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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17화 (17/916)

17화. 도전

연무대에 누군가 뛰어 올라가 큰 소리로 외쳤다.

“본인은 천록무관의 오명이오, 유풍무관 사형들의 무예를 맛보고 싶소.”

“운풍, 네가 올라가라. 네가 작년에 이겼던 자니 이번에도 문제없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얼굴이 붉은 사내가 연무대를 응시하며 말했다.

“예, 민 사부님, 저만 믿고 기다리십시오.”

이운풍은 급하게 석목과의 대화를 멈추고 가슴을 펴며 대답했다.

이운풍은 곧 두 손을 허리춤에 꽂았다 뺐다. 이내 두 손엔 푸른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고, 장갑에는 손톱크기의 청동조각이 붙어있어 이운풍이 주먹을 맞부딪치자 쩡, 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이운풍이 연무대로 뛰어올라가자, 먼저 올라가 있던 청년이 포효하며 양손에 번쩍이는 비수를 꺼내 쥐고 달려들었다.

찰나의 순간에 두 사람이 맞붙었다.

이운풍이 몸을 움직이며 팔을 연달아 휘두르자, 주먹은 괴상한 각도로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오명은 두 비수를 재빠르고 정교하게 움직여 빈틈없이 방어했다. 비수는 주먹과 부딪힐 때마다 불똥이 튀었다.

“아, 예감이 좋지 않군. 오명의 파공비(破空匕)가 생각보다 높은 경지에 오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운풍이 꽤나 고생할 것 같군요.”

붉은 얼굴의 사내가 경기를 유심히 보다가 표정을 살짝 굳히며 말했다.

“그렇군. 오명이 지난 1년 사이에 높은 성취를 이뤘구나. 운풍의 만골권이 오히려 밀리고 있어. 승리하기 어려워 보이는군.”

여창해도 동의했다.

그 말을 검증하듯 딱 붙어 싸우던 둘이 돌연 거리를 벌렸다. 오명은 매우 창백해진 얼굴로, 한 손으론 가슴을 누르며 비틀거렸다.

허나 맞은편에 서있는 이운풍의 어깨에는 비수 2자루가 절반 정도나 박혀 있었고, 피가 줄줄 흘렀다. 그는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어 보였다.

“첫 경기는 천록무관의 승리다!”

연무대에 서있던 군관이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오며 선포했다.

이운풍은 매서운 눈빛으로 오명을 쳐다본 후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연무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푹- 푹-

붉은 얼굴의 사내가 손가락으로 이운풍 양쪽 어깨의 혈을 짚고 흔들자 비수 2자루가 저절로 튀어 나왔다. 핏줄기도 순간 높게 치솟았다가 뚝, 하고 멈춰버렸다.

“약을 바르고 면포를 잘 감싸면 5일 안에 나을 수 있을 것이다.”

붉은 얼굴의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운풍은 극심한 고통에 얼굴이 땀투성이가 된 채,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감사를 표했다.

그때. 금강무관 소속의 곤봉을 든 청년이 연무대에 올라가 천록무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천록무관에서는 도를 든 청년이 나와 맞서 싸웠다.

열 몇 합을 겨루던 금강무관의 도전자는 상대방의 공격에 손에 쥔 무기를 놓치게 되자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다.

천록무관은 연달아 2번의 승리를 거두고 한순간에 기세가 등등해졌다. 봉영선도 한 손으로 수염을 만지며 만족스러운 듯 허허허, 웃었다.

두 대결이 끝나자 연무대 아래가 쑥덕쑥덕 소란스러워졌다.

“재미없구나. 내 일찍이 후토지체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나와서 나에게 한 수 보여 주거라.”

그러던 중,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연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그는 장창을 거꾸로 쥔 채, 비홍무관 쪽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온 얼굴에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바로 왕천호였다.

“저 멍청한 자식! 급하게 올라갈 필요가 없다고 그렇게 말했거늘 게다가 처음부터 비홍무관에 도전하다니…….”

금강무관의 무리 쪽에서, 끝내 왕천호가 나가는 것을 붙잡지 못한 한 노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욕을 했다.

