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당해낼 수 없는 용맹함
풍성의 어느 외지고 낡은 거리에 확연히 다른 의복을 입은 두 무리가 한창 결투를 벌이는 것이 보였다.
그중 흑의를 입은 무리는 40명 정도 돼 보였는데, 석목, 풍리, 고원은 팔짱을 낀 채 그저 뒤에서 이 결투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다른 한 무리는 사람이 좀 더 많았다. 청의를 입은 이들이 바로 이 근방에서 유명한 난수방의 일원이었다. 그들 뒤에도 5명이 가만히 서서, 결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 수가 비교적 적은 흑호회가 확연히 밀리기 시작했다. 상대 무리에게 맞아 다치거나 피를 흘리며 전투에서 빠지는 사람이 꽤 많이 속출했다.
“석 아우, 우리가 나서자.”
그 광경을 보던 풍리가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없이 몸을 날렸다.
펑펑-! 엄청난 소리와 함께 청의를 입은 사람들 중 2명이 쓰러졌다,
“흉권이다!”
은색 가면을 쓴 자가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공포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청의 무리 중 덩치가 꽤 큰 2명이 은색 가면을 한 석목의 뒤로 나타나 동시에 몽둥이를 휘둘렀다.
이내 석목은 순식간에 몸을 돌려 주먹을 뻗었다. 두 몽둥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러졌고, 석목은 살짝 몸이 흔들릴 정도의 타격이 있었으나 눈 깜짝할 사이 좀 더 가까이 있던 사람에게로 가 주먹을 휘둘렀다.
두 사람에겐 미처 피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쾅!
석목의 주먹에 정통으로 맞은 그 자는 2장(丈) 가까이나 날아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그리고 석목은 땅을 박차고 다른 사내를 향해 화살처럼 솟아올랐다. 곧게 뻗은 석목의 다리는 나머지 사내를 번개처럼 날려버렸다. 마치 모두의 눈앞에 살아있는 사나운 바람의 형상이 그대로 나타난 것만 같았다.
* * *
석목이 단숨에 8명 가까이를 쓰러뜨리자, 난수방 사람들은 일제히 공포에 떨며 양옆으로 갈라졌다. 석목은 마치 양의 무리에 들어선 포식자 같았다.
풍리와 고원도 양손에 철 몽둥이를 들고 무리에 뛰어들어, 미친 듯 방망이를 휘둘러 대여섯 명을 쓰러뜨렸다.
난수방 무리 뒤에서 관망하던 이들은 믿을 수 없는 전개에 매우 당황했다.
“흉권!”
그때, 한 사내가 고함을 지르며 두 사람과 함께 석목을 향해 돌진해왔다. 남은 두 사람도 각각 풍리와 고원과 맞붙으며 격렬한 전투가 시작됐다.
풍리와 고원이 철 몽둥이를 휘두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둘의 초식은 매우 흡사해 누가 보더라도 같은 무예를 사용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들과 맞서는 두 사람은 납작하고 특이하게 생긴 무기를 사용했다. 그중 한 사람의 초식은 묵직했고, 다른 한 명의 초식은 경쾌하면서 변화무쌍했다. 이들의 실력 역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석목을 향해선 무려 세 사람이나 달려들었다. 이들 모두가 앞서 평범했던 청의의 방파원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자들이었다.
석목은 즉시 발로 땅을 차 날아올랐다. 바닥에 있던 나무 몽둥이도 순식간에 튀어 올라 석목의 손아귀로 정확히 들어갔다.
가장 먼저 석목에게 달려든 이는 선두에 있던 한 중년 사내였다.
그는 양손에 날카로워 보이는 대나무목검을 쥔 채, 마치 석목의 가슴을 가위질하듯 교차해 휘둘렀다. 무기는 철기가 아니었지만 매우 날카로워 제대로 가격당하면 가슴과 배가 다 갈릴 것만 같았다.
석목은 날아오는 검을 보고 두 눈을 번쩍이며 손목을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쥐고 있던 몽둥이가 순간 흐릿해지더니 금세 6개로 나뉘어져 중년 사내를 향해 빛을 내며 날아갔다.
“아!”
중년 사내는 크게 놀라 뻗었던 팔을 빠르게 회수해 공격을 막았다.
펑펑!
