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8화 (8/916)

8화. 오씨 가문

소녀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더욱 슬퍼했다.

“저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석목은 한숨을 쉬며 다가가 사내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어쩌면 귀찮아 질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이런 상황을 차마 못 본 척할 수도 없었다.

“도……, 도령. 도령과 우리 부녀……, 가 여기 이렇게 만난 것도 어쩌면 큰 인연일 수 있습니다……. 저는 곧 죽겠지만 차마 수아를 이 세상에 홀로 남겨두고 눈을 편히 감을 수가 없군요……. 여식을……, 부탁드립니다…….”

사내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말했다.

“저에게 부탁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따님은 오씨 가문과 곧 혼약을 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오씨 가문까지 안전히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오씨 가문……. 허허……, 허……. 제가 만약 살아 있다면야 가능하겠지만 저는 이제 곧 죽습니다……. 오씨 가문은 결코 이 혼사를 승낙하지 않을 겁니다……. 도령께서 만약……, 만약 딸아이를…….”

“그렇다면 제가 수아 낭자를 친척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겠습니다.”

석목이 사내의 말을 끊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저희 종씨 집안은 몰락해 친……, 친척이 남지 않았습니다. 수아야, 잘 듣거라……. 이제 너와 오씨 가문의 혼사는 끝났다…….

도령, 저는 도령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제 여식을 정실로 맞아달라고 부탁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냥 수아를 첩실로 맞아 앞으로 먹고 사는 걱정만 없게 해주겠다고 대답해주십시오. 허면 저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령께 우리 가문의 가보를 예물로 드리겠습니다. 도령은 무인이시니 분명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허나 만약 저희 딸아이에게 죄송할 짓이라도 한다면 저 종명은 귀신이 되어서라도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사내는 죽기 직전 잠시 정신을 차려 속사포로 말을 내뱉곤 품에서 나무상자를 하나 꺼내 석목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사내는 끝내 숨을 거뒀다.

“아버지!”

안 그래도 처절하게 울고 있던 소녀는 아버지의 시신을 붙잡고 하염없이 대성통곡을 했다. 석목은 그 곁에서 나무상자를 든 채 어찌해야할지 몰라 멍하게 서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 눈을 깜빡이는 속도도 현격히 느려졌다.

“공자님, 저희 아버지께서 임종 직전에 판단력이 잠시 흐려졌던 것 같습니다. 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실 필요 없습니다. 다만 귀찮으시더라도 풍성의 오씨 가문까지만 데려다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소녀는 마침내 울음을 멈추고 빨갛게 부은 눈으로 석목을 올려다보았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이 물건은 돌려드릴게요.”

석목은 숨을 한번 내뱉고 어색하게 말한 뒤, 나무상자를 내밀었다.

“이건 제가 본적도 없는 거예요. 이미 아버지께서 드린 것이니 돌려받지 않겠습니다. 공자님께서 이 괴물을 죽이지 않았다면 저 역시도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을 거예요.”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종 낭자, 날 공자님이라 부를 필요 없습니다. 제 이름은 석목입니다. 밖에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으니, 우선 아버님 시신을 안장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 늦으면 산속 들짐승들이 몰려올 겁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석목은 주저하다 다시 나무상자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러면 수고스럽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석 오라버니께서도 그냥 저를 종수라고 불러주셔요.”

한참 울던 소녀가 이제 좀 기운을 차린 듯, 제 이름을 밝혔다.

* * *

시간은 그 후 1각이 흘렀다.

종수는 사찰 뒤에 위치한 한 산비탈의 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종수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3번을 절하고 석목을 따라 떠났다. 종수는 마음이 형언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냥 제 기분은 애써 모른 체 넘겼다.

석목과 종수는 다시 사찰에 도착했다. 그 자리 그대로 남아있는 괴물의 시체는 이미 빠른 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했고, 계속 흘러나오는 녹색 분비물로 인해 온 대전에 불쾌한 냄새가 가득 찼다.

