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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20화 (20/916)

20화. 석후폐맥(石猴废脉)

석목과 여창해는 즉시 후원을 떠나 무관 앞의 큰 방으로 이동했다.

석목이 방에 들어가니 안에 이미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 사람은 민 사부였고, 붉은 옷을 입은 다른 한 사람은 죽립(竹笠)을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진 않았다.

“드디어 왔군요. 어서와 인사를 나누시지요.”

민 사부가 석목과 여창해를 보고 반갑게 말했다.

“혈맥전의 사자가 직접 오신 걸 보니, 정말 그 일이 발생했나보군요.”

여창해는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 예를 표한 뒤 말했다.

“역시 보통이 아니군요. 그렇다면 바로 본론을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아이가 혈맥무인인지 확인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만약 혈맥무인이 맞는다고 하면 혈맥전에 데려가 강자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죽립을 쓴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냉혹하게 생긴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시지요. 이 아이에게 찾아온 기연이니 제가 막을 순 없지요. 석목아, 이 분이 말하는 대로 따르면 된다.”

여창해가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석목도 사내를 보며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사내는 소매에서 녹색 나무그릇을 꺼냈다.

“이 안에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려라. 그럼 혈맥무인이 맞는지 바로 확인이 가능하다.”

석목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곤 허리에서 도를 뽑아 손가락을 가볍게 그었다. 곧 1촌 정도의 상처와 함께 큰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핏방울이 나무그릇에 떨어지는 순간 빛이 번쩍이더니 종적을 감췄다.

잠시 후, 나무그릇이 살짝 떨리다가 펑, 소리와 함께 안에서 흰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기는 한 바퀴 빙글 돌더니 나무그릇 위쪽에서 엄지손가락 크기의 작은 원숭이 형상을 그렸다.

몸을 웅크린 채 두 눈을 감은 원숭이의 모습은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넘쳤다. 그 표면에도 하얗게 빛나는 선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이건……. 석후혈맥이군요. 폐맥 중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종류지요. 아무래도 헛걸음을 한 듯합니다. 그럼 이 몸은 다른 일이 있으니 떠나보겠습니다.”

사내가 작은 원숭이와 반짝이는 선을 자세히 보다 낯빛을 흐리며 말했다.

그는 손을 휘둘러 원숭이 모습의 연기를 흩트린 후 나무그릇을 챙겨 넣고는 석목에겐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고 여창해, 민 사부 두 사람에게만 인사하고 떠났다.

이내 여창해와 민 사부의 표정이 굳어졌다.

석목은 그 모습을 보고 무언가 잘못 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참, 개원 무원 입관시험에는 참가하지 않기를 권한다. 석후 폐맥의 몸으로는 절대 입관하지 못할 것이다.”

문 앞에서 사내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가 다시금 고요해졌다.

“석후 폐맥이라니요? 사부님, 그게 무엇입니까? 제가 혈맥을 각성하지 못한 것입니까? 아니면 제가 너무 형편없는 혈맥을 각성한 것인가요?”

석목이 여창해에게 눈빛을 번뜩이며 물었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여창해는 매우 좋지 않은 얼굴을 하고,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제가 말하지요. 석목아. 네가 너무 박복하다고 밖엔 말할 수 없겠구나. 혈맥을 각성한 건 맞지만 이는 각성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

혈맥무인이 일반인에 비해 강하고 수련의 속도도 빠르다는 건 알고 있을게다. 허나 어떤 혈맥을 각성한 경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거나 반대로 수련의 속도가 일반인에 비해 느려지기도 한다. 그 혈맥을 폐맥이라 부른다.

네가 각성한 석호혈맥은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폐맥이다. 이 혈맥은 수련자의 경지에서 몸을 강하게 만들어주고 괴력을 낼 수 있게 돕지만 기를 느낀 후엔 체내 경맥이 혈맥의 힘에 막혀버린다. 하여 진기가 모이는 속도는 정상인에 비해서도 훨씬 더 느려지지.”

민 사부는 한숨을 쉬며 설명하고는 고개를 저으며 큰 걸음으로 떠나갔다.

