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순맥사자(寻脉使者)
반나절 후, 유풍무관이 비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풍성 제일의 수련자가 바뀌었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풍성 전체로 퍼졌다.
“오라버니가 풍성 제일의 수련자가 되었다고?”
진 이모의 자택 내에서도 석옥환이 손에 든 쪽지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곁의 진 이모는 조용히 어떤 생각에 잠겨 있었다.
또 금씨 가문 저택에선 한 중년 사내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과 얼굴이 닮은 길쭉한 소년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전아, 네가 몇몇 사촌 형제들과 힘을 합쳐 석목을 공격할 준비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계획은 당장 멈추도록 해라. 네 조부님께서 직접 내린 명령이니 따르기 싫더라도 따라야 한다. 풍성 제일의 수련자라는 칭호는 절대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금전이란 소년은 온 얼굴에 원망이 가득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오씨 가문에서도 오씨 세 형제가 한 곳에 모여 석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풍성의 관청에서도 앞서 연무대에서 심판을 맡았던 군관이 비단옷을 입은 노인에게 매우 정중한 태도로 무언가를 보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금강무관에 위치한 어느 밀실이었다.
“천호야, 솔직히 말하렴. 정말 혈맥을 각성한 것이냐?”
금강무관의 관주가 긴장한 얼굴로 왕천호를 추궁했다.
“숙부님, 이미 몇 번이나 대답해 드렸잖습니까.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저도 제가 진짜 혈맥을 각성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요화창법을 수련하던 중 몸에서 열이 나더니 저도 모르게 요화지염을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왕천호는 머리를 숙인 채 창을 바라보다가 질문에 답했다.
“하하하, 그렇다면 틀림없구나. 네 아버지가 너를 이곳에 보내 요화창법을 수련하게 한 것은 이 창법이 왕씨 가문 폭염혈맥(暴焰血脉)을 자극해 혈맥의 각성을 촉진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금강무관의 관주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그럼 제가 요화지염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선조에게 물려받은 혈맥 덕분이었군요.”
왕천호는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놈아. 네가 혈맥을 각성시켰다는 것 자체가 타고난 자질을 가졌다는 뜻이다. 왕씨 가문이 유명한 혈맥가문이라지만, 그간 수백 명 중에 고작 3~4명만이 혈맥을 각성시킬 수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네 세대에서 네가 첫 번째로 혈맥을 각성했는데 어찌 자질이 뛰어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느냐! 내일부터 내가 직접 요화창법의 후반부를 가르쳐 주겠다. 개원무원 입관 비무 대회에서는 풍성의 어떤 수련자도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금강무관의 관주가 웃으며 말했다.
“숙부님, 그 말씀은 제가 후반부를 배운다면 석목 그 녀석도 이길 수 있을 것이란 말입니까?”
왕천호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하하, 그 녀석은 혈맥무인이 아니니 네가 반드시 이길 것이다.”
금강무관의 관주가 크게 웃으며 답했다.
“그가 비무 대회에서 그렇게 강한 힘을 보여줬는데, 어째서 혈맥무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왕천호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그건…….”
금강무관의 관주가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그 역시 의구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바로 그때, 밀실에 갑작스럽게 제3의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나 역시 그것이 매우 궁금하구나.”
“누구냐!”
금강무관의 관주가 놀란 원숭이마냥 빠르게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림자가 진 밀실의 한 구석에, 회색 옷을 입은 한 땅딸막한 노인이 미묘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천호는 그의 숙부보다 더 크게 놀랐다. 노인이 서있던 곳이 자신이 줄곧 바라보던 쪽이었음에도 노인이 소리를 내기 전까진 전혀 그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익비술(影匿秘术)? 귀하는 어디서 오신 고인이십니까? 이곳에는 어떤 일로 오셨는지요?”
금강무관 관주가 노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너무 놀랄 필요 없소. 본인은 개원무원의 한무요.”
노인이 낮게 웃으며 한 은색 물체를 금강무관 관주에게 던졌다.