종수는 그 모습에 조금도 가까이 갈 엄두를 못 냈다. 하지만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며 행동을 시작했다.

“이 괴이한 것을 이대로 두고 떠날 수는 없으니, 잠시만 기다리면 금방 처리하겠습니다.”

종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석목은 즉시 대전을 나서 매우 두껍고 큰 잎을 가져와 괴물의 시체 옆에 두었다. 그 잎으로 빠르게 괴물에 시체를 싼 석목은 가볍게 양손으로 들어 올려 밖으로 나갔다.

그때, 갑자기 나뭇잎에서 어떤 물건이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응?”

석목이 바로 바닥에 떨어진 그 물건으로 눈길을 옮겼다.

이는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한 검은 철판이었는데, 무늬는 왠지 문자인 듯 했으나 전혀 알아볼 수는 없는 상태였다.

“종 낭자, 이 물건을 아나요?”

석목은 철판을 주워 몇 번 뒤집어 보다가 종수에게 물었다.

“아니요, 처음 보는 물건입니다. 아마 강시가 갖고 있던 물건인 듯해요. 강시는 본래 사람이 죽어 변한 것이니 물건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 이상할 일은 아니니까요.”

종수가 코를 찌르는 냄새를 참고서 다가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망설이더니 철판을 제 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나뭇잎으로 감싼 강시의 시체를 들고 대문을 나섰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 석목과 종수는 성으로 가는 산길로 향했다.

석목은 길을 걸으며 종수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바로 비명을 질러 강시에게 고통을 주었던 일에 관해서였다. 허나 뜻밖에 종수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고, 그에 석목도 더는 묻지 않았다.

곧이어 둘은 풍성에 도착했다. 하지만 하늘은 이미 매우 어둑해진 상태였고, 성문도 굳게 잠겨있었다. 자연스레 둘은 석목의 사유지로 향했다.

* * *

저녁 무렵, 석목은 침상에서 철판을 감상하고 있었다.

언뜻 봐선 평범한 흑철로 만든 것 같이 보였으나 매우 무겁고 차가웠다. 반면 새겨진 무늬가 아주 아름다워, 자세히 보면 볼수록 수수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물건이었다.

출처는 몰라도 보통 물건은 아닌 게 확실했다. 석목은 잠시 더 관찰해보았지만 결국 아무 소득도 얻을 수 없어 다시 품속에 챙겨 넣었다. 그리곤 이내 종수의 부친이 남긴 나무상자를 열어 보았다.

짧은 대화만으로도 종씨 가문은 아주 뿌리 깊은 가문 같았고, 그런 가문의 가보라 했으니 이 또한 분명 상당한 가치가 있는 물건일 듯했다.

상자를 여니 안에는 두껍고 누런 서적이 들어있었다. 표지엔 빨간 글씨로 ‘종공밀전(钟工秘典)’이란 글자가 적힌 이 서적은 총 300여 쪽이었다. 글씨는 아주 작았고 사이사이엔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석목은 그렇게 앞의 몇 쪽을 보다가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각 후, 서적을 빠르게 일독한 석목은 큰 숨을 내쉰 뒤 충격에 잠겼다.

‘종공밀전’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져있었다. 전반부엔 수많은 병기의 제조 방법이 적혀 있었고, 후반부엔 작은 기구와 기관, 그리고 100가지가 넘는 독약 제조법이 기술돼 있었다. 적혀 있는 내용 모두가 하나같이 기이하고 상상을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흑석독심검(黑石毒心剑)’이란 무기는 겉으로 보기에 일반적인 흑철로 만든 장검으로 보였지만, 실제론 검신의 내부에 대량의 독액을 주입하도록 설계된 무기였다. 이것으로 적과 칼을 맞대고 싸우면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깨지고 상대방은 중독돼 끝내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궁노(躬弩)’라는 작은 쇠뇌는 더욱 악독했다. 이것은 특제 쇠뇌를 등에 미리 장착해두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면서 소매 끈을 잡아당기면 등에서 화살 3개가 발사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독약의 경우를 말하자면 사람을 즉시 기절시키는 약이나 며칠간 사람의 체내에 잠복해 있는 독약도 있고, 그 외에도 정말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종씨 가문은 대체 뭐하는 곳이지? 어찌 이런 물건이 있는 거야? 서적의 상태를 봤을 때 대부분 종가의 선조들이 남긴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은 석목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 물건은 견문을 크게 넓혀주는구나. 익숙해질 때까지 읽는다면 추후 같은 수단을 사용하는 적을 만나면 단단히 방어할 수 있겠어.’

