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후토지체
“석목? 열다섯 나이에 쉬체지술 10성의 경지에 근접한 제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바로 이 친구였군.”
곡충은 성인과 다를 바 없는 석목의 큰 신체를 보고 매우 놀라워했다.
열여덟, 열아홉 나이에 쉬체지술 대성의 경지까지 오르는 경우는 그리 많진 않아도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열다섯의 나이에 쉬체지술 10성의 경지에 오르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풍성 전체를 통틀어 열다섯 살 이하의 아이들 중, 쉬체지술 10성의 경지에 올랐다고 알려진 수련자는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들은 기를 느낄 확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높을 뿐 아니라, 후천무인이 된 후에도 다른 이들에 비해 잠재력이 훨씬 컸다.
곡충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석목을 향해 인사했다.
“하하, 아직 이토록 어린데 쉬체지술 10성에 오르다니, 이번 대회에서 분명 빛이 날겁니다.”
“덕담 감사합니다.”
석목도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쉬체지술 10성의 경지에 올랐다고?”
곡충과 석목의 대화를 듣고, 마치 원숭이 같이 생긴 까맣고 마른 철련이 매우 의외란 얼굴로 물어왔다. 아직 변성기에 있는 듯, 철련의 목소리는 꽤 날카로워서 듣긴 썩 좋지 않았다.
“맞습니다.”
석목은 대충 대답했다.
“흥, 난 고향에서 쉬체지술 11성의 경지에 오른 수련자와도 겨루어 이긴 적이 있다. 그는 결국 내 후토지체를 깨지 못하고 지쳐 쓰러졌었지.”
철련은 석목을 하찮다는 듯이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정말 상대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비무 상대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석목은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상대가 누가 됐던 간에 아무도 나의 후토지체를 깰 수 없을 것이다.”
철련은 거만하게 말하고 뒤돌아 떠났다. 하지만 철련은 손준의 존재를 알고서도 끝까지 아예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저 자식은 항성 저렇게 잘난 척을 합니까?”
무시당한 손준은 화가 나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크게 분통을 터뜨렸다.
“아아. 그게…….”
곡충은 줄곧 분위기를 잘 파악해 능숙히 중재해왔지만, 이번엔 차마 우물쭈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곡 형, 굳이 저놈을 위해 좋은 말을 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 우리 비홍무관 사람들도 철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무관의 사부님 몇 분이 그를 보물처럼 귀하게 여기니 우리 선배들도 어찌할 수가 없을 뿐입니다. 허나 잘난 체는 심해도 그의 후토지체는 확실히 명불허전이니, 아마 저나 이 형은 절대로 그를 이길 수 없을 겁니다.”
통통한 청년이 차갑게 웃으며 얘기했다.
“후토지체라는게 그리 대단한가? 곡 형, 곡 형은 발수검법(泼水剑法)에 능하지 않는가? 그 검법은 특히 외문호신공에 강한 효과를 발휘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운풍은 그의 말을 듣고 의아해했다.
“허, 후토지체의 위력은 내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잠시 후 비무 대회에서 체감하게 될 걸세.”
곡충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흥! 후토지체의 호신공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왕천호의 요화창법에 상대가 되겠습니까?”
손준이 잠시의 침묵 후, 차갑게 웃으며 운을 뗐다.
“왕천후라면 단언하기 어렵지. 그는 이제 막 요화창법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저번 비무 대회에선 4대 무관의 모든 수련자를 쓰러뜨렸지 않은가. 1년이 지났으니 실력이 더 놀랍게 발전했겠지. 허나 그의 오만방자함은 더욱 하늘을 찌르고 있어. 듣자하니 금강무관의 선배들도 그의 눈에 거슬리면 바로 손찌검을 당한다고 하더군.”
곡충은 고개를 홱홱, 저었다.
이 말을 듣자 그들은 모두 참지 못하고 왕천호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석목만은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담담히 웃으며 검고 마른 소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고개 숙여 창을 닦고 있던 백의의 소년이 무언가를 느끼고 고개를 들어 이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모두는 깜짝 놀라 어색하게 웃으며 왕천호의 시선을 회피했다.
