 기령단을 주려한단 말이냐! 네가 다시 말씀드리면 아버지께서도 네 말을 들어주실 것이다. 네 조카가 기를 느끼는 데 실패한 것을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내년 개원무원에 입교하지 못한다면 평생 후회하며 살게 될 것이야!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칠 순 없다!”
“하! 어째서라뇨? 그 아이는 제 낭군님의 하나뿐인 친아들이기 때문이지요! 제 낭군님 덕에 금씨 가문은 잃어버린 재산의 절반 가까이나 되찾을 수 있었어요! 이 이유라면 이제 납득이 되시겠어요?”
콧방귀를 뀐 진 이모가 매몰차게 대답했다.
“그놈이 너와는 어떠한 혈연관계도 아닌 남인데도 넌 그놈 편을 드는구나!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 사이에 형제의 정을 바라지 마라. 나도 네게 더 이상 부탁하지 않을 것이며 내 가산을 전부 탕진해서라도 내 자식을 위해 기령단을 구해 먹일 것이다!”
중년 사내는 곧 씩씩거리며 떠났다.
“어머니, 진짜 저렇게 다섯째 백부님을 보내실 겁니까?”
사내가 떠나고, 어디선가 석옥환이 나타나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괜찮다. 너도 너희 다섯째 백부님이 무인이 아니라는 걸 알지 않느냐, 애당초 그리 많은 약욕을 하고서도 겨우 쉬체신공을 대성했으니, 기령단을 복용하더라도 기를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낮을 거야. 이리 독촉하는 건 네 사촌 오라비를 위해 마지막 도박을 거는 것에 불과하단다.”
“그렇군요. 금전 오라버니 자질은 우리 오라버니보다 떨어질 겁니다. 설령 운 좋게 기를 느껴도 무원의 시험을 통과할 확률은 매우 낮을 걸요?”
석옥환이 웃으며 말했다.
“아, 네가 벌써 네 오라비를 따르는구나. 허나 내가 네 오라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이게 전부란다. 내가 다른 일에도 다시 나서서 도와준다면 이제 다른 금씨 가문 사람들이 불만을 표출할 게야.”
“네, 오라버니를 뵌 건 처음이지만 매우 좋은 사람 같았습니다. 최소한 금씨 가문 몇몇 식충이들보다는 훨씬 강할 겁니다!”
금옥환이 히히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네 조부님께서 이리 쉽게 기령단을 내주신 것은 네 얼굴을 봐서 그런 것도 있을 거야. 네가 이미 12살에 기를 느끼고 쉬체지술 10성의 경지에 올랐으니 네 조부님께서도 네게 거는 희망이 크실 거란다.”
진 이모도 웃으며 말했다.
“마음 놓으십시오. 1년 안에 그 검법을 대성할 것이니 개원무원에 들어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거예요. 조부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진 이모는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이야기하는 석옥환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엔 여식을 향한 사랑이 가득 흘러 넘쳤다.
* * *
그 시각, 석목은 풍성 10리 밖 한 장원에 서 있었다. 석목은 이미 방에 둘러싸인 넓은 마당 곳곳을 관찰하고서 꽤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장원의 면적은 4~500평정도 됐고 방은 총 20여개가 있었다. 그중 석목이 가장 마음에 든 건 넓은 마당이었다.
석목은 열댓 명의 남녀 하인과 소작농에게 질문했다.
“이전에 이 사유지와 주위 논밭은 누가 관리했느냐?”
“접니다. 도련님.”
개중에 깨끗한 옷을 입은 한 사내가 몇 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사내는 석목에게 매우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이름이 무엇인가? 이곳에서 나고 자랐나?”
석목은 성실하고 충직해 보이는 사내를 보고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인의 이름은 장쇄입니다. 저희 집은 8대째 여기 풍성에 살아왔습니다.”
장쇄가 다시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래, 좋다. 이제 이 사유지와 논밭은 장쇄 자네에게 관리를 맡기겠네. 다른 사람들의 일과 소작료도 그대로 두고 바꾸지 않을 테니, 내일 주루를 관리하는 자에게 여기 방문하라고 알려다오.”
잠시 생각하던 석목이 빠르게 분부했다.
“네, 도련님.”
장쇄는 매우 기뻐하며 답했다. 다른 하인들과 소작농 역시 크게 한숨 돌리며 몸을 굽혀 대답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떠나고, 석목이 뒤돌아 금성에게 물었다.
“성 집사님, 이 정도면 봐줄만 하지요?”
“제법입니다! 이 노인네의 눈에는 도련님이 전혀 어촌출신의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금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의외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일을 지시할 수 있다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군요. 성 집사님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석목이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도련님이 무엇을 분부하시던 이 노인네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조건 들어드리겠습니다.”
금성은 약간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가 또 곧바로 대답했다.
“실력 있는 무관 사범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사유지 내에서 1대 1로 지도 받으며 수련하고 싶은데 성 집사님이 추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무관이라면 풍성의 4대무관이 유명하지요.”
“권법도 함께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도법과 권법을 배우시겠다면 유풍무관의 여창해 사범을 추천합니다. 뛰어난 기예를 지닌 인물이지요. 허나 도련님께선 도법에 관심이 있는지요?”
“네, 도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제게도 잘 어울릴 것 같군요.”
“여창해의 풍치13식도법(风驰十三式刀法)과 쇄석권(碎石拳)은 매우 유명합니다. 허나 1대 1로 지도를 받는다면 그 수업료가 상당할 것입니다.”