금강무관 관주는 날아오는 물체를 받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반짝이는 이 은빛 물건은 삼각형 모양을 한 손바닥 크기의 영패(令牌)였다. 영패의 한 면에는 ‘개원’, 또 한 면에는 ‘무(武)’라는 글자가 각인돼 있었다.
“이건 개원령! 정말 개원무원에서 오셨군요. 무슨 용무로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신 것인지요?”
금강무관 관주는 손에 든 영패를 확인한 후에야 숨을 크게 내뱉으며 긴장을 풀었다.
“귀하께선 후천무인이니 혈맥광조(血脉狂潮) 시대에 대해 들어 봤겠지요?”
한무가 천천히 말하며 한 팔을 들어 올렸다.
휙-!
소매를 걷어 드러난 팔에는 청록색 무늬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내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대더니 갑자기 피부를 뚫고 빠른 속도로 자라나 1촌 길이의 풀이 되었다.
“목화혈맥(木化血脉)! 혈맥광조의 시대라……. 이제 보니 개원무원의 혈맥전(血脉殿)에서 파견된 분이셨군요.”
금강무관 관주는 그 모습을 목격하고 무언가 깨달은 듯 말했지만, 왕천호는 여전히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허허, 조카 분이 어찌 그리 쉽게 혈맥을 각성할 수 있었는지 이해한 것 같으니 제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겠군요. 그리고 이건 오대무원(五大武院) 연합장로회의 전언입니다.
혈맥의 시대가 도래 했다! 모든 무원의 혈맥전을 동시에 개방하고 각 주에 순맥 사자를 파견해 혈맥무인으로 추정되는 수련자를 찾을 것이다. 일단 혈맥무인임이 확인되면 5대 무원의 입관 시험을 면제할 것이며, 다른 일반 수련자들의 몇 배에 달하는 지원을 할 것이다!”
땅딸막한 노인이 갑자기 정색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혈맥전이 개방됐다니! 그렇다면 3대 종문도 문을 열겠군요?”
금강무관 관주가 말했다.
“뭐라고요? 설마 왕천호를 종문에 보낼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왕씨 가문에 혈맥명가란 칭호를 누가 내려줬는지, 또 몇 백년간 누구의 봉록을 받아먹었는지 잊은 것은 아니겠지요?”
한무가 그의 말을 듣고 무섭게 말했다.
“그럴 리가요. 왕씨 가문이 조정의 은총을 받았으니 가문에서 혈맥무인이 나온다면 혈맥전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지요.”
금강무관 관주가 몸을 흠칫 떨더니 금세 웃으며 말했다.
“알면 됐습니다. 그럼 왕천호 군의 폭염혈맥 각성 여부와 순도를 측정하도록 하지요.”
한무가 표정을 풀고 나무그릇을 꺼냈다.
“그전에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3대 종문과 혈맥전 두 곳 중 어느 곳이 혈맥무인으로서의 능력을 더 많이 성장시켜 줄 수 있습니까?”
왕천호가 돌아가는 상황을 어렴풋이 이해하곤 한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3대 종문이 아무리 신비롭고 대단하다지만, 우리 혈맥전만큼 혈맥무인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3대 종문에는 혈맥무인 뿐 아니라 일반 무인과 소문속의 술사도 있으니 투자되는 자원이 분산될 수밖에 없지.
게다가 우리 혈맥전은 혈맥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통해 혈맥의 위력을 증폭시켜주는 여러 특수 무공을 창시했다. 그 무공을 수련한다면 범이 날개를 다는 격이겠지. 혈맥전에 들어온다면 결코 후회할 일이 없을 게다.”
한무가 왕천호에게 상냥한 얼굴로 설명했다.
“그렇다면 무원에 들어가도록 하지요.”
왕천호가 그 말을 듣고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숙부는 입술을 몇 번 달싹였으나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하하, 매우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다! 여기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려 보렴.”
땅딸막한 노인이 하하 웃곤 녹색 나무그릇을 내밀었다. 왕천호는 손가락을 물어뜯어 그릇에 피를 떨어뜨렸다.
이내 피는 반짝이다가 그릇바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어 훅- 소리와 함께 적색 안개가 그릇에서 뿜어져 나와 그릇 위를 한 바퀴 뱅글 돌더니 화염의 형태로 바뀌었다.
