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쇄석권
연무대는 이제 주변을 감싼 불꽃 탓에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달궈졌다.
휙-
불꽃 사이로, 반짝이는 창끝이 뒷걸음질 치는 석목의 목을 뚫을 기세로 날아왔다. 마치 독사와 같은 모습이었다.
석목은 비어있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찔러오는 창을 매섭게 내려쳤다.
펑!
평범해 보이는 주먹이 철창을 내리치자, 거대한 힘이 창대를 타고 왕천호에게 전해졌다.
웅- 웅-
왕천호는 강한 공격을 받고 두 걸음 뒤로 밀려나, 다시 창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원래대로라면 끊임없이 이어져야했던 왕천호의 공세는 석목의 주먹질 한 방에 순식간에 막혀버렸다.
석목은 그 기회를 틈 타 번개 같은 속도로 왕천호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깡!
왕천호는 창을 들어 석목이 휘두르는 도를 막아냈지만, 다시금 두 걸음 밀려났다. 그는 이제 연무대의 가장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몰려 있었다.
“마음껏 싸울 수 있는 상대라니! 좋구나!”
왕천호는 화를 내기는커녕 즐거운 듯 하하 웃더니, 도에 짓눌려 있던 창을 한 손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휙-
창의 앞부분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구불대다가 석목의 가슴을 향해 매섭게 날아갔다. 석목은 다시 한 번 힘껏 주먹을 내질러 창끝을 막았다.
왕천호는 그 틈에 물고기처럼 미끄러지듯 움직여 석목의 뒤로 이동했다.
놀란 석목이 재빨리 뒤돌아 왕천호를 마주하며 물었다.
“약어보(跃鱼步)?”
“눈썰미가 제법 좋구나. 맞다! 수련자 급에서는 굉장히 드문 신법이자 평범한 무관에선 구경도 못할 우리 왕씨 가문만의 독문무공이지. 이 보법까지 쓰게 만들다니……. 점점 더 네 놈을 짓밟고 싶어지는구나!”
왕천호는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나를 짓밟으려면 먼저 이 공격을 받아 보시지요!”
석목은 눈을 번득이며 풍치13식을 펼쳤다. 석목이 도를 휘두를 때마다 검영 4개가 쏘아져 나가며 도저히 피할 틈을 주질 않았다.
왕천호는 기합과 함께 손에 든 창을 휘둘렀다. 창은 마치 독사처럼 왕천호 주위를 뱅뱅 맴돌았고, 또 왕천호는 그와 동시에 약어보를 펼쳐 연무대를 이리저리 누비며 날아오는 모든 검격을 받아냈다.
“또 어떤 공격을 할 거지? 모조리 다 펼쳐보아라.”
왕천호는 마구 웃으며 즐거워했다.
석목은 그 말을 듣고 손에 쥔 도를 더욱 빠르게 휘둘렀다. 도를 휘두를 때마다 대여섯 개의 검영이 쏘아져 나가며 끝내는 왕천호를 완전히 뒤덮었다.
왕천호는 날아오는 검영들을 필사적으로 막아냈으나 공격만 겨우 막아낼 뿐, 반격은 전혀 하지도 못했다.
“일식육참!”
연무대 아래, 붉은 얼굴의 사내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여 형, 풍치도법 대성의 경지에 올랐다니요! 석목이 도법에 이렇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데 어째 미리 언질해주지 않은 겁니까? 일찍이 알았다면 무관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 가르쳤을 겁니다.”
“나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겨우 초심자 정도의 수준인 줄 알았는데…….”
여창해도 연무대 위 상황을 보며 눈이 동그래졌다. 다른 무관 사람들도 석목이 펼치는 도법에 매우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쾅!
갑자기 연무대에서 맹렬한 불길이 폭발했다. 작은 불꽃들은 사방으로 날아가 석목이 쏜 검영을 허물었다.
이윽고 불꽃들 사이로 나타난 왕천호가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창의 앞부분은 파르르, 떨림을 보이다가 다시금 번쩍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훅-훅-…….
왕천호 앞에 6개의 붉은 화염이 나타났다.
“하하, 대단하군! 네가 이 공격까지 받아내면 패배를 인정하고 내려가지.”
왕천호는 큰 기합소리와 함께 창대를 쥐어 잡고 석목을 향해 뛰어 들었다.
화염 여섯 개도 공중에서 뱅글 돌다가 석목을 향해 일렬로 날아갔다.
석목은 빠르게 몸을 돌려 손에 쥔 도를 휘둘렀다. 다시 한 번에 7개의 검영이 날아갔다.
모호하게 겹쳐진 검광은 마치 봉우리가 첩첩이 솟은 작은 도산 같았다.
도산은 눈이 부실정도로 반짝였고, 귓가엔 작은 새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듯도 했다.
곧 화염 6개가 연달아 날아와 도산에 꽂혔다.