비홍무관의 사람들도 그 광경을 보고 매우 소란스러워졌다. 소란 속에 까맣고 마른 철련이 눈을 매섭게 번뜩이며 곧장 연무대로 올라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 앞에 서있던 긴 수염의 노인이 그를 막아서며 고개를 흔들었다,

“련아. 급하게 올라갈 필요 없다. 지금 올라간다면 이기더라도 체력이 많이 소모돼 최후에 승리할 수 없을지 모른다. 곡충아, 네가 올라가 그의 요화창법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아 보거라.”

곡충은 그 말에 답답함을 느꼈으나, 억지로 대답하며 장검을 꺼내 쥐고 연무대로 올라갔다.

“내가 찾는 것은 네가 아니다. 저 녀석을 올려 보내.”

왕천호는 곡충을 보자마자 곧바로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다.

“그와 겨루고 싶다면 우선 소생을 쓰러뜨려 보시지요!”

곡충은 왕천호가 무서웠지만, 그의 무례한 태도를 보니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분노가 절로 튀어나왔다.

이내 곡충은 기합을 지르며 쥐고 있는 장검을 흔들었다. 주변엔 순식간에 광풍이 일어났다. 그가 몇 년간 고되게 훈련한 발수검법이었다.

“화를 자초하는구나.”

왕천호가 낯빛을 굳히고 손에 쥔 장창을 몸 앞으로 휘둘렀다. 일순 장창의 앞부분 절반이 다 흐릿해지더니 결국 보이지 않게 됐다.

훅-

갑자기 창끝에 밥그릇 크기의 맹렬한 불길이 나타났다. 불길은 곧 붉은 빛으로 변해 앞으로 강렬히 쏘아져 나갔다.

쾅! 까맣게 탄 냄새와 함께 곡충은 비명을 지르며 연무대 아래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 붉은 빛은 한 바퀴 빙글 돈 후, 원래의 맹렬한 불길로 돌아왔다. 활활 타는 맹렬한 불길이 창끝 표면을 감싸고 있는 그 모습은 상당히 괴이했다.

“요화지염!”

비홍무관의 수염이 긴 노인이 그 광경을 보고 크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노인은 서둘러 날아올라 떨어지는 곡충을 두 팔로 받아냈다.

수염이 긴 노인은 바닥에 착지한 후에야 품속의 곡충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의 옷은 절반가량이 다 잿더미가 돼 사라졌고, 드러난 피부는 크고 작은 흰색 물집으로 뒤덮여 있어 매우 처참한 모습이었다.

“허 형, 왕천호의 요화창법이 이렇게 높은 경지에 올랐는데……, 어찌 언질 한 번 없었습니까.”

긴 수염의 노인은 시퍼렇게 질린 안색으로, 곡충을 안고 뒤돌아 머리가 희끗한 노인에게 물었다.

“하하. 저를 너무 원망하지 마시지요. 제 조카가 요화지염을 터득했다는 것은 저도 지금 막 알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요화지염은 후천무인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인데, 수련자인 천호가 이런 성취를 이뤘을 것이라고 저 인들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금강무관 관주 역시 놀라워하며, 동시에 기쁨에 젖은 소리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이 일을 꼭 기억할 겁니다.”

긴 수염의 노인은 급히 사람을 시켜 곡충을 병실로 보냈다.

무관의 사부들은 왕천호를 마치 괴물을 보듯이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가 일제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가능해. 어떻게 수련자가 요화지염을 터득하다니……. 대체 어느 수련자가 감히 그 공격을 받아 낼 수 있단 말인가.”

여창해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하하하. 요화지염을 터득했으니 개원무관은 여유롭게 입관 할 수 있겠구나. 대회의 우승자는 정해진듯하니 더 이상의 싸움은 필요 없을 것 같군요! 누구든지 납득이 안 된다면 도전을 하십시오. 만약 천호가 패배한다면 우리 금강무관은 바로 꼴등을 인정하겠소.”

금강무관의 관주는 곧바로 연무대에 뛰어올라가 어안이 벙벙한 군관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다른 세 무관의 관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눈치만 보고 있었다.

