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꿈속의 원숭이
석목은 사유지 침실에서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병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석목은 문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
이내 문이 열리고 수려한 외모를 가진 여인이 나무쟁반을 들고 걸어왔다. 그녀는 곧 탁자 위에 뜨거운 고기죽을 능숙하게 올려두었다.
“종 낭자, 또 왔군요. 제가 이런 고된 일은 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종수였다.
종수는 사유지에서 지내게 된 이후 자신을 거둬준 석목이 고마워, 요 며칠 차를 따르고 음식을 나르는 등 번거로운 일을 도맡아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조금이라도 드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제가 직접 만든 죽이에요.”
종수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종수의 이마 몽고반점이 다소 흉하게 보일 진 몰라도 그녀의 부드러운 마음씨만은 누구보다 더 아름다웠다.
“벌써 하루나 지났나요. 그렇다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석목이 씁쓸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석목은 고기죽을 순식간에 비우곤 만족스러운 감탄사를 내뱉었다.
“종 낭자, 고기죽이 정말 맛있군요. 요리 실력이 이렇게 뛰어난 줄 몰랐어요. 나중에 누구와 혼인할지는 몰라도 그 사람은 먹을 복이 터졌네요.”
“오라버니도 참 짓궂군요. 저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누가 데려가겠어요. 오라버니께서 제 솜씨가 마음에 든다하니 앞으로 자주 만들어 드릴게요.”
종수가 흰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말했다.
“그러하면 제가…….”
석목이 종수를 향해 웃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갑자기 밖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 장쇄가 들어와 말했다.
“도련님, 금씨 가문 성 집사님이 도련님을 뵙길 원합니다.”
“성 집사님? 알겠다, 금방 가지.”
석목이 탁자 위의 작은 병을 챙겨들고 큰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장쇄는 당황하며 그를 쫓았고, 종수도 잠시 머뭇거리다 뒤를 쫒아갔다.
* * *
잠시 후, 사유지 대문 밖에 어두운 낯빛을 한 석목이 보였다. 석목은 성 집사가 건넨 은표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은표로 기령단을 대신 하겠다고요? 기령단의 시가는 고작 만 냥이니 3만 냥을 주면 제가 크게 한 몫 잡았다고 좋아할 거라 생각한 건가요?”
“허, 도련님. 마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가주 어르신께 직접 찾아가 한바탕 난리까지 치셨죠. 허나 이 일은 선대 가주께서 직접 지시하신 것이라 마님도 마땅한 수가 없으셨습니다. 이 3만 냥의 은자도 마님이 본인의 사비를 털어서 준 것입니다. 마님께서는 비록 기령단은 줄 수 없게 되었지만, 처음 만난 날 말했던 두 번째 조건이 아직 유효하다고도 전하라 하셨습니다.”
성 집사가 말했다.
성 집사는 석목을 줄곧 좋게 생각했기에 석목이 폐맥을 각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다.
“진 이모께서 지시한 것이 아니었군요. 오히려 감사해야겠어요.”
석목은 그제야 천천히 은표를 받아들였다.
“도련님께서 마님의 마음을 알았다면 됐습니다. 이 기회를 틈타 도련님을 해치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한동안 성에는 오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성 집사가 신신당부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진 이모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참, 무인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계획이라면 제가 추천 해드리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성 집사가 소매에서 쪽지를 꺼내 석목에게 전해준 뒤 이곳을 떠났다.
석목은 은표 3장과 쪽지를 쥔 채, 그 자리 그대로 성 집사의 모습이 완전히 다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고만 서 있었다.
종수와 장쇄는 그들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고 있었다. 종수는 이들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걱정하는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지만, 장쇄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 듯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그날 저녁, 석목은 침상에 앉아 손에 든 작은 병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석후폐맥이라니……. 내가 폐물이라니……. 믿을 수 없어.’
“어머니, 걱정 마십시오. 이미 세상에서 제일 강한 자가 되겠다고 뜻을 정했으니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경맥이 절단 된 것도 아니고, 고작 폐맥을 각성한 것인 걸요.”
석목은 몇 마디 중얼거리다 병을 열고 흰색 단약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단약은 천음차녀가 준 기령단이었다.