이 밖에 몇 가지가 더 적혀 있었는데 그 역시도 석목의 흥미를 끄는 내용이었다. 석목은 빠르게 책을 넘겨 읽다, 크고 작은 무기 그림 2개를 찾았다.

그림은 위, 아래로 나란히 정렬돼 있었는데, 위의 큰 무기는 살짝 구부러진 도검으로 칼자루가 상당히 길어 양손으로 잡아야하는 모양이었다. 또한 칼자루에 달린 고리엔 검은 실이 연결돼 숨겨져 있기도 했다. 그리고 아래 작은 무기는 예리한 단도 같아보였지만 그 크기가 아주 작았다.

석목은 그림과 주석을 집중해서 보곤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 * *

다음날 아침, 석목은 푸른 옷을 입고 종수와 함께 풍성 길을 걸어갔다. 종수의 눈은 여전히 살짝 충혈 돼있었다.

길 한쪽엔 3,000평 정도의 대저택이 있어, 매우 눈에 띄었다. 석목은 바로 그 저택 금색 문패에 크게 적힌 ‘오’자를 보고, 대문을 몇 번 두들겼다.

“대체 뉘신데 이른 아침부터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시오! 누굴 찾아왔소?”

대문이 열리고, 하인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나와 귀찮은 얼굴로 외쳤다.

“이분은 종수 낭자요. 낭자가 왔다고 가서 보고하시오.”

석목은 종수에게 받은 옥패를 건네며 말했다.

“…….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사내는 옥패를 받아 들고 다시 대문을 닫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의 문이 다시 열리고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앞 사람은 흰 얼굴에 긴 수염을 가진 사내였고, 뒷사람은 석목의 또래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사내와 상당히 닮은 외모의 소년은 온 얼굴에 거만한 표정이 가득했다.

“네가 왔구나. 너무 잘됐다. 서신을 받고 이 아저씨는 몇날 며칠을 기다렸단다. 응? 한데 네 아버지는 어디 있는 게냐? 이 사람은…….”

흰 얼굴의 사내는 종수를 보고 만면에 웃음을 짓다, 석목을 발견하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분은 석목 공자님이십니다. 아버지께선 이곳으로 오는 길에 괴물의 공격을 받으셔서……, 여기 오기까지 석 공자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종수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때, 맞은편의 소년은 종수의 이마에 있는 푸른 반점을 보고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살해당했다니 그게 어찌된 일이란 말이냐? 음……. 이곳은 대화를 나누기 그리 좋은 장소가 아니구나. 들어가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자.”

흰 얼굴의 사내가 크게 놀라며 말했다.

종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흰 얼굴의 사내는 석목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소매에서 은자를 하나 꺼내 주었다.

“아, 여기까지 모시고 오느라 수고했네. 여기 은자를 사례로 주마.”

“필요 없습니다. 수아 낭자가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으로 됐습니다.”

석목은 은자를 보고 단번에 고개를 젓고 떠났다.

“흥! 아버지, 저런 놈은 제가 잘 압니다. 겉으로는 돈이 필요 없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단단히 한 몫 챙길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겁니다!”

옆의 소년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석 오라버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에 종수가 작은 소리로 반박했다.

흰 얼굴의 사내는 말없이 웃곤 두 아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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