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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7화 (7/916)

7화. 낡은 사찰에서 강시를 만나다

대전에 먼저 와 불을 쬐고 있던 사람은 중년의 사내와 한 소녀였다.

사내는 40대 정도로 보였고, 아주 품위 있는 얼굴이었으나 세월의 흔적이 물씬 풍기는 사내였다.

소녀는 열넷 정도로 보였고, 새하얀 피부에 용모가 매우 빼어났다. 특히 이마에 난 푸른색 커다란 반점이 아주 인상적인 소녀였다.

“아, 도령의 장작이었습니까? 죄송합니다. 주인이 없는 물건인줄로 알고 젖은 옷을 좀 말리고자 불을 지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 노부가 전부 배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내가 서둘러 일어나 예의를 갖춰 말했다. 그러다 바닥에 놓인 거대한 무언가를 보고 금세 겁에 질렸다. 그건 바로 한눈에 봐도 100근은 족히 넘을 것 같아 보이는 야생 멧돼지였다.

튀어나온 두 이빨은 다 갈라지고, 입가에 가득한 피와 흰자를 다 까뒤집고 있는 이 멧돼지는 죽은 지 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듯했다.

“아닙니다, 어차피 쓰려고 베어온 장작인데 어찌 돈 얘기를 하십니까?”

그가 몇 보 앞으로 걸어오자, 곧 모닥불 불빛에 확연한 인영이 드러났다. 등에 칼 한 자루를 메고 있는 그 낯선 소년은 다름 아닌 석목이었다.

“뭐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내는 비로소 한숨 돌리고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감사를 표했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는 낮은 소리로 소녀를 안심시켰고, 푸른 옷을 입은 그 소녀는 석목의 두 눈을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석목은 등에 메고 있던 도를 내려놓고 윗옷을 벗었다. 그러자 사내가 깜짝 놀라 석목을 쳐다보았다. 석목의 몸을 빈틈없이 덮고 있던 아주 두꺼운 흑색 갑주(*甲冑: 갑옷과 투구)를 발견한 까닭이었다.

“그 갑옷은…….”

“이 갑옷을 아십니까?”

석목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아아, 이전에 대장장이가 그 갑주를 만드는 것을 봤습니다. 그 모습이 인상 깊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대장장이가 그 갑옷은 방어능력이 없으며 그저 무인의 수련을 위해 무게를 늘려주는 역할만 한다고 하더군요. 그 갑옷은 몇 근이나 나갑니까?”

“몇 근 되지 않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너무 무거운 건 애초에 입지 못하니까요.”

석목이 모호하게 대답하곤 흑갑의 이음새에 힘을 줬다. 그러자 찰칵 소리와 함께 갑옷이 둘로 나뉘어 떨어졌다. 아니, 그냥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쾅쾅! 거대한 소리를 내며 살짝 바닥이 흔들릴 정도의 위력을 자랑하며 떨어졌다. 사내는 이 광경에 매우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저 정도면 못해도 500근 이상은 될 텐데……. 이 소년은 사람의 형상을 한 괴물이 아닐까? 그게 아니면 어찌 저런 것을 입고 자연스레 움직인단 말인가! 나이는 어려도 신체가 매우 강인한 것이 높은 경지에 있음이 분명하다,’

반면 갑옷의 속박에서 벗어난 석목은 매우 홀가분해 보였다. 이내 칼을 집어 들고 몇 번 쓱쓱, 닦아낸 석목은 바로 멧돼지의 두 앞다리를 잘라냈다. 그런 뒤 손을 한 번 휘두르니 순식간에 돼지가죽과 살이 분리됐다.

이어 석목은 품에서 백색 가루가 담긴 작은 병을 꺼내 돼지 다리에 뿌리고 모닥불 위에 굽기 시작했다. 곧 짙은 고기향이 온 사찰로 퍼져나갔다.

건너편 사내와 소녀는 건량(*乾糧: 곡식 등을 쪄서 말린 것. 먼 길을 갈 때 소지하기 쉽게 만든 간식)을 꺼내 나눠 먹고 있었지만 기름이 잘잘 흐르는 돼지 다리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떡 삼켰다가, 부끄러움에 두 볼이 빨개져 얼른 고개를 폭, 숙였다.

그 모습에 석목은 살짝 미소를 짓다, 잘 구워진 고기 절반을 건넸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이미 장작도 썼는데 고기까지 나눠주시면…….”

사내는 말로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면서도, 얼른 고기를 받아 들었다.

“아버지…….”

소녀는 아버지의 행동에 부끄러워하며 살짝 뾰로통하게 말했다.

“저기 고기가 많이 남아있지 않느냐. 이 정도는 신경도 쓰시지 않을 거야.”

