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패싸움
한편, 석목은 아직 풍성을 떠나지 않고 ‘유풍무관’이란 곳에 들어섰다.
대문을 통과하니 바로 푸른 돌이 깔려있는 연무장이 나왔다. 현재는 10여명의 청년과 소년들이 모여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석목아 왔어?”
두 청년이 석목을 반겨주었다. 한 사람은 20대 초반, 다른 한 명은 16살 정도 되어보이는 소년이었다.
“풍 형님, 고 형님, 여기 있었군요.”
석목은 둘과 악수를 나눴다.
“이번에 무관에서 쉬체지술 훈련에 좋은 약을 싼값에 구했다기에 살 수 있나 와봤어. 석 아우는 이미 쉬체지술을 대성해 이런 약은 필요 없을 텐데.”
개중 나이가 더 많은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참 고상해 보이는 인상의 청년이었다.
“사부님께서 네가 곧 쉬체지술 10성을 돌파할 것이라고 하던데 사실이냐?”
그보다 더 나이가 어려보이는 소년이 말했다. 눈썹에 깊은 검상이 있는 이 소년은 석목의 실력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둘은 석목이 무관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로, 나이가 많은 청년의 이름은 풍리, 어린 소년의 이름은 고원이었다.
“네, 곧 10성을 달성할거 같아요. 오늘 무관에 들린 건 약 때문이 아니라 수련을 하던 중 문제를 겪어 가르침을 받으러 온 겁니다.”
석목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석 아우는 나이도 어려 기를 느낄 가능성이 매우 높겠어. 여 사부님 말마따나 천재라고 해도 손색이 없구나. 참, 시간 있을 때 너희 주루에서 한 번 모이자꾸나.”
풍리는 탄식을 하며 말했고, 곁의 고원도 부러워하는 표정을 했다.
“좋아요. 그때 같이 한 잔 마시도록 해요.”
석목은 두 사람과 몇 마디를 더 하고 작별을 고했다.
풍리는 석목의 어깨를 한번 툭툭 치고 지나치며 눈짓을 했고, 그에 석목은 살짝 표정이 변했으나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떠났다.
* * *
잠시 후, 석목은 연무장의 뒤에 위치한 정원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정원의 중앙엔 나무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여창해가 있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무언가 생각하던 그는 석목이 오자 웃으며 일어났다.
“왔느냐.”
“사부님, 이번에도 사형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까요?”
석문이 공손히 인사한 후에 물었다.
“아니, 넌 지금 쉬체지술 11성을 앞두고 있는 중요한 시기니 내가 직접 하는 게 옳다. 참, 곧 11성이란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진 않았겠지?”
여창해가 급하게 물었다.
“예, 여 사부님. 마음 놓으십시오. 사부님께서 시킨 대로 하고 있습니다. 무관의 다른 사람들은 제가 쉬체지술 9성의 경지에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석목이 웃으며 답했다,
“아주 좋다! 네가 반 년 뒤 사대무관 비무 시합에 나간다면 모두를 놀라게 할 수 있을 게다. 허면 우리 풍류무관 영향력은 더욱더 강해지겠지.”
여창해는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사부님, 제가 비무대회에 참여하면 정말 산수도(撒手刀)를 전수해 주실 겁니까?”
“산수도는 내가 풍치도법을 20년 넘게 훈련해 가까스로 고안해낸 도법이다. 난 이 도법이 명문세가의 무예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원래는 비장의 한수로 남겨두려 했지만……. 네가 우리 무관에 큰 이득을 가져다준다면 전수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여창해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도 대회에서 무관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석목도 웃으며 대답했다.
“네게 철련지법이 적합해, 쉬체지술도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고는 하나 결코 이번 비무대회를 얕봐서는 안 된다. 이번 대회의 출전 자격이 18세 이하 수련자로 제한돼있지만 그럼에도 많은 강자들이 출전할 것이다. 그들 중엔 쉬체지술 10성 경지에 오른 사람이 수두룩하지. 물론 네가 대회전에 11성 경지에 오르기만 한다면 큰 문제없이 승리할 수 있을 게다.”
