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금사서
석목이 어느 웅장하고 화려한 주루의 앞을 지나갈 때였다.
그 주루 3층에선 석목을 발견한 두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옥환아, 저 사람이 너의 그 호적상 오라버니야? 어째 꼴이 말이 아니네. 혹시 무관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노란 옷을 입은 한 아리따운 용모의 소녀가 말했다.
“명의상 오라버니가 뭐니.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야. 당연히 나한테도 친 오라버니지. 그냥 어머니가 다를 뿐이야.”
노란 옷을 입은 소녀의 앞에, 비단옷을 입은 소녀가 답했다. 이 소녀는 바로 석목이 딱 한 번 만났던 이복동생 석옥환이었다. 석옥환은 소녀가 하는 말에 아래로 지나가는 석목의 몸을 보고 언짢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래, 네 말이 틀린 건 아니지. 하지만 네 어머님과 너를 제외하고는 금씨 가문 그 누구도 저 사람을 인정하지 않아. 게다가 꼴을 보니 아무래도 크게 성장하지 못할 것 같으니 우리 금씨 가문이 내주는 기령단만 아깝게 됐어.”
노란 옷을 입은 소녀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흥! 금옥진 네가 무슨 좋은 마음으로 여기까지 와서 밥을 사나 했더니 다섯째 백부님을 대변하기 위해서였구나?”
석옥환이 노란 옷의 소녀, 금옥진의 말에 차갑게 웃으며 답했다.
“옥환아, 틀렸어. 내게 부탁한 것은 다섯째 백부님이 아니라 금전이야. 네가 석목을 설득해 기령단을 포기하게 하면, 네 어머님과의 관계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 하더라고. 저기 있는 네 오라버니에게도 큰돈을 주겠다고 했어.”
금옥진이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를 만난 건 고작 한 번뿐이지만, 오라버니는 결코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어. 어머니도 과거 일 때문에 오라버니 모자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 절대로 금씨 가문 사람들이 오라버니를 괴롭히게 두지 않을 테니 금전에게 가서 포기하라고 전해!”
석옥환이 말했다.
“알겠어. 나도 그저 돈 받고 하는 일이야. 네 말은 금전에게 전해줄게.”
금옥진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금전이 이번 만남을 위해 큰돈을 지출했겠구나.”
석옥환은 탁자의 요리를 보고 실룩거리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집안에서 내가 너랑 가장 친하잖아. 맞다! 이번에 내가 새로 산 옥비녀 어때?”
금옥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는 소매에서 정교한 옥비녀를 꺼냈다.
석옥환은 옥비녀를 보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장신구를 잘 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줄곧 타고난 미모만을 자랑했었잖아.”
“이상할건 또 뭐 있어. 날 봐주는 사람이 있으면 꾸미기도 하는거지.”
금옥진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널 봐주는 사람? 너 설마 오화 그놈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석옥환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오화 그 귀찮은 놈이 말이나 되니? 내가 말하는 것은 금강무관의 왕천호야. 혈맥 왕가의 적계 제자!”
금옥진이 말했다.
“왕천호? 쉬체지술 10성의 경지에 오르고 후천무예인 요화창법을 익힌 풍성 제일의 수련자라는 사람? 그 사람도 금씨 가문에 손님으로 오니?”
석옥환이 그 말을 듣고 놀라 눈을 반짝였다.
“왕천호는 내가 먼저 좋아한 사람이야. 뺏어갈 생각하지 마.”
금옥진이 석옥환을 한번 쳐다보고 자신 없이 말했다.
“무슨 생각하니? 난 요화창법이 정말 소문대로 강력한지 보고 싶을 뿐이야. 게다가 풍성 제일의 수련자란 호칭도 우리와 같은 큰 가문 제자들이 나서서 도전하지 않으니 얻을 수 있던 거지, 어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니?”
석옥환이 금옥진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 얄미운 것! 그래, 됐다. 뭐라고 말하던 왕천호는 매우 출중한 사람이야. 거기다 혈맥 왕가 제자라는 신분으로 가문의 어르신도 직접 나서서 초빙했지. 아마 정말 혼담을 나눌 계획인가 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절대로 뺏을 생각하지 마? 그나저나 정말로 친 오라버니를 돕기로 결정한 거야? 금전이 쉽게 포기하지 않을 텐데.”