단약은 손으로 만졌을 땐 금속 같이 단단했는데 입에 넣자 마치 솜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게 녹아내렸다. 잠시 후, 석목은 위장에서 뜨거운 기운을 느꼈고, 그 기운은 곧 흡수되듯 사라졌다.
쿵!
석목이 머릿속에서 무언가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감각이 평소보다 몇 배 더 예민해지더니 몸속 곳곳이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석목은 즉시 무릎을 꿇고, 눈을 감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 * *
같은 시간, 금씨 가문의 어느 조용한 방에선 한 중년 사내가 자신과 닮은 소년에게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이 쓸모없는 놈! 네놈이 석목에게 쓰레기라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차라리 폐맥인 그놈이 낫지. 네놈이야말로 진정한 쓰레기다. 이번엔 반드시 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한데 이게 무슨 일이냐. 내가 어쩌다 너 같이 쓸모없는 놈을 낳았는지 모르겠구나. 이러려고 내가 그런 큰 대가를 치르고 일곱째한테서 기령단을 뺐어온 줄 아느냐! 석목 그놈에게 기령단을 넘겼다면 은자라도 아꼈을 테지!”
사내의 분노는 점점 더 극에 달해 급기야 소년의 뺨까지 거세게 내려치고는 노발대발하며 떠났다.
“석목…….”
금전은 빨갛게 부은 볼을 쓰다듬으며 이를 악물고 석목의 이름을 불렀다.
* * *
반나절 후, 석목은 배에서 미약한 열기를 느끼고 감격했다. 놀랍고도 기쁜 마음이 쉴 새 없이 교차했다.
‘이것이 기로구나!’
기령단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미세한 기운은 절대 느낄 수 없었을 것이었다. 석목은 이제 심법을 구해내기만 하면 진기를 수련할 수 있게 됐다. 어떤 의미로는 이제야 드디어 진정한 무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한참 뒤, 석목은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소매에서 성 집사에게 받은 종이를 꺼내 읽었다.
“변경의 삼주(三洲)! 군무당(军武堂)!”
한참 후, 석목이 소리를 냈다.
* * *
순식간에 한 달이 지나고 개원무원 측에선 입관시험을 거행할 것이라 공표했다. 위치는 풍성 동측 외곽에서 30리 떨어진 광릉곡(广陵谷)이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개원부가 관할하는 4개 주에서 수많은 수련자들이 각자 말이나 배 따위를 타고 풍성을 향해 몰려왔다.
그러자 풍성의 태수는 매우 엄격한 계엄령을 내렸다. 시험일을 기준으로 전후 3달간은 성 내에서 무인들의 소란을 금지 시켰고, 이를 위반할 경우 경중을 따져 가벼운 경우엔 목에 칼을 씌우고 심한 경우엔 즉살하도록 명했다.
하여 풍성의 거리 곳곳에 무장한 병사들이 무리지어 돌아다녔다. 모두가 활을 메고 창을 들고 있어, 지켜보는 것만으로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여러 가문과 크고 작은 조직들은 단속기간 동안 외지에서 온 무인을 건드리지 않도록 내부를 철저히 단속하기도 했다.
교외에 거주하는 석목은 한 달간 사유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낮에는 도법과 권각을 수련했고, 저녁에는 잠을 잤다. 마치 개원무원에 관한 일들은 모두 다 잊어버린 듯했다.
* * *
푸른 산, 한 흰 원숭이 한 마리와 회색 원숭이들은 산등성이를 이리저리 뛰어넘으며 술래잡기에 한창이었다.
해가 지자 기진맥진한 원숭이들은 어느 거대한 동굴에 들어가 하나둘 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흰 원숭이만은 기운이 남았는지 동굴 밖에 남아 있었다. 그 원숭이는 곧 산 정상의 한 나무에 올라가더니, 꼬리를 나뭇가지에 감고 쪼그려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매우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달빛으로 뒤덮인 하늘에 흰 빛이 하나둘 생겨나더니 점점 더 수없이 늘어났다. 마치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불빛들이었다.
이내 흰 원숭이는 눈을 한번 깜빡였고, 검었던 원숭이의 두 눈동자는 홀연 금빛으로 변했다.