사내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아버지도 참……. 공자님, 감사합니다.”

소녀는 붉어진 얼굴로 주저하다 석목에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멧돼지가 너무 커서 혼자는 다 먹지 못합니다.”

대답 뒤 석목은 남은 다리의 가죽을 벗기려 돌아갔다.

“참! 여긴 풍성에서 많이 떨어져 있습니까? 우리 종씨 부녀는 영성에서 오던 중 큰 비를 만나는 바람에 길을 잃고 여기로 오게 됐습니다.”

“아, 그런 것이군요. 사찰이 황량한데 이리 늦은 시간에 왜 오신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여긴 풍성과 멀지 않습니다. 입구의 산길을 따라 동쪽으로 10리 정도 이동하면 바로 풍성의 서문이 보일 겁니다.”

석목이 바로 대답해주었다.

“다행이군요! 수야, 들었지? 내일이면 풍성에 도착하겠구나. 넌 이제 곧 오씨 가문 며느리가 되는 거야.”

사내가 기뻐하며 여식에게 말했다.

“아버지.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우리 형편이 이러하고 저도 이렇게 추한 모습이니, 그 분이 혼사를 승낙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소녀는 갑작스런 혼사에 대한 언급에 순간 부끄러워졌다.

“네가 어디가 추하단 말이냐! 내 눈에 넌 언제나 사랑스럽기만 하다! 흥! 우리 가문이 몰락해 여기로 오게 된 건 오씨 가문과도 관련이 있다. 수야, 이 일에 관해선 때가되면 이 애비나 오씨 가문 사람들이 얘기해줄 게야.”

사내의 말을 듣고 석목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오씨 가문? 설마 풍성 금씨 가문 세력 하에 있는 오씨 가문을 말하는 것인가? 하지만 두 사람 다 무인은 아닐 텐데…….’

그때, 돌연 멀리서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우르르, 커지며 이곳으로 더욱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어떤 거대한 무언가가 이 사찰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들짐승인가?”

사내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고 차가운 빛이 번뜩이는 단검을 꺼내 소녀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파르르, 떨리는 그의 두 다리를 보니, 결코 전투력이 있다고는 표현할 수 없었다.

“조심하십시오, 들짐승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 산의 것은 아닙니다. 들어본 적이 없는 울음소리에요.”

석목은 모닥불 옆의 도를 들고 대문 쪽을 살기등등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석목은 지난 반년 간 이곳에 있는 온갖 괴수를 다 사냥했었다. 이는 절대 단순한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쉬체지술을 수련함과 동시에 권법과 도법의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

이 산속엔 그리 강한 들짐승은 없어서, 석목은 반년 사이 멧돼지와 같은 들짐승을 100마리나 넘게 죽였다. 하여 석목은 죽이고 싸우는 경험을 많이 쌓아, 피를 본적조차 없는 다른 수련자들과는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됐다.

중년의 사내는 무공은 몰라도 안목은 꽤 뛰어난 편이었다. 그는 석목의 침착함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지만 여전히 여식의 곁을 필사적으로 지켰다.

쾅! 그 순간, 낡은 사찰의 문이 안쪽으로 터지며 열렸다. 무수히 날리는 나무파편 사이로 전신이 까무잡잡한 여느 누군가가 대전으로 돌진해왔다. 아니……, 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사람의 형상을 한 것뿐인 괴물이었다.

“이……, 이건……. 강시! 세상에……! 어찌 이곳에 강시가! 풍성 병사들은 무엇 하는 것인가! 끝났다, 끝났어. 우리는 전부 죽은 목숨이다!”

사내는 괴물을 마주하고 거의 기절할 듯 정신을 놓았다.

석목도 눈앞의 괴물을 보고 몹시 긴장했다. 괴물의 신장은 족히 2장은 돼보였고 오관(*五官: 5가지 감각기관)이 다 모호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큰 구멍만 2개 나있었으며, 전신에 가득한 두꺼운 털, 기이한 녹색 액체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거기엔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냄새까지 함께였다.

* * *

석목이 놀란 사이, 괴물이 울부짖으며 돌진해왔다.

석목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잡념을 떨쳐내고 앞으로 가 도를 휘둘렀다.

펑펑-! 도가 순식간에 괴물의 가슴팍을 다섯 차례나 벴다. 하지만 마치 단단한 나무에 칼질을 한 것 마냥 표면에 얕은 상처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녹색 분비물이 조금 나오긴 했지만 그다지 큰 타격은 없어 보였다.

이내 괴물은 두 팔을 벌려 석목을 꽉 안으려 했다. 그 순간, 석목의 수련 성과가 마침내 빛을 발했다. 그간 갑옷을 입고 산속을 달리던 수련은 절대 헛되지 않은 것이었다.