금옥진이 웃으며 말했다.
“석목이 자질이 떨어진다해도 내 친 오라버니야. 정정당당한 방법을 사용하면 괜찮겠지만 만약 더러운 수를 쓴다면, 개원무원 비무 전날에 두 다리를 다 끊어놓을 것이라 전해.”
석옥환의 작은 얼굴이 얼음같이 차가워졌다.
* * *
석목은 제 모습에 누이동생이 크게 실망한 것도 모른 채, 거처로 돌아와 뜨거운 물로 한창 약욕을 하던 중이었다.
뜨거운 수건을 얼굴위에 올리고, 나무 대야에 기대 눈을 감은 석목은 그 상태로 오래된 계획을 다시금 자세히 떠올려 보았다.
“금사서(金丝鼠)…….”
석목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3일 후, 이른 아침이었다.
석목은 그의 절반만한 크기의 큰 배낭을 메고, 평소 사냥하러 자주 가던 큰 산맥으로 향했다.
7~8개의 산을 넘고 넘어 푸른 대나무 숲 부근에 도착한 석목은 무려 300평이 넘는 이 대나무 숲을 약 반 시진 동안 맴돌았다. 그러다 결국 어떤 흔적을 발견한 석목은 배낭을 가볍게 내려놓은 뒤 철삽을 꺼냈다.
이내 석목은 그 철삽으로 바닥을 파 함정을 만들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큰 소리가 날까 만전을 기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구덩이를 팠다.
그렇게 천천히 약 1장(丈) 깊이를 파냈을 무렵, 해는 이미 중천에 떴다.
석목은 배낭에서 정체불명의 액체와 가루가 든 병을 꺼내, 구덩이에 쏟아 부었다. 그런 뒤 가는 나뭇가지로 이 거대한 구멍을 덮고, 그 위에 대나무 숲에서 가져온 대나무 잎을 깐 뒤 마지막으로 그 위에 흙을 뿌리자 아주 정교한 함정이 만들어졌다.
석목은 제 작품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석목은 이 함정을 만드는 방법과 안에 뿌린 것들에 관한 지식 모두를 종공밀전에서 습득했다. 석목의 도법이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오른 것은 맞지만, 이 계획은 종공밀전의 도움이 없었다면 성공할 확률은 매우 낮았었다.
석목은 이어 태양의 위치를 보고 시간을 가늠한 후, 품에서 황금빛 반죽이 들어있는 종이봉지를 꺼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액체를 그 위에 뿌리자, 순식간에 이 반죽에선 고기냄새가 퍼져 나왔다.
“사냥꾼에게 배운 이 미끼 제작법이 효과가 있길 바라야겠군, 실패한다면 아까운 재료비 은자 30냥만 날리게 될 거야.”
석목은 혼잣말을 하고 들고 있던 황금빛 반죽을 함정 가운데 떨어뜨렸다.
그 후, 석목은 배낭에서 청록색 피풍을 꺼내 덮고, 검은색 목검을 꺼내 쥔 뒤 배낭은 바위 뒤에 숨겼다. 그리곤 함정 근처에서 미동도 없이 엎드렸다.
멀리서 봤을 때는 함정 근처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매우 자연스러웠다.
석목은 숨까지 참고,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던 콧김을 없앴다. 눈빛도 흔들림이 없었고, 줄곧 대나무 숲 쪽만 응시하며 사력을 다해 노려보았다.
금사서는 천주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동물로 심약서(寻药鼠)라고도 불렸다. 흔한 산쥐의 변종으로, 태어나자마자 같은 어미 배에서 나온 형제를 물어 죽이는 짐승이었다.
석 달이 지나면 등에선 금색 털이 자라고, 일부 약초를 스스로 찾아서 먹고, 1년이 지나면 온몸이 금색 털로 덮인 성체가 되어 진귀한 약초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깨우치게 된다.
때문에 금사서는 사람에게 길들여지면 실력이 뛰어난 약초꾼 못지않은 위력이라 몸값이 어마어마해 은자 수만 냥을 지불해도 구하기 힘들었다.
석목은 우연히 여우를 쫓아 대나무 숲까지 갔다가 그곳에 금사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우 놀랍고 기뻤지만 소년은 경거망동 하지 않았다.