쾅! 쾅!
여섯 번의 폭발음이 터졌다.
불꽃은 사방팔방으로 흩날리며 연무대를 빼곡히 뒤덮었고, 주변은 순식간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연무대 위쪽으로도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도산이 화염과 닿으며 폭발한 곳엔 동그란 모양의 도흔이 생겨났다. 도흔의 깊이는 3촌, 길이는 3척 정도로 마치 자를 이용해 조각한 듯 반듯했다.
펑!
왕천호는 공중에서 반격을 당한 듯 온몸이 뒤집힌 채로 날아갔다.
바닥에 착지한 후에도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던 왕천호는 뒤로 일곱 걸음을 물러났다. 그가 뒷걸음질 치며 밟고 지나간 자리들 모두가 반 촌 깊이로 파여 있었다.
왕천호의 안색은 핏기도 없이 창백했고, 창대를 잡은 양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반짝거리며 빛나던 창끝은 다 녹아 절반 정도가 사라져 있었다,
연무대 아래에서 바라보던 사람들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도산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린 듯 고요했다.
연무대에 자욱하던 연기가 걷히자, 그 자리에 한 손으로 도를 잡고서 꼿꼿이 서있는 석목의 모습이 나타났다.
석목의 얼굴은 빨갛게 익어 있었고 어깨의 옷과 머리카락은 눌어붙어 있었다. 손에 들린 도에도 크고 작은 금이 빼곡하게 가 있었다.
그러나 석목만은 매우 멀쩡했다.
석목의 도가 만신창이가 된 건 화염 6개와 부딪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석목이 그 압력에 도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연무대 바닥을 베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말 이 공격을 받아낼 줄이야!”
왕천호는 석목의 멀쩡한 모습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근 도법을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지 못했다면 받아내지 못 했을 겁니다.”
석목도 망가져버린 검을 집어던지고 감탄하며 말했다.
“풍치도법을 그 정도 경지까지 수련하다니. 비록 졌지만 억울하지 않구나. 그러나 이런 평범한 창이 아니라 요화지염의 위력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창을 사용했다면 넌 분명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한 것은 지켜야겠지. 네가 내 공격을 받아냈으니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겠다.”
왕천호는 한숨을 쉬고 연무대 아래로 뛰어 내려가 무관 밖으로 나갔다.
“천호야, 기다려라! 그럼 저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금강무관의 관주도 급하게 일어나 작별을 고하고, 금강무관의 다른 사람들을 남겨둔 채 급하게 왕천호를 쫓아갔다.
* * *
연무장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지금껏 일어난 일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당황스러워했다. 석목이 일식칠참의 경지까지 오른 것도 매우 놀라웠지만 석목의 승리는 더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허……, 유풍무관 석목의 승리다! 정말 대단하구나! 네겐 선택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원래의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방금 치룬 비무를 금강무관에 대한 승리로 처리하고 내려갔다가 다음 경기에 참여하는 것이지. 다른 하나는 왕천호처럼 더 이상의 도전자가 없을 때까지 승리를 하는 것이다.”
심판을 맡은 군관은 연무대에 올라와 석목을 놀랍다는 듯이 한번 훑곤, 잔기침을 하며 말했다.
연무대 아래는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무관의 많은 제자들이 석목의 실력에 놀라워하고 있었지만 조금 전 격전으로 석목의 몸 상태가 처음과 같지 않음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었다.
석목은 크게 다치진 않았으나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고 무기도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만약 석목이 계속 도전을 받아들인다면 무대 아래로 내려 갈 수 없으니 새로운 칼을 쓰는 것도 불가능 했다.
“일단 석목을 내려오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휴식을 취하고 무기를 교체한다면 분명 우승할 수 있을 겁니다.”
붉은 얼굴의 사내가 여창해에게 다급히 말했다.
“소용없어. 저 녀석의 고집은 나도 어쩌지 못해. 지금 녀석에게 내려오라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여창해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그가 예상한대로 연무대 위의 석목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좋다. 그럼 비무대회를 재개하겠다.”
군관은 가상하다는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며, 다시 경기 시작을 선포한 뒤 연무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연무대 아래에는 수군거리는 소리만 가득 할뿐, 아무도 선뜻 석목에게 도전하지 못했다. 다들 도전을 한다면 석목을 이길 확률은 높겠지만 비겁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제가 나가서 권법을 한 수 배워 보겠습니다.”
이때, 봉군이 웃으며 연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그는 양손에 철을 주조해 만든 검은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 장갑은 다섯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도록 제작돼 있었다.
“권법을 겨루는 것입니까? 좋습니다. 바로 제가 원하던 바 입니다.”
석목은 그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침 저도 쇄석권을 수련했습니다. 저…….”
“흥! 쓸데없는 말은 이 공격을 받은 후에나 하십시오!”