석목은 어떤 경공도 배우지 않았지만 몸을 빙글 돌려 괴물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리곤 괴물의 뒤에서 다시 한 번 도를 휘둘렀다. 곧 괴물의 허리에는 다시 얕은 상처가 몇 개 더 생겼다.

괴물의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매우 화가 난 듯했다. 괴물은 상반신을 뒤로 비틀더니 괴이하게 180도 회전해 석목을 정면에서 내려쳤다.

쾅!

석목은 괴물의 갑작스런 공격을 피할 수 없었고, 급히 도를 휘둘러 괴물을 막았다. 그런 뒤 강하게 튕겨져 나온 석목은 돌부리에 몸을 세게 박았다. 겨우 다시 일어나긴 했지만 두 눈앞이 다 깜깜해졌다.

괴물은 석목을 놓아줄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듯 다시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진해왔다. 석목도 피하지 않고 작은 기합 소리와 함께 도를 휘둘렀다. 석목이 휘두른 칼이 여섯 개의 잔상을 그리며 괴물을 향해갔다.

윽, 손에 고통이 느껴진 석목은 그만 칼을 놓치고 말았다. 이내 도는 휙, 날아가 대전 기둥에 깊이 꽂혔다.

괴물은 언뜻 보기에는 고작 두 팔에만 얕은 생채기가 생긴 듯했지만, 얼굴은 사정이 달랐다. 괴물의 얼굴엔 긴 검상 2개가 났고, 거기선 엄청난 녹색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강시의 약점은 얼굴이오! 얼굴을 공격하시오!”

그 모습을 보고, 한 쪽에 피해있던 사내가 급하게 소리 질렀다.

그 순간 괴물의 관심은 사내에게로 향했다. 괴물은 석목을 정면으로 상대해선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곧장 모닥불 쪽으로 포효하며 달려갔다.

“이런!”

사내는 매우 놀라 혼비백산했지만 여식이 바로 뒤에 있어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는 이내 단검을 괴물의 머리를 향해 강하게 던진 뒤, 급히 몸을 돌려 여식을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제 몸을 던져서라도 자식을 지키고 싶은 아버지의 애끓는 부성이었다.

푹-.

괴물은 단 한손으로 단검을 쳐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사내의 등을 가볍게 뚫었다. 그리고 사내는 큰 소리를 내며 선혈을 뱉었다.

“아악!”

아버지에게 안겨 있던 소녀는 하얗게 질려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그런데 그때,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악취 나는 입으로 사내의 목을 물어뜯으려던 괴물이 난데없이 몸을 떨며 울부짖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런 뒤 괴물은 사내의 등에서 손을 뽑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심하게 비틀거렸다. 언뜻 봐도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휙-

놀라운 속도로 괴물의 뒤로 달려온 석목은 1장(丈) 가까이 뛰어올라 양손으로 괴물의 머리를 가격했다.

광!

망치처럼 단단한 석목의 두 주먹이 괴물의 머리를 정통으로 타격한 것이었다. 이내 괴물의 머리는 부서지고 녹색 분비물이 미친 듯 흩날렸다.

석목은 뒤로 몇 보 물러나 녹색 피를 피했고, 머리를 잃은 괴물은 잠시 휘청거리다 끝내 쓰러졌다.

석목은 주먹을 꽉 쥐고 서서 호흡을 깊이 들이마셨다. 안색은 살짝 창백해진 상태였다. 잠시 동안 겨룬 것일 뿐이지만, 강시의 무서움은 전에 사냥한 들짐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소녀가 비명을 질러 틈을 만들지 않았다면, 석목도 절대로 이렇게 일격에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아무리 강시가 머리가 약점이라 한들,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처럼 달랑 맨손으로 강시에게 큰 타격을 줄 순 없었을 터였다. 석목이 일격에 강시의 머리를 날려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천근을 들어 올릴 수 있는 힘과 곧 대성을 눈앞에 둔 쇄석권 덕분이었다.

“아버지!”

그때, 소녀의 처절한 목소리가 석목의 귓가를 두드렸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석목은 아버지 가슴 위에 엎드려 필사적으로 피를 막고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새어나왔고, 어떻게 해도 도저히 지혈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도령…….”

얼굴에 핏기가 전혀 없는 사내가 필사적인 여식을 두고 석목을 불렀다.

“아버지 말씀하지 마세요. 제가 꼭 의원을 불러 지혈시킬 겁니다…….”

소녀가 울면서 말했다.

“소용없다. 수야, 이 애비도 의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이 애비는 심맥이 끊겨 곧 죽을게야……. 일생을 누릴 만큼 누려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네가 마음에 걸리는구나…….”

사내가 씁쓸하게 웃곤, 기대하는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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