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왕천호
석목은 곧 서서히 대장간을 떠났다. 그런 뒤 성 내 다른 잡화점으로 가 물건을 산 뒤 성에 있는 거처로 돌아왔다.
석목은 방에 들어와 눈으로 창가를 한 번 훑더니 일순간 표정이 변했다. 그러다 반쯤 열린 창문 아래를 만지작거렸고, 그곳에 작게 말려있는 종이를 발견했다. 석목은 종이를 펼쳐 빠르게 읽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누군가 또 나에게 은자를 선물하려나 보구나.”
석목은 그 종이를 접어 품에 넣고 침상에 누워 쿨쿨 잠들었다.
하늘이 어두워질 무렵, 석목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그런 뒤 침상 아래에서 배낭을 챙겨 다시 거처를 떠났다.
* * *
한 시진 후, 풍성에 유명한 천왕사찰의 정원에 쓰러진 인영들이 보였다. 바로 흑호회의 방파원들이었다.
모두가 고통에 찬 신음을 하고 있었고, 사방엔 곤봉과 도검들이 떨어져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다시 일어날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풍리와 고원의 입가에도 피가 낭자했다. 온몸 역시도 발자국으로 형편이 없었다.
흑호회의 두 우두머리는 앞에 서 있는 창을 쥔 소년을 보며, 말 못할 놀라움을 느꼈다. 이들도 이 소년이 천재라는 소문을 익히 들어 다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강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쉬체지술을 대성한 두 사람과 여기 쓰러져있는 10명 가까이나 되는 건장한 수하들이 협공을 했음에도 상대방의 공격을 잠깐도 버티지 못했다.
“왕천호, 우리가 도전장을 받은 것이 방금 전인데 이렇게 즉시 쳐들어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고원은 몸에 극렬한 통증을 참고서 간신히 크게 소리를 질렀다.
“흥! 이 쓸모없는 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그저 너희 방파의 흉권을 조금 일찍 보러왔을 뿐이다. 무슨 불만이라도 있느냐!”
백의의 소년은 무표정하게 대답하며 고원의 머리를 짓밟았다. 이내 고원의 머리는 순식간에 진흙 속으로 절반 가까이나 파묻혔다.
고원은 놀랍고도 너무 두려워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조금도 힘을 쓸 수가 없어 크게 욕만 했다.
백의의 소년은 다시 더 힘을 줬고, 고원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더 이상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풍리는 분노해 벌떡 일어나려했다. 그 순간, 갑자기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물건이 백의의 소년을 향해 날아왔다.
소년은 눈꼬리를 올리며 손에 쥔 창을 몸 쪽으로 당겼다.
쾅!
검은 그림자가 창대와 부딪혀 폭발하자 무수한 파편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날아 온 물건의 정체는 바로 그릇 크기의 돌멩이였다.
백의의 소년은 뒤로 1보 물러났다. 그리고 돌조각은 소년의 머리 쪽으로 날아와 뺨을 스치며 얼굴에 얕은 생채기를 냈다.
“흉권.”
백의의 소년은 얼굴의 상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은색 가면을 쓴 석목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네가 나에게 도전한 사람이냐?”
석목이 주변을 훑어보며 백의의 소년에게 물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백의의 소년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누군지 알아야할 필요가 있나?”
석목은 상대방이 손에 쥔 창을 보고 한발로 바닥에 있는 철도를 들어 올려 손에 쥐었다,
“둘째야, 조심해라. 왕천호는 풍성제일의 수련자라고 불리는 혈맥 왕가(血脉王家)의 제자다.”
풍리가 크게 외쳤다.
“풍성제일의 수련자! 왕씨 가문!”
“허허, 가장 강한 수련자는 내가 스스로 붙인 칭호가 아니지. 허나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내가 전부 쓰러뜨렸다. 혈맥 왕가에 대해선……. 왕씨 가문 자제는 맞지만 아직 혈맥을 각성해 혈맥무인이 되지는 못했다.”
백의의 소년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토록 명성이 자자한 분이 어찌 이 조그마한 방파를 찾아와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까?”
석목은 진심으로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
“하하, 강자에게 도전하는 것에 이유가 있더냐? 네가 왔으니 이 지루한 버러지들과는 그만 놀아야겠구나. 나의 창을 받은 후 다시 말해라!”
왕천호는 크게 웃은 후 빠르게 앞으로 돌진해, 석목을 향해 창을 찔렀다.