여창해가 진지하게 말했다.
“네, 바로 수련을 시작하시지요.”
석목은 빠르게 대답했다.
“그래, 나도 네가 최대한 빨리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마.”
여창해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석목은 여창해를 따라 정원 뒤에 위치한 큰 방으로 들어가 겉옷을 벗었다.
이내 석목이 허리부분에서 요대처럼 생긴 모래주머니를 풀자 퍽, 하는 큰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석목은 여태 이 모래주머니를 잠자고 씻을 때를 제외하곤 몸에서 떼놓은 적이 없었다. 지난 번 사찰에서 강시와 싸웠을 때는 너무 갑작스러웠던 까닭에 미처 모래주머니를 풀지 못했었는데, 만약 풀고 있었더라면 반응 속도는 한층 더 빨랐을 것이 분명했다.
“안에 들어 있는 철가루가 약간 적어 보이는구나. 내일부터 무게를 20근 올리도록 하겠다.”
여창해는 근처 나무 거치대에서 짧고 두꺼운 나무방망이를 꺼냈다. 양쪽이 두꺼운 가죽으로 쌓여있는 나무방망이였다.
석목은 대답 후, 반듯하게 마보자세를 취했다. 그리곤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두 주먹을 쥐며 숨을 참았다.
여창해는 이리저리 오가며 석목의 상반신에 위치한 혈 자리를 몽둥이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2각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석목은 다시 옷을 입고 방에서 나왔다. 하지만 석목은 들어올 때의 그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는 온데간데없이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며 정원을 떠나야했다.
방에 남은 여창해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괴물이 틀림없어. 후천무인인 내가 거의 탈진할 수준이라니. 그래, 애초에 고작 반 년 만에 철련지법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단단한 신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이번 무관 비무 대회는 정말 기대해 볼만 하겠는걸. 허나 아무리 철련지법을 수련했다곤 해도 쉬체지술을 고작 반년 새 거의 2단계나 높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얘긴가? 실로 불가사의하군. 설마 정말 혈맥무인이란 말인가?”
여창해는 넋 나간 두 눈으로 혼자 조용히 중얼거렸다.
석목은 며칠마다 한 번씩 무관에 가 철련지법을 수련하곤 했다.
사부 여창해는 수련하지 않는 날은 꼭 집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으나 석목은 놀라운 회복능력 덕분에, 무관을 가지 않는 날에도 무거운 갑옷을 입고 교외에서 무예를 수련하거나 들짐승을 사냥해왔다. 그 때문에 석목은 결국 최단 시간 내에 무서운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 * *
무관을 떠난 석목은 어느 작은 저택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석목의 사유지가 너무 외진 곳에 있어, 석목이 철련지법을 수련하는 동안 지내기 위해 임시로 구한 처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의 한 방에서 짙은 약초의 향기와 함께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보였다.
“좋구나!”
석목은 벌거벗은 채로 큰 나무욕조 안에 누워있었다. 욕조 안엔 뜨거운 물이 가득 차 있었고 수면에는 약초들이 떠 있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석목의 상반신엔 군데군데 파랗게 멍이 들어있었지만 그에 반해 석목의 표정은 매우 편안해 보였다. 심지어 금세 코를 고는 곤한 소리와 함께 깊은 잠에 빠져들 정도였다.
얼마 후, 석목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이미 창밖은 어둑해지고 욕조 속 약수도 차갑게 식은 후였다.
석목은 몸을 일으켜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보기만 해도 몸서리가 절로 처지던 검푸른 멍은 이미 다 흐려져 잘 보이지도 않았다.
이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회복력을 가진 그가 효력이 뛰어난 유풍무관의 특제 약욕을 하니 상처도 순식간에 치유된 것이었다. 이 같은 빠른 회복력이 없었다면 지난 반년 간의 비인간적인 훈련도 절대 견딜 수 없을 터였다.