큰 소리가 2번을 연속해 울렸다. 사내는 손바닥에 전해진 충격에 고통스러워 할 새도 없이 들고 있던 무기가 한순간 네 토막으로 갈라지는 걸 바라보아야 했다. 그런 뒤 사내는 그제야 가슴에 퍼지는 극렬한 통증에 쓰러질 듯 비틀비틀 뒷걸음질 쳤다.
그때, 그 광경을 본 나머지 두 사람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들고 있던 죽창을 황급히 내질렀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채찍을 휘둘렀다,
석목은 낮은 고함을 치며 팔을 강하게 휘둘렀다. 곧 나무 몽둥이는 표창처럼 매섭게 뻗어나갔다.
쾅!
나무 몽둥이는 창끝에 강하게 부딪혔고, 창을 든 사내는 미처 초식을 변환하지도 못한 채 정통으로 공격당했다. 사내가 막 손이 뜨겁다고 느끼던 찰나,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창대로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창의 절반이 다 폭발해버렸다.
사내는 두 손이 피 범벅이 된 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석목이 찰나 힘이 빠졌을 무렵, 남은 사내로부터 채찍이 날아들었다.
퍽! 허나 석목은 이내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날아온 채찍을 강하게 잡아챘고, 채찍을 든 사내는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서둘러 채찍을 양손으로 잡고 뒤로 힘껏 당기는 사내를 보며 석목은 살짝 콧방귀를 뀌었다.
곧 석목이 채찍을 잡은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자 채찍을 든 사내는 심하게 비틀거리며 석목 쪽으로 사정없이 끌려갔다.
채찍을 든 사내는 깜짝 놀라 늦게나마 손을 놓으려 했지만 때는 이미 다 늦어버린 뒤였다.
훅-
석목은 몇 걸음 더 나아가 주먹을 휘둘렀고, 채찍을 든 사내는 복부에 그 묵직한 주먹을 맞고 무릎을 꿇었다. 사내는 내장이 다 뒤집힐 것 같은 고통에 눈앞이 다 깜깜해졌다.
하지만 석목은 멈출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보다 높이 뛰어올라 사내를 향해 발을 뻗었다. 채찍을 든 사내의 얼굴이 핏기 없이 창백해졌다.
사내는 석목의 발을 피하려 필사적으로 일어나 보려했으나, 이미 커다란 타격을 입은 몸은 좀처럼 제 말을 듣지 않았다.
“그만! 우리가 졌소!”
바로 그때, 한 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은 잠시 멈춰서 채찍을 든 사내의 머리 위쪽으로 광풍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사내는 극심한 공포에 질려 거의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석목은 땅에 사뿐히 착지해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난수방의 우두머리인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우두머리는 채찍을 든 사내의 안위가 괜찮은 것을 확인한 뒤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며 석목을 향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역시나 명불허전이군요! 귀하의 솜씨는 풍성 전체 수련자 중에서도 손꼽힐 수준인 듯한데, 어찌 우리 같은 하수들의 싸움에 개입하시는 것이오?”
석목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싸움을 멈춘 풍리가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즉시 다섯 거리를 내놓고 모두 물러나라.”
“우리 난수방이 흉권의 적수가 되지 않으니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가자!”
난수방의 우두머리는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담담하게 대답한 후, 모두를 데리고 우르르 퇴각했다.
눈 깜짝할 사이 근방엔 흑호회 무리만이 남게 됐다. 이내 흑의를 입은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기뻐 어찌할 줄을 몰랐다.
풍리와 고원도 의기양양해하며 새롭게 얻어낸 지역에 관한 일들을 지시했으나, 흉권으로 변장한 석목은 쥐도 새도 모르게 모두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 * *
며칠 후, 석목은 수십 근의 무게를 더한 새로운 갑옷을 입고 성외의 사유지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온 석목이 무언가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바로 광장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가 서 있었던 까닭이었다. 석목은 그 소녀를 보고 아예 넋이 나가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도련님, 종 낭자께서 이틀 전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도련님께 연락할 방도가 없어 그동안 낭자를 이곳에서 지내게 했었습니다.”
장쇄가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사유지 책임자인 장쇄는 석목이 어리지만 수완이 매우 대단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장쇄는 자신이 임의로 종수를 머무르게 한 것이 행여 고용주 석목의 심기를 건드리진 않았을지 걱정이 됐다.
“괜찮습니다. 나가 있으세요. 종수 낭자와 단 둘이 이야기 하겠습니다.”