“화속성 혈맥에 순도는 중등급……. 정확히 몇 품인지는 혈맥전에 가서 법기(法器)를 통해 측정해야 알 수 있겠군요, 축하합니다. 중등급의 혈맥이라면 무원에서 많은 지원을 할 것 입니다.”
한무는 그릇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더니 기뻐하며 말했다.
한무의 혈맥 능력은 굉장히 기이해 특별해 보였지만, 실제론 하등급 8품 혈맥에 불과했다. 때문에 이런 심부름꾼이나 할 법한 일을 맡은 것이었다. 허나 이런 사람이라도 이제 이 중등급의 혈맥무인을 데리고 가면 무원이 커다란 보상을 해 줄 것이 분명했다.
“중등급이라……. 나쁘지 않군요.”
왕천호는 애써 담담한척 했지만 그의 눈에도 일순간 흥분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대제국에 크게 이름을 떨쳤던 왕씨 가문의 한 조상 역시 중등급 6품의 혈맥무인이었다.
“중등급 혈맥무인인 너를 패배시킨 그는 과연 어떤 혈맥을 가지고 있을지 정말 궁금하구나.”
한무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석목에게도 순맥 사자가 파견됩니까?”
금강무관의 관주가 물었다.
“예, 다른 동료 한 명이 저와 같이 왔습니다. 그는 풍성에 올 계획이 없었으나 석목의 타고난 힘에 대해 듣고 흥미를 느껴 직접 찾아 왔습니다. 많은 혈맥무인이 탄생하는 혈맥광조의 시대에 그토록 놀라운 힘을 가진 자라면 분명 혈맥무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땅딸막한 노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 * *
유풍무관의 후원에선 석목이 두 눈을 휘둥그레하게 뜬 채, 조각난 장작과 바닥에 박힌 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산수도입니까?”
“그렇다. 이 초식은 보기엔 매우 간단하나 내 십 수 년 동안의 깨달음이 모두 담겨있지. 핵심은 초식을 발휘할 순간을 파악하는 것과 섬세한 조작이다. 도를 손에서 떠나보낼 때 한 번에 적을 물리치지 못하면 오히려 맨 손으로 적과 싸워야 하는 불리한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나는 지금껏 이 초식을 3번 사용했고 그 3번 모두 적을 한 번에 두 동강 냈다.”
여창해가 거만하게 말했다.
“이 산수도는 확실히 막아낼 수 있는 자가 없을 것 같군요. 여 사부님에게 요결을 전수받길 원합니다.”
석목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산수도의 위력은 석목이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허허, 이번 비무 대회에서 네가 유풍무관에게 우승을 안겨줬으니 가르쳐 주지 않을 수 없지. 잘 들어라. 산수도의 요결은…….”
여창해가 요결을 설명하는데 족히 반 시진이 걸렸다. 그는 중간에 몇 번씩이나 도를 들어 느린동작으로 재연해가며 산수도의 핵심을 설명했고, 석목이 기초를 숙달한 후에야 설명을 끝냈다.
석목이 이어 훈련을 하는 도중, 한 무관 제자가 헐레벌떡 뛰어와 급하게 얘기했다.
“사부님, 무관에 본인을 순맥 사자라 칭하는 자가 석목을 만나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순맥 사자라고?”
그 말을 들은 여창해의 표정이 순식간에 급변했다.
“사부님, 아는 사람입니까?”
석목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 줄 테니 우선 그를 만나러 가자꾸나. 아무래도 네게 기연이 찾아 온 듯하다.”
여창해는 숨을 크게 뱉으며 말했다.
“기연이라니요?”
석목이 눈을 깜빡이며 의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5대 무원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해줄 말이 없구나. 네가 만약 그의 눈에 든다면 그 즉시 무원의 정식 제자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관의 그 어떤 제자들 보다 더 많은 지원을 받게 될 것이다.”
여창해가 엄숙하게 말했다,
“사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서 가서 그를 만나봐야겠군요.”
석목이 매우 놀라워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