며칠에 한 번씩 미친 듯이 몽둥이질을 당하고 밤마다 무거운 갑옷을 착용한 채 산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질주하는 것, 이는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반년동안 고된 훈련을 하는 사이, 석목은 키도 급격히 자라 이제 다소 앳된 얼굴만 가리고 보면 말투나 신체가 거의 성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내 석목은 나무욕조 옆의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낸 후, 옷을 입고 모래주머니를 다시 착용한 뒤 방을 나섰다.
반 시진 후, 석목은 성의 북쪽에 위치한 어느 허름한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풍리와 고원이 탁상 앞에 앉아 석목을 기다리고 있었다.
“석 아우, 드디어 왔구나.”
고원과 풍리는 석목을 보자마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반겨주었다.
“풍 형님께서 제게 눈짓을 보냈던 것은 분명 또 이 아우에게 일거리를 주려는 것이었겠지요?”
석목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응, 이번에도 아우가 직접 나서줘야 할 것 같아. 상대는 황전(黄田) 근방의 난수방(乱水帮)이야. 성 북쪽 천왕(天王) 사찰 근처에 있는 거리 5개의 소유권을 두고 오늘 저녁 여기서 겨루기로 약조했어. 허나 소식에 따르면 난수방에서도 상당한 고수가 가세한다고 하니, 석 아우도 조심해야해.”
풍리가 자세히 설명했다.
“고수요? 후천무인은 없겠지요?”
석목이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걱정 말아. 우리 흑호회(黑狐会)나 난수방 같은 풍성의 작은 방파가 어떻게 후천무인을 모실 수 있겠어? 고수라고 해봐야 무관의 수련생들 중에 강한 정도지. 석 아우가 종종 나서서 도와준 덕에 우리의 세력이 많이 커지긴 했지만 그렇게 까진 하지 않을 거야.”
고원이 입을 실룩이며 말했다.
“맞아. 애초에 후천무인은 우리 같이 작은 방파의 싸움에 관심을 두지 않지. 난수방이 정말 후천무인을 끌어들인다 하더라도 의뢰비를 줄 수 있는 돈이 없어. 후천무인을 한 명 끌어들이기 위해선 난수방 전원의 재산을 탈탈 털어내야 할 거야.”
풍리도 웃으며 말했다.
“후천무인만 없다면 문제없습니다. 대가는 평소와 같이 은자 300냥으로 하지요. 물론 제 신분이 알려져서도 안 됩니다.”
석목은 그제야 안심하며 말했다.
“좋아. 그럼 그렇게 정해진 거다? 네 물건도 이미 준비해 놨으니 잠시 후 같이 출발하자.”
풍리는 두 말 없이 받아들이고 작은 배낭을 건넸다.
배낭 안에는 검은색 장갑과 의복, 은색 가면이 들어있었다. 석목은 곧 아주 능숙하게 이 모두를 착용했다.
“석 아우의 변장을 볼 때마다 둘째 형님이 아직 살아있는 것만 같아…….”
고원은 석목의 분장을 보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 그 일에도 석 아우의 은혜를 입었지. 둘째 형님이 돌아가신 후에 석 아우가 둘째 형님을 대신해 흉권(凶拳)으로 변장하지 않았더라면, 해서 누차 강적을 쓰러뜨리지 않았다면, 흑호회가 어찌 이 반년사이에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겠나? 어쩌면 가지고 있던 세력도 지키지 못했을 수도 있어. 우리 둘을 제외하곤 흑호회 제일 고수가 이미 죽고 바뀌었단 걸 아무도 몰라.”
풍리도 안타까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는 그저 보수를 받고 일할 뿐이에요. 형님들이 일거리를 주는 덕에 저도 계속 약욕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게다가 흑호회는 근처 몇몇 방파들과 비교해 매우 양심적인 편이라, 흑호회가 몰락하면 일반인들에게 있어서도 불운한 일일 겁니다.”
가면 속에 흐르는 낮은 음성은 평소 석목의 목소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렇지.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었지! 그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서 출발하자.”
풍리가 웃으며 말했다.
세 사람은 곧 방을 떠나 어두운 길가로 빠르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