눈앞이 번쩍인다 싶은 순간, 석목의 가슴 앞에 반짝이는 창끝 5개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석목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손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쥐고 있던 칼이 춤을 추며 5개의 검영으로 갈라져 날아갔다.
훅훅-
창끝과 검영이 서로 부딪히며 흩어져 사라지자, 검광이 번뜩이며 6번째 창끝이 나타났다. 마치 시퍼런 독사가 석목을 찌르는 듯했다.
공격의 속도와 각도가 까다로워 석목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칼로 막아보려 했으나 이미 늦어, 도를 던지고 뒤로 물러나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이윽고 큰 소리가 울리며, 왕천호가 깜짝 놀랄 만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검은 장갑을 낀 석목이 빠르게 날아온 매서운 창끝을 두 손으로 꼼짝 않고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천호는 곧 코웃음을 쳤다. 석목이 스스로의 힘을 믿고 창을 잡은 건 아주 큰 실수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왕천호는 석목의 다음 수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석목의 손에 잡힌 창을 비틀어 사정없이 뒤로 잡아 당겼다.
정철로 제작한 창대는 극렬하게 흔들렸지만 석목의 손에 잡힌 창끝은 꼼짝도 하질 않았다. 그리고 왕천호는 순간 손바닥에 불이 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왕천호는 깜짝 놀라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지나치게 힘을 써서 오히려 자신의 손바닥이 마찰로 찢어지게 된 것이었다.
바로 그때, 석목은 한 손으로는 창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왕천호의 창대를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뚝!
1장(丈) 정도 되는 철창의 중간이 크게 구부러졌다, 그 거대한 충격은 창대를 통해 왕천호의 팔에도 고스란히 전해져, 왕천호는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제길!”
왕천호는 흉권의 힘이 강하다는 것까진 알았지만 손으로 철을 구부릴 정도일 줄은 몰라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곧이어 왕천호는 한 발로 바닥을 차 뒤로 빠지며 반으로 접힌 창대를 놓았다. 아주 황망한 얼굴이었다.
쾅!
창대 손잡이 부분은 거대한 힘의 여파로 땅을 강하게 내리찍으며, 무려 세숫대야만 한 크기의 흙구덩이를 만들곤 위로 튕겨 솟아올랐다.
자세를 바로 잡은 왕천호는 그 광경을 보고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펑!
석목은 이미 활처럼 구부러진 창을 바닥에 던지며, 큰 걸음으로 왕천호를 향해 나아갔다.
“그만하지! 넌 내 생각보다 막강하구나. 난 무기도 없다. 너를 만나니 온몸의 모든 요화창법을 한계까지 구사한다 해도 필승을 자신할 수가 없다. 허나 석 달 후엔 이야기가 다르겠지.”
왕천호가 돌연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네가 싸우자면 싸우고 멈추자면 멈추는 것이냐? 세상에 어디 그렇게 편한 일이 있더냐!”
석목은 낮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한 후, 두 주먹을 가차 없이 휘둘렀다.
“돈을 주겠다!”
“무슨 소리지?”
석목은 그 말에 거의 넘어질 뻔했다.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돈을 주겠다. 지금 내게 금이 든 주머니가 있어. 너희 모두의 의료비로 사용하고도 남을 거야. 허나 난 네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다. 지금은 그저 너와 겨뤄 압승할 수 없을 것임을 알기에 그렇다는 걸 명심해라. 만약 너와 전력으로 붙는다면 풍성제일의 수련자라는 내 명성에 손상이 가기 때문에 오늘은 자리를 피하는 것뿐이다.”
왕천호는 고개를 치켜들고 당당히 말한 뒤 손바닥 크기의 가방을 던졌다.
석목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렇게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난생 처음 만나봤기 때문이었다.
이내 왕천호는 몸을 돌려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2장(丈) 정도의 담벼락을 훌쩍 넘었을 때, 별안간 크게 소리를 질렀다.
“흉권, 기억해라! 나 왕천호가 머지않아 너를 쓰러뜨릴 것이다!”
그 후, 담벼락 너머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 *
풍리가 급하게 고원을 일으키는 사이, 석목은 바닥에 떨어진 주머니를 주워 열어보았다. 곧 석목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둘째야. 제때 와줘서 정말 고맙구나. 하마터면 조직의 모든 형제가 왕천호에게 욕을 보일 뻔했어.”
풍리는 이를 악물며 석목을 향해 씁쓸하게 웃었다.