석목이 콧방귀를 뀌고는 주먹을 날리며 매섭게 돌진했다.
크게 화가 난 봉군도 지체 없이 석목의 맨주먹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캉!
봉군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후퇴했다. 두 주먹이 부딪힌 순간 주위에 큰 바람이 휘몰아쳤고, 봉군의 흑철장갑은 폭죽처럼 터져버렸다.
“쇄석권을 대성했다고? 네가 정말 쇄석권을 대성했단 말이냐!”
봉군은 피칠갑이 된 손으로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 돌연 날카롭게 외쳤다. 마치 괴물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석목은 들은 척도 않고 봉군에게 바짝 다가가 다시 한 번 주먹을 날렸다.
“철의체!”
봉군은 이미 두 손을 크게 다쳐 그 초식을 받아낼 수가 없었다.
봉군은 크게 소리를 질렀고, 머리를 제외한 전신의 피부는 순식간에 검은 철갑처럼 새까맣게 변해버렸다.
쾅!
석목의 주먹이 봉군의 복부를 강하게 가격하자 봉군의 검은 피부는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이윽고 연무대에 아래로 힘없이 떨어진 봉군의 주위론 노란 흙먼지만이 날렸다. 연무대 아래 사람들은 한 순간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봉군은 비틀대며 억지로 일어나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허나 입을 연 순간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해내면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엎어졌다.
“군아! 빨리! 빨리 후원의 병실로 보내라!”
봉영선이 봉군에게 다가와 재빨리 입에 환약을 밀어 넣고 허둥거리며 큰 소리로 분부했다. 천록무관의 제자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봉군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사람들은 석목이 쇄석권을 대성한 것을 보고, 풍치도법 일식칠참을 보았을 때보다 몇 배는 더 놀랐다.
일반적으로 수련자급 무예를 펼칠 수 있는 입문 단계엔 2~3달이면 누구나 진입할 수 있었다. 허나 매우 능숙한 소성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최소 1~2년의 시간이 걸리고, 더욱 강하게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는 대성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그보다 3~4배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거기다 일부 수련하기 까다로운 무예는 10년이 걸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특히 대성 이상의 가장 높은 단계인 대원만(大圆满)의 경지는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은 평생을 훈련해도 이룰 수 없었다.
후천급 무예의 수련 난이도는 수련자급 무예보다 훨씬 높아 각 경지에 오르기 위해 걸리는 시간도 더 길었다. 이것이 바로 진기를 갖고 있는 후천무인이 적과 싸울 때 겨우 소성의 경지에 오른 후천무예를 사용하는 연유였다.
여창해의 경우에는 후천급의 무예를 포기하고 수련자급 무예인 풍치도법과 쇄석권만 10년간 훈련해 대성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4대 무관의 사범 중 실력이 뛰어나기로 손에 꼽히는 인물이 됐다.
그런데 진기가 없는 석목이 쇄석권을 대성했으니, 이는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모두가 석목은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진정한 천재라 생각했다.
그때, 여창해가 갑자기 잔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 여러분들이 조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 석목은 쇄석권을 대성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타고난 힘이 매우 강해 대성한 쇄석권과 비슷한 위력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쇄석권을 대성했다면 두 손이 새하얗게 빛나고 주먹이 목표에 닿을 때마다 은은한 금속음이 들려야 하지요.”
여창해의 말을 잠자코 듣던 붉은 얼굴의 사내도 문득 깨달은 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만약 정말로 10대 어린나이에 쇄석권을 대성한 괴물이 있다면 어찌 이제껏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진즉에 온 천주에 그 이름이 퍼졌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저 아이의 힘을 얕보아선 안 됩니다. 앞으로 계속 쇄석권을 수련한다면 분명 다른 수련자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해질 겁니다. 기만 느낄 수 있게 되면 개원무원에 입관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요. 후천무인 중에서도 강자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높을 겁니다.”
여창해와 붉은 얼굴의 사내의 대화를 들은 다른 무관의 사범들이 소란스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몇몇은 마치 진귀한 물건을 보듯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목이 다시 한 번 승리했으니 원하는 사람은 도전을 할 수 있다. 만약 도전자가 없다면 유풍무관이 이번 비무대회의 우승을 차지한다.”
심판을 맡은 군관이 연무대에 다시 올라와 큰 소리로 외쳤다. 연무대 아래는 일순간 또 다시 조용해졌다.
이때, 비홍무관 철련이 매서운 눈빛으로 나서려 했으나 긴 수염의 노인에게 다시 제지당했다. 어깨를 잡힌 철련은 몸이 마치 태산에 깔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내 노인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철련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올라가도 쇄석권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게다가 한 번의 비무를 위해 전도유망한 이의 미움을 사는 건 본관의 이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지.”
철련은 곧 온 얼굴에 불만이 가득 차올랐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