석목은 정신을 차리고 장쇄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종수는 줄곧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윽고 장쇄가 떠난 뒤, 석목은 종수를 제 방으로 안내했다.
“종 낭자, 무슨 일로 여기 다시 왔습니까? 내게 할 말이 있습니까?”
방으로 들어온 석목이 뒤돌아 종수에게 물었다.
“석 공자님, 아무것도 묻지 말아주십시오. 사유지에 하인이 부족하니 공자님께서 거절하지 않으신다면, 이곳에서 막일을 하는 시녀가 되고 싶습니다.”
종수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입술을 꼭 문채 말했다.
“시녀라니요? 장난치지 마십시오. 오씨 가문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이 낭자를 아주 친절하게 맞이하던 것을 봤습니다. 모든 걸 정확히 말해주지 않으면 제가 매우 곤란해요.”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최대한 천천히 말했다.
“저처럼 추한 노비가 오씨 가문에서 무슨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분들이 처음 절 반갑게 맞이한 것은 제가 아직 종씨 가문의 재산을 일부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종씨 가문이 완전히 몰락했다는 것을 알자마자 곧바로 혼사를 부정했습니다. 제가 먼저 스스로 떠나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에게 쫓겨났겠지요. 풍성에 아는 사람이 없어 낯짝 두껍게도 여기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종수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종수는 이제 막 겨우 열 몇 살이 된 소녀였다. 한데 벌써 아버지를 여읜데다, 시댁이라 믿었던 사람들에게까지 쫓겨나버렸다. 연이은 불행은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참혹해, 종수는 더 이상 평정을 유지할 수도 없었다.
“아, 그리 된 것이군요. 낭자의 부친께서 예측하신 대로네요…….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해요. 시녀가 되겠단 생각은 그만하고, 그냥 여기서 기꺼이 지내도록 하십시오. 나는 부자도, 귀족 출신도 아니나 사람 한 명 부양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공자님이라 부를 필요도 없으니 그냥 오라버니라 부르세요. 그리고 언제든 떠나고 싶다면 미리 언질만 주면 됩니다.”
석목은 애써 눈물을 참으려는 소녀의 표정에, 가슴 깊은 곳의 무언가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종수는 석목의 결정에 두 눈을 크게 뜨고 감격의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내 석목은 장쇄를 불러 종수에게 깨끗한 독방을 내주라고 지시했다.
* * *
같은 시각, 오씨 가문의 저택에서는 흰 피부의 사내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종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둘째야, 종명 그 자식이 여식에게 그 일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은 게 확실하냐? 만약 사실이 아니면 우리 오씨 가문에 큰 손실일 것이야.”
흰 피부의 사내와 매우 닮았지만 기세가 더 강한 노인이 엄숙하게 물었다.
그는 바로 오씨 가문의 주인이자 오씨 가문 3형제 중 장남인 오량이었다. 오량은 오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선천무인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는 후천무인이기도 했다.
“형님, 설마 아직도 그 물건을 믿지 못하는 겁니까? 그것이 그 아이에게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는 건, 그 아이가 애초에 혈맥을 각성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 보잘 것도 없는 빈털터리 계집아이를 어찌 감히 우리 오씨 가문 며느리로 맞이한단 말입니까? 종씨 가문이 아무리 그 물건을 넘겨줬다 하더라도 우리 오씨 가문이 그들을 수차례나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진즉에 멸족했을 사람들입니다. 허니 파혼한다 한들 또 어떻습니까?”
흰 피부의 사내, 오풍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맞습니다. 큰 백부님. 저도 그 못생긴 계집아이와 혼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금씨 가문의 금옥진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거만한 소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용히 해라, 화야.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오풍이 굳어진 낯빛으로 아들 오화를 꾸짖었다.
오화는 심기가 언짢았음에도 하는 수 없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화야, 이는 네가 좋고, 좋지 않고 할 일이 아니다. 그 아이가 설사 혈맥을 각성하지 않았다 해도, 그 아이를 며느리로 맞이하면 우리 오씨 가문의 후대에도 혈맥무인이 나올 가능성이 생긴다. 이것만으로도 그 아이가 마음대로 떠나게 둬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량이 차분하게 말했다.
“화야가 싫다면 우리 오순이가 그 아이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그 아이를 보낼 필요가 없겠지요.”
그때, 오풍보다 약간 젊은, 비단옷차림의 셋째 오동이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