왕천호는 무표정하게 그들을 한번 훑다가 석목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그러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장창을 메고서 천천히 이들을 향해 걸어왔다.
“왕……, 왕 공자, 아무 탈 없었는지요?”
모두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어쩔 줄 몰라 하다, 곡충이 먼저 눈을 딱 감고 인사를 했다.
“누구지? 우리가 아는 사이던가?”
왕천호는 차가운 눈빛으로 곡충을 보고 무례하게 대답했다.
곡충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모두를 훑어보는 왕천호의 시선을 묵묵히 견딜 뿐이었다.
“네 이름이 뭐냐? 어느 무관에서 왔지?”
왕천호는 모두를 찬찬히 훑다가, 석목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등에 멘 철창을 천천히 꺼내들고 창끝으로 석목을 겨냥하며 물어왔다. 목소리엔 아무런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아, 무슨 일이죠?”
석목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려 왕천호를 쳐다봤다. 석목의 눈빛 역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매우 평온하고 맑았다.
“우리 어디선가 본적이 있던가?”
왕천호는 석목을 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닙니다. 저는 귀하를 처음 뵙습니다.”
석목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본적이 없다? 그런데 어찌 네 체형이 이렇게도 눈에 익을까.”
왕천호는 창으로 석목을 가리키며 살짝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왕 공자님, 설마 어디선가 석목 사제를 만났던 적이 있습니까?”
이운풍은 결국 잔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 역시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이운풍 역시 석목의 내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석목과 왕천호는 교점이 전혀 보였다. 곡충과 손준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이를 매우 궁금해 했다.
“허허, 아무래도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보군. 이름이 석목이라고 했지? 좋아. 잠시 후 연무대에서 한번 겨룰 수 있길 기대하지.”
왕천호는 석목의 평온한 얼굴을 다시 여러 번 훑어보다가 돌연 하하 웃곤 창을 거둬들인 후에 망설임 없이 돌아갔다.
일행은 방금 풍성 제일의 수련자가 한 행동이 대체 무슨 의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석 형제, 왕천호와 아는 사이야?”
이운풍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알지 못합니다. 흠, 따지고 보면 모르는 것은 아니지요.”
석목은 턱을 만지며 매우 모호하게 대답했다.
“모르는 것은 아니라는 게 무슨 말인가?”
이운풍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석목이 신비로워 보였던 까닭이었다.
주변 사람들 역시 의구심이 가득해보였으나 더는 아무것도 캐묻지 못했다.
* * *
“봉 사형, 보셨습니까? 왕천호가 유풍무관과 비홍무관의 제자들이 있는 곳에 가더니 창까지 꺼내들었습니다. 허나 몇 마디만 하고 돌아가던데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요?”
대회가 개최되는 천록무관의 수련자는 대회에 참여하는 3명을 제외하고, 대회에 참여하지 않는 인원도 5명가량 더 있었다.
그 중, 가장 중심에 얼굴에 검흔이 있고, 눈빛이 사나운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천록무관에서 가장 명성이 자자한 수련자인 봉군이었다. 봉군은 잡아 먹을듯한 눈빛으로 왕천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록무관 관주의 조카인 봉군은 어려서부터 천록무관의 무예인 철의체와 유명한 수련자급 무예인 흑살수를 상당한 경지까지 수련한 사람이었다.
그는 개원무관에는 아슬아슬하게 입관하지 못했지만 풍성의 다른 또래 수련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었고, 무관 대회에서도 수차례나 최종 우승을 거머쥐었던 경력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작년의 무관 비무 대회에서 그의 찬란한 아성은 다 깨졌다. 봉군은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왕천호의 창에 순식간에 패배했고, 왕천호의 발에 얼굴을 짓밟혔던 바로 그날, 모든 게 다 변해버리고 말았다.
봉군은 살면서 누군가를 이토록 증오해본 적이 없었다.
그 비무 대회 이후, 봉군은 왕천호에 대한 복수만을 생각하며 몇 달간 무관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훈련에만 전념했다.