“흥! 우승을 원한다면 우선 나에게 허락을 받아야지!”

철련 역시 왕천호의 창을 감싼 화염을 보고 매우 놀랐지만, 머리가 희끗한 노인의 말을 듣고 크게 화가 나 곧장 연무대로 뛰어 올라가려했다.

“련아, 멈춰라. 네 후토지체가 아무리 뛰어나도 요화지염을 받아낼 순 없을 것이다.”

긴 수염의 노인은 다시금 급하게 철련을 막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철련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철련은 포악하고 고집이 센 사람이었지만, 외딴 섬에 있던 자신을 풍성까지 데려온 이 노인의 말만은 충실히 믿고 복종했다.

그때, 천록무관 무리 사이에 있던 봉군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안색도 새하얗게 질려선 어떤 말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석목, 네가 올라오너라. 이곳 사람들 중 오직 너만이 나와 싸울 능력을 가진 것 같구나.”

왕천호는 연무대 아래 사람들을 하찮다는 듯 훑어보다가, 갑자기 석목을 향해 괴이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왕천호가 그 말을 내뱉자마자, 연무대 아래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곧 모두가 놀라 일제히 유풍무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석목이 누구지?”

“들어 본 적 있어. 유풍무관에서 새로 받은 제자인데, 어린 나이에 벌써 쉬체지술 10성의 경지에 올라 후천무인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이라 하더군.”

“이상하군, 왕천호 같은 실력자가 어째서 저런 놈을……?”

“유풍무관에 왕천호의 관심을 끄는 이가 있다니!”

“왕천호가 석목을 알다니!”

여기저기서 놀라 감탄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석목아, 이전에 왕천호를 만난 적이 있느냐?”

여창해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와 한 번 겨룬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 승부를 내지 못했습니다.”

석목은 왕천호의 도전을 생각지도 못해서 놀랐으나, 곧 평온히 대답했다.

“그럼 이해가 가는구나. 과거의 왕천호라면 네가 조금은 맞설 수 있었겠지만 그가 요화지염을 터득한 이상 네겐 승산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싸움엔 꼭 응하지 않아도 된다.”

여창해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제 실력이 어느 정도 늘었는지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석목이 연무대 위 왕천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왕 싸우기로 마음먹은 이상, 최대한 조심하도록 해라. 상대방이 창법에 능하니 가까이 파고들어야 승산이 있음을 기억하고. 절대로 요화지염에 닿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방심했다간 패배하고 말 것이야.”

여창해는 잠시 망설이다, 엄숙하게 말했다.

한편, 손준과 이운풍은 여창해, 석목의 말을 듣고 크게 놀라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고, 붉은 얼굴의 사내도 기이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 * *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바닥을 박차고 연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금강무관의 관주는 왕천호가 석목을 지목한 탓에 어쩔 수 없이 연무대에서 내려왔다.

“네놈이 흉권이지?”

왕천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석목의 눈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흉권이라뇨?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석목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했다.

“흥! 끝까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다니, 실망스럽구나.”

왕천호가 말했다.

“어째서 제가 흉권이라고 확신하는 거죠?”

석목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천천히 뽑아들며 답했다.

“이 몸이 한 번 본 것을 절대 잊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아무리 정체를 숨겼다지만 체형과 눈빛이 그 자와 똑같은데 내가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느냐.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얌전히 내 염화창법을 맛보아라! 모두의 앞에서 널 쓰러뜨리고 내가 풍성 제일의 수련자란 걸 천하에 알릴 것이다!”

왕천호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몇 마디 내뱉고 손에 쥔 창을 휘둘렀다.

곧 창의 앞쪽이 번쩍이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후 휙,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나타난 화염이 석목을 향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빠르게 날아갔다.

석목은 빙글 돌면서 손에 쥔 도를 휘둘러 화염을 향해 검격을 날렸다. 그리고 곧바로 발을 굴러 한 걸음 물러났다.

쾅!

화염이 터지며 작은 불꽃이 사방팔방으로 날렸다. 석목이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곡충과 같은 꼴이 났을 것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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