어느새 방 안엔 석목과 여창해만 남게 됐다.

석목은 민 사부의 말을 듣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여 사부님…….”

“석목아, 내 생각에도 개원무원 시험에는 참가하지 않는 편이 좋겠구나. 시험 전에 폐맥을 각성한 것이 밝혀진 사람은 아무리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더라도 여태 무원에 들어간 사례가 없었다.

무원에서 제자를 받는 것은 후천무인, 더 나아가 선천무인의 고수를 배양하기 위한 것이다. 수련자 경지에서만 강할 뿐 더 이상 성장할 가능성이 낮은 사람을 무원의 입장에선 받아들일 가치가 전혀 없지.”

여창해가 석목이 말을 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매우 실망했다. 무관에서 고수를 배출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설마 네가 폐맥을 각성했을 줄을 상상도 못했구나. 몇 달 만에 쇄석권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해진 것을 보고 진즉에 알아챘어야 했는데…….”

여창해는 저도 모르게 후회하는 마음을 내비쳤다.

“석후폐맥을 각성한 사람은 정말로 고수가 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까?”

석목은 크게 낙담한 마음을 억누르며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심법을 수련하기 시작하고 진기가 모이는 속도가 다른 사람보다 절반 혹은 그 이하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정말로 절망하게 될 것이다. 네 사부였던 사람으로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충고하마.

무공을 배워 고수가 되겠다는 꿈은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 보통 사람으로 지내도록 해라. 이제부터 유풍무관에 올 필요도 없다. 우리 무관도 돈을 받고 무공을 가르치는 곳이긴 하나, 폐맥혈맥을 각성한 사람은 예외다. 다른 무관의 비웃음만 사게 될 것이야.”

여창해는 무표정하게 말을 끝낸 후 석목의 어깨를 툭, 치고 떠났다.

석목은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못하다, 한참 후에야 근처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하……, 하……. 어제까지만 해도 풍성 제일의 수련자였는데 오늘은 석후폐맥이라니. 정말 재미있구나……. 하하하…….”

석목은 거의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걸어 나가던 여창해는 뒤에서 들려오는 석목의 소리에 살짝 표정이 흔들렸지만 끝내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시간이 꽤 흐른 후, 석목은 평온해보이는 얼굴로 유풍무관을 나서 사유지로 향했다.

며칠 후, 풍성 전역에 혈맥광조의 시대가 열렸고 심맥 사자들이 풍성에서 왕천호를 포함한 혈맥무인 3명을 찾아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물론 석목이 석후폐맥을 각성했다는 사실 역시 퍼졌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이들이 놀랐고 심지어 몇몇은 매우 기뻐하기도 했다.

* * *

금씨 가문 본채의 어느 방에선 석옥환의 모친 금진이 위엄 가득한 한 50대 사내 앞에서 눈썹을 치켜세우며 묻고 있었다.

“오라버니, 듣자하니 기령단 10개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석목의 몫을 금전에게 주었다면서요?”

“그렇다. 내가 석목의 몫을 조카에게 주었지. 일곱째야, 마침 잘 왔구나. 다섯째가 보낸 은표 1만 냥이다. 돌아가 사람을 시켜 석목에게 주면 된다.”

위엄 있는 사내는 현 금씨 가문의 가주였다. 그는 금진의 질문을 듣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소매에서 은표를 꺼냈다.

“고작 은표 1장을 기령단과 바꾸시려 하는 겁니까? 오라버니, 석목을 바보로 아십니까?”

금진은 손을 들어 은표를 쳐냈다.

“허허, 석목 그 놈이 바보가 아니라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 우리 금씨 가문 역시도 기령단을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어찌 그 귀한 것을 폐맥을 가진 사람에게 내어준단 말이냐?”

위엄 있는 사내는 전혀 아랑곳 않고 팔을 내리며 매우 차갑게 말했다.

“석목이 폐맥이던 아니던 이미 석목에게 기령단을 주겠다고 약조했습니다. 이 일은 절대 이렇게 넘길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만나서 얘기하겠습니다.”

금진이 말했다.