훅-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한 밤하늘 아래 빼곡한 흰 빛들은 갑자기 분주하게 움직이며 원숭이의 금색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흰 원숭이는 전신이 안락하고 포근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기분이 좋아진 원숭이는 급기야 입술을 내밀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확-
석목이 나무침상에서 튕겨지듯 일어났다. 몸은 이미 격한 운동을 한 사람처럼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안색도 매우 창백했다.
“벌써 일곱 번째야! 이 꿈은 도대체 뭐지? 일주일간 매일 같은 꿈을 꾸다니, 마가 끼었나?”
석목이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그가 방금 꾼 괴상한 꿈은 7일 전부터 매일같이 반복됐다. 석목은 꿈속에 항상 흰 원숭이가 되어, 다른 원숭이들과 산속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해가 지면 동굴에 들어가면서 꿈에서 깨어났었는데 오늘은 특이하게도 나무에 올라가 눈으로 빛을 흡수하다가 잠에서 깼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석후혈맥을 각성했기 때문에 꿈에서 원숭이가 되는 것일까? 그럼 왜 얼마 전까지는 이런 꿈을 꾸지 않은 것이지? 며칠 전 기를 느낀 것과 관련이 있나?”
석목은 반복되는 꿈을 꾸는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었다. 열려있는 창문 사이로 달빛이 흘러 들어와 석목의 침상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석목은 곧 꿈에서 봤던 달빛을 떠올렸다.
석목은 바로 침상에서 내려와 나무 문을 활짝 열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침상 밖의 작은 정원도 달빛에 비춰져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휘영청 밝은 초승달이 보였다. 차가운 백광을 뿌리는 달은 매우 조용하고 거룩해 보였다.
석목은 한동안 하늘의 초승달을 바라보며 서 있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렸다. 정원 곳곳을 살펴보니, 정원 구석에 반쯤 말라비틀어진 노목이 보였다. 높이는 5~6장정도 되어보였고, 잎사귀는 거의 없었다. 어떻게 봐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 나무였다.
석목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무를 자세히 보다 돌연 무언가 번뜩 떠올랐다.
이내 나무로 다가간 석목은 두 팔로 나무를 안는듯하더니 순식간에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갔다.
두꺼운 나뭇가지 위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자, 석목의 자세는 꿈에서 본 흰 원숭이의 자세와 완전히 똑같아졌다,
석목의 착각일수도 있겠지만, 석목은 왠지 이 각도에서 보니, 달이 처음 봤을 때보다 더욱 크고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석목은 입술을 삐죽이며 스스로를 비웃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한밤중에 나무에 올라가 꿈에서 보았던 원숭이의 행동을 따라하다니, 다른 누군가가 봤다면 분명 석목이 미쳤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석목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젓고, 곧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리려 했다.
그런데 석목이 막 몸을 움직이려던 찰나, 갑자기 머릿속에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석목은 순간 몸이 굳어버려 달을 바라보던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할 수 없게 됐다.
석목은 방금 전까지 방에서 꾸던 그 꿈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석목은 또다시 흰 원숭이가 되어 두 눈을 크게 뜨고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빛들을 흡수했다. 눈이 뜨거워 견디기 어려웠지만 몸은 오히려 너무나 편안했다.
석목은 여전히 원숭이의 몸을 하고 있었지만 전에 꿈을 꾸었을 때와는 달리 의식이 매우 뚜렷해서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 없어서, 이렇게 의식이 분명히 살아있는 채로 원숭이의 몸에 갇혀버린 것만 같았다.
속수무책으로 나무에 앉아 시간이 흐르는 감각도 없어졌을 때쯤, 갑자기 흰 원숭이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석목이 원숭이의 몸을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석목은 너무 기뻐 이제 이 원숭이의 몸으로 무엇을 할지 찬찬히 생각을 해보려했다. 허나 그 찰나, 머릿속에 윙윙, 소리가 나더니 저절로 눈이 감겼다.
석목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석목은 여전히 나뭇가지 위에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던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몸은 다시 원숭이가 아닌 석목의 몸으로 돌아왔고, 몸 전체가 온통 땀에 다 젖어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그리고 휘영청 높이 떠 있던 달도, 날이 밝아 다 사라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