금성이 조금 망설이며 천천히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진정한 실력을 가진 분이라면 돈은 얼마든 낼 수 있습니다.”
석목은 3천 냥의 은전을 가지고 있었기에 여전히 기세등등할 수 있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 노인네가 내일 여 사범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금성도 웃으며 대답했다.
* * *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났다.
뜨거운 태양 아래 무언가에 진지하게 열중한 석목의 모습이 보였다. 석목은 바로 교외 사유지 마당에서 3척 길이의 푸른 장도를 휘두르고, 칼의 잔상은 석목의 주변에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광장의 사방으론 장작과 허수아비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또한 그 곁엔 무거운 돌과 칼, 창 등의 무기를 놓는 나무 거치대도 있었다.
“멈춰라!”
그때, 갑자기 우악스러운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석목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도를 거둬들였다.
“나쁘지 않구나. 마침내 풍치13식의 기초를 장악했어. 허나 아직 매우 부족하다. 적과 대적할 수 있는 단계까지는 멀었어.”
사내는 광장의 바깥쪽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눈빛은 매우 총명하게 반짝였으며, 마른 몸집이지만 구릿빛 피부로 인해 아주 탄탄해보였다. 아주 영리하면서도 용맹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였다.
“사부님께서 지도해주신 덕분입니다. 사부님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이렇게나 현묘한 도법을 고작 석 달 안에 깨우치는 건 불가능 했을 겁니다.”
석목이 공손하게 답했다.
이 마른 사내가 바로 유풍무관의 사범이자 후천무인 중급의 경지에 오른 여창해였다.
여창해는 3달 전 석목과 만나 놀랄만한 도법으로 석목의 마음을 확, 사로잡았다. 그렇게 석목의 스승이 돼 매일 2시진씩 석목을 지도하고 있었다.
“풍치도법은 수련자급의 도법이지만, 공법만 따라준다면 후천무인의 경지에 올라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람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초식 자체는 복잡하지 않아.
난 이 도법을 이용해 나와 같은 경지의 무인 2명을 단 몇 호흡 만에 벨 수 있었다. 수련자급 무공 중 가장 복잡한 것은 아마 소주천검법(小周天剑法)일 것이다. 이 검법은 306식으로 이뤄져있고, 많은 이가 평생을 수련하고 있으나 정통하기는 어렵다.”
여창해가 천천히 말했다.
“사부님께선 무공은 무예와 공법을 나눈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중 무예는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취하는 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이고, 공법은 기를 단련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둘은 서로 조화로워야 하고 어느 하나가 부족해서도 안 된다고 하셨는데 만약 둘 중에 경중을 따진다면 사부님께서는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석목이 물었다.
“허허, 이놈이 궁금한 게 많구나. 이는 과거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궁금증이고, 강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갈리는 문제다.
무예만 수련해선 후천무인의 단계에도 진입할 수 없으니 기초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고, 심법만 수련해서는 진기가 아무리 심후해진다 하더라도 더 낮은 경지의 무인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다.
허나 선천무인의 경지에 오른다면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할 수 있으니, 설령 꼼짝 않고 서있다 하더라도 일반 도검으론 절대 상처를 입을 수도 없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다면 진기의 기운만으로 벼락을 내려 죽일 수도 있지.
이외에도 보통 사람은 100살까지만 살아도 장수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선천무인이 된다면 수명은 그 배로 늘어난다.”
여창해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사부님께선 공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가봅니다.”
“수없이 많고 많은 심오한 그 무공 모두가 무예와 공법을 포함하고 있다. 공법은 일정한 정도 수준에 오르면 그에 상응하는 무예와 어우러져. 둘은 나누어 질 수 없는 사이라 굳이 나눠서 생각할 필요도 없다.
허나 너희 수련자들은 무예를 단련해야만 실력을 높일 수 있다. 절세무공의 비급이 눈앞에 있더라도 너희가 기를 느끼지 못하면 수련할 수 없으니까.
대부분 수준 높은 무공들은 각자가 수련하기에 적합한 경지가 있다. 만약 그 단계를 뛰어넘어 수련하려 한다면 발전도 더디고, 심하면 주화입마(*走火入魔: 뜻 그대로 풀이하면, 불이 나고 악귀가 들어온다. 심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태를 일컬음)에 빠질 수도 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는 뜻이야.”
여창해가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이해했습니다. 혹시 다시 한 번 사부님이 펼치는 풍치13식을 볼 수 있을까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석목이 여창해에게 부탁을 청했다.
여창해는 눈썹을 찡그리다, 마지못해 대답했다.
“풍치13식은 정신력을 매우 많이 필요로 한다. 허나 오늘부터 네게 쇄석권을 전수해야하니 오늘은 한 번만 보여주겠다.”
여창해는 곧 마당의 중앙으로 가 석목이 들고 있는 장도를 건네받았다. 그리곤 작게 숨을 들여 마신 뒤, 빠르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당에 파공성이 일며, 한 마른 사내가 검영에 휩싸였다.
이는 마치 흰 명주가 하늘에서 흩날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창해가 검을 휘두르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져, 흰 명주처럼 보였던 검영은 눈 깜짝할 새 흐릿해졌다가 금세 번쩍하는 빛으로 돌변했다. 그와 함께 몰아치는 거센 강풍 소리가 번져갔다.
석목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