“아버지를 찾는다고? 일곱째야, 이게 그 아버지께서 직접 지시한 것이다.”

사내가 냉랭하게 말했다.

“뭐라고요? 아버지께서 직접 지시했다니요?”

금진은 그 말을 듣고 표정이 굳어버렸다.

“잊지 마라. 네 성씨는 석이 아니라 금이다. 네 남편은 데릴사위로서 금씨 가문에 온 것이고. 기령단 하나 정도야 상황에 따라 줄 수도 있지만 절대로 다른 가문의 비웃음을 사는 짓을 할 순 없다. 일곱째야, 돌아가 옥환이나 더 챙겨라. 혈맥광조의 시대가 열렸으니 3대 종문의 행주사자(行走使者)도 분명 나타날 것이다. 분명 옥환에게도 하늘의 운이 따르고 있는 것이겠지.”

금씨 가문의 가주는 석옥환을 언급하며 표정이 한결 온화해졌다.

“흥! 아버지 뜻이라니 어길 수는 없겠군요. 오라버니께선 옥환의 일을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금진은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기다려라. 이 은표를 가져가야지.”

금씨 가문의 가주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저도 1만 냥 은자 정도는 충분히 줄 수 있습니다. 다섯째 오라버니께서 억지로 주시는 돈을 굳이 받고 싶진 않네요.”

금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순식간에 대문을 나섰다.

* * *

금진이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석옥환이 곧바로 물었다.

“어머니, 백부님과 얘기가 잘됐나요? 기령단을 오라버니께 돌려준대요?”

“불가능 할 것 같구나. 네 조부님께서 직접 지시한 거라 나도 힘이 부족해. 허나 돌아가면 성 집사를 통해 3만 은표를 보내 줄 것이야.”

금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머니, 이번에는 조부님께서 심하셨습니다.”

석옥환은 금진의 말을 듣고 금세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네 조부님과 백부님이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기도 힘들겠구나. 폐맥을 가진 사람에게 기령단을 주는 것은 확실히 금씨 가문의 명성에도 큰 영향이 있을 것이니……. 이번에는 약조를 깨는 수밖에 방도가 없겠구나.”

금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 * *

천왕사 뒤뜰에서도 풍리, 고원이 앞의 행상인이 전한 소식을 듣고 있었다.

한참 후, 풍리는 손을 휘저어 앞에 있는 사람을 떠나보냈다.

“석목이 석후혈맥이라니 정말 생각도 못 했군요, 다른 수련자보다 강했던 것이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그에게 흑호회의 우두머리를 맡기려 했던 것은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고원은 꼭 석목의 불행을 기뻐하는 듯했다.

“맞아. 석 형제가 폐맥이라니 상상도 못했다. 정말 너무 안타깝구나. 오히려 아무 혈맥도 각성하지 않았다면 무인으로서도 큰 성과를 이룩했을 텐데……. 아무래도 의지할 사람을 새롭게 찾아야겠구나.”

풍리는 매우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 *

“석목이 폐물이었다니! 당시에 그에게 도전하려 했던 게 다 억울하구나.”

비홍무관의 철련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보고 하찮다는 듯이 말하고는 새롭게 배운 권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이 권법은 제대로 익히기만 하면 쇄석권에 대적하기 딱 적합한 권법이었다.

한편, 오씨 가문 밀실에서도 마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후폐맥을 각성하다니! 정말 잘됐구나. 이제 금씨 가문에선 그 놈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겠어! 아버지, 사람을 시켜 당장 그 녀석 다리를 분질러 버리고 싶습니다.”

오화가 미친 듯이 웃으며 아버지 오풍에게 말했다.

“문제없다. 이제 폐물일 뿐이니 두려워할 게 아무것도 없어. 종씨 가문 물건들이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그 종씨 가문 계집의 피가 필요하다는 걸 발견했다. 곧 네 셋째 숙부가 직접 그 계집을 데려올 것이니 그때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말을 해놓으마.”

흰 피부를 가진 오풍은 아들 오화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저도 셋째 숙부님과 함께 가서, 석목 그 놈의 두 다리를 분질러뜨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오화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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