금사서는 영물은 아니지만 천성이 소심하고 신중한데다, 한 번 질주하기 시작하면 그 속도가 번개처럼 빨랐다. 하여 일격에 명중하지 못하면 뛰어난 경공을 구사하는 고수가 아닌 이상 포획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극히 낮았다.
한 번 뿐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석목은 산에서 수련을 할 때마다 금사서의 생활습관을 관찰했었다.
그러다 한 호흡에 7번의 참격을 날릴 수 있게 되고, 종공밀전에서 함정과 비약의 제작법을 익히게 되자 석목은 비로소 손을 쓰기로 결심했다.
* * *
석목이 함정을 설치해 금사서를 포획할 준비를 하고 있을 그때, 풍성의 금강무관에선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왕천호에게 퉁명스레 말하고 있었다.
“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금씨 가문에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는지 보라고 보냈더니 금씨 가문 직계자제를 상처 입혀?”
“허 숙부님, 어찌 꾸짖으십니까. 비무는 그들이 먼저 저에게 요청했고, 저는 단지 손을 제때 멈추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그 금씨 가문 자제들 말입니다. 석옥환은 그나마 좀 괜찮았지만 나머지는 전부 한 초식도 받아내지 못하는 버러지들뿐이었습니다. 제 반나절 시간만 아깝게 버렸습니다.”
왕천호는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이놈! 금씨 가문과 우리 왕씨 가문이 맹우란 걸 모르는 것이냐! 가서 신부감을 보라 했지 내가 싸우고 오라했더냐? 네놈 때문에 내가 직접 금씨 가문으로 찾아가 사죄를 해야 하지 않느냐! 오늘부터 너는 이곳에서 머물러라. 요화창법의 혼천식(混天式)을 터득하지 못하면, 이 무관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갈 줄 알아라!”
허씨 성의 노인이 왕천호를 매섭게 쳐다보며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반년 후의 4대 무관 비무 대회를 대비하려면 힘을 기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왕천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흥!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걸 보니, 대회 결과가 썩 좋지는 않겠구나.”
“그 말씀은……, 설마 다른 무관에 실력 좋은 수련자가 나타난 겁니까?”
그 말에, 왕천호가 돌연 급하게 추궁해왔다.
“정말 무술 밖에 모르는 놈이구나! 내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아마 밤에 잠도 못 이루겠지.”
허 숙부는 그 모습을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헤헤. 허 숙부님께선 저를 잘 아시는군요.”
왕천호가 아부하듯 말했다.
“듣기로는 매년 하위권이던 비홍무관(飞鸿武馆)에서 판세를 뒤집기 위해 타 지역에서 천재를 데리고 왔다고 하는구나. 혈맥무인은 아니지만 타고난 후토지체(厚土之体)라고 한다.”
“후토지체? 강한 방어력으로 유명한 체질 말입니까?”
왕천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허, 후토지체의 무서움을 알면 됐다. 지금 네 요화창법의 경지로는 그의 방어를 뚫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없다.”
허숙부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저는 후토지체의 방어를 파괴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풍성의 수련자 중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자를 압니다. 만약 그도 이번 대회에 참여한다면 매우 근사할 것입니다.”
왕천호는 잠시 침묵하더니 웃기 시작했다.
“얼마 전 언급했던 흉권을 말하는 것이냐?”
허 숙부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예, 맞습니다. 그의 공격을 직접 받아 보았는데, 그 힘이 족히 천근 이상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맨손으로 철을 구부릴 순 없었겠지요.”
왕천호가 즉시 대답했다.
“음, 흉권의 힘이 네 말처럼 강하다면 후토지체를 상대해 낼 수 있겠지. 하지만 비무대회에는 18세 이하의 수련자만 참여가 가능하니 한 방파의 우두머리인 그는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맞습니다. 만약 흉권이 저와 같은 또래였다면 쉽게 후퇴하지 않고 어떻게든 싸워서 이겼을 겁니다. 풍성제일의 수련자라는 호칭을 지키기 위해서요.”
왕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만하게 말했다.
허 숙부는 그 말을 듣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조카는 다 좋은데 딱 하나, 자기과시가 너무 심한 것이 단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