“맞습니다. 부두목님! 제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천하의 왕천호가 부두목님의 두 초식도 버티지 못하고 용서를 비는군요.”
“맞습니다. 풍성 제일의 수련자라는 칭호는 이제 부두목님께 적합합니다.”
흑호회의 방파원들이 온몸의 상처는 신경 쓰지 않고, 저마다 일어나 석목을 칭찬했다. 상기된 얼굴만 보면 마치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듯했다.
이들 모두가 자신이 속한 방파의 부두목이 풍성 제일의 수련자인 왕천호를 격퇴시키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앞으로 후천 무인이 나서지 않는다면, 이제 이 흑호회는 많은 조직들 사이에서 승승장구 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 나는 일이 있으니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
석목은 주머니를 챙겨 품속에 넣고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했다.
“기다려라, 둘째야. 나와 셋째가 너한테 할 말이 있다.”
풍리는 떠나려는 석목을 급하게 불러 세웠다.
“좋습니다. 그럼 잠시 더 머무르지요.”
석목은 갸우뚱하며 잠시 생각한 후 답했다.
“너희들은 전부 나가서 상처를 치료해라.”
풍리가 조직원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세 우두머리가 무슨 대화를 하려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일제히 대답하고 나갔다.
이들이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만 봐도 석목이 왕천호를 격퇴시킨 장면은 모두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고, 곧 다른 조직에도 이 사실이 빠르게 알려지리라는 걸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은 치사했습니다. 상대방의 실력이 이렇게 강한데 미리 가르쳐주지도 않다니요. 제가 알게 된다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까?”
석목이 모두가 떠나길 기다린 후에 물었다.
“석 아우, 나쁘게 생각하지마라. 이번엔 확실히 우리가 잘못했어. 석 아우에게는 더 크게 보상하도록 하겠네.”
풍리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우리를 책망하지마라. 이번에 상세하게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도 금강무관의 제자가 온다는 것만 알았을 뿐, 왕천호가 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너무 급작스레 온 탓에 사람을 보내 조사할 시간도 없었어.”
고원도 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참작할만한 여지가 있군요. 상황을 몰랐다면 두 분과 계속 일을 해야 할지 고민했을 겁니다. 좋습니다. 저한테 할 말이 무엇인가요?”
석목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이해해줘서 고맙구나! 석 아우, 흑호회의 진정한 두목이 될 생각은 없나?”
풍리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진지하게 물었다.
“제가 진정한 흉권이 돼, 흑호회의 부두목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겁니까?”
석목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냥 담담하게 되물었다.
“부두목이 아니야, 두목이지! 석 아우만 동의한다면 내 즉시 조직원들을 모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우두머리 자리를 넘기겠네. 나와 셋째도 전력으로 도울 것이야.”
풍리가 즉시 대답했다.
“풍 두목님, 이건 우리가 말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까?”
고원은 풍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셋째야, 아직도 모르겠느냐? 흑호회는 너와 내가 없더라도 여전히 흑호회지만, 석 아우가 없다면 한 달도 되지 않아 풍성에서 버틸 재간이 없게 될 것이다. 너와 나의 능력은 부족한데 흑호회의 세력은 몇 달 만에 4배가량이나 늘어났다. 우리 둘은 이렇게 큰 집단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
풍리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고원은 말문이 턱, 막혀 여전히 불만스러운 마음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함께하는 것이 매우 즐겁긴 하지만 방파에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풍 형님은 제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아시지 않나요? 강한 무인이 되기 위한 길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느 것에도 시간을 소비할 수 없습니다.”
석목은 잠시 침묵한 후 주저 없이 거절했다.
“석 아우, 다시 한 번만 고려해다오. 내 비록 아우 꿈이 원대함을 알지만 무인의 길은 그처럼 쉬운 길이 아니다. 네가 대답만 한다면 즉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두목이 될 수 있어.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는가?”
풍리는 크게 실망했지만 계속 포기하지 않고 권했다.
“다른 할 말이 없다면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우리의 협력은 제가 기를 느낄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입니다. 다른 일이 없다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석목은 고개를 젓고 미련도 없이 떠났다.
풍리는 입을 달싹였지만 결국 더 이상 말을 하진 못했고, 이는 고원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석목은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입고 있던 옷과 가면을 배낭에 넣고, 바로 유풍무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철련지법의 수련을 위해 다시 여창해에게 곤죽이 되도록 맞곤 온몸이 푸르죽죽해진 채 이를 악물고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