그러다 바로 얼마 전, 어떤 사정으로 강한 수련자에게 도전을 했던 그는 상대방의 주먹에 처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한동안 병상에서 지낼 수밖에 없게 됐지만, 오히려 봉군은 그 경험을 통해서 철의체의 경지를 한 단계 더 올릴 수 있었다. 하여 봉군은 이번 비무 대회에서는 기필코 왕천호를 짓밟을 수 있을 것이란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왕천호를 다시 보게 되자,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솟아났다. 그에게 밟혔던 얼굴에도 마치 어제처럼 화끈한 감각이 느껴지는 듯했다. 봉군의 확신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말았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봉군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번 비홍무관과 유풍무관의 참가자 중에서 후토지체의 망나니만 빼면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확실한가?”
“봉 사형, 안심하십시오. 저 두 무관의 실력이 우리 천록무관과 금강무관에 비해 볼품없다는 건 이미 여러 차례 확인했습니다. 사형께서 조심해야할 것은 관주님이 언급했었던 후토지체를 가진 저 녀석뿐입니다.
저 녀석이 대단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곤 하나 산간벽지에서 온 망나니에 불과한데 어디 고명한 무예를 수련했겠습니까. 사형의 철의체는 후토지체에 손색이 없으며 이미 쉬체지술 10성의 경지에 올랐으니, 지쳐도 저 망나니가 먼저 지쳐 쓰러질 것입니다.”
옆에 있던 한 천록무관의 제자가 알랑거리며 말했다.
“그러면 됐다. 왕천호와 전력을 다해 싸울 수 있겠구나!”
봉군은 한쪽 얼굴을 만지며 왕천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허나 이 말을 내뱉자마자 순간 얼마 전 완치된 늑골 아랫부분에 은은한 고통이 느껴졌다.
* * *
약 1각(*一刻: 15분) 후, 연무장 뒤의 밀실이 열렸다. 그리곤 간간히 울리는 큰 웃음소리와 함께 관주들과 낯선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오랜 친구와 몇 년 만에야 조우한 것처럼, 끊임없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좋다. 4대 무관 비무 대회를 시작하겠다!”
천록무관의 관주, 봉영선이 수련자들을 한번 훑어보고 시작을 선포했다.
봉영선의 말에, 석목과 네 무관의 제자들은 정신이 바짝 들어 연무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여창해 관주와 함께 나온 두 사람은, 한 명은 갑옷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찬 군관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머리를 높게 묶어 올린 30대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모두 4대 무관에서 심판을 위해 초청한 후천무인들이었다.
무인은 풍성을 수비하는 군의 교위였고, 여인은 어느 거대한 지하세력의 우두머리였다.
잠시 후, 봉영선은 연무대에 올라 대회 규칙을 선포했다.
“비무의 규칙은 이전과 같다. 시합은 총 3회전으로 진행될 것이다. 매회 마다 모든 무관에서 한 명씩 나와 상대 무관을 지목할 수 있고, 지목당한 무관은 대결에 응해야한다. 패배한 자는 도전권을 잃고 더 이상 비무에 참여할 수 없다. 승리한 자만 도전권을 유지한다. 그렇게 총 3회전이 끝나면 각 무관에 도전권을 가진 수련자가 많은 순으로 순위를 정할 것이다.”
봉영선은 말을 끝내고 즉시 연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곧 군관이 연무대에 올라가 섰다.
아래에 있던 이운풍은 비무의 규칙을 듣고 살짝 불만스럽단 얼굴을 했다.
“이 형, 이 비무 규칙에 대해 이견이 있나요?”
그 모습을 보고 석목이 물었다.
“석 형제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시합방식은 강자를 보유한 무관이 유리해. 저번 비무 대회 때는 왕천호가 금강무관 대표로 출전해 혼자 3회를 전부 쓸어버렸어. 다른 무관에서는 아무도 그를 당해낼 수 없었지.”
이운풍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매우 재미있는 규칙이네요.”
석목은 잠시 생각하더니 규칙을 이해하고 싱글벙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