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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22화 (22/916)

22화. 자강궁(紫钢弓)

나무에서 내려가기 위해 아래를 내려다 본 석목은 깜짝 놀랐다.

다 죽어가던 고목이 어린 나뭇가지를 틔우고 푸른빛으로 무성해져 있었다.

석목은 입을 크게 벌린 채 놀란 마음을 쉽게 진정시키지 못했다. 잠시 후에야 다시 정신을 차린 석목은 나무를 자세히 관찰했지만, 나무가 다시 회춘한 것을 제외하곤 다른 이상한 점은 찾지 못했다.

석목은 다시 나뭇가지에서 뛰어 내려왔다.

쿵!

석목의 두 다리가 바닥에 닿으며 주위로 흙먼지가 날렸다. 석목은 숨을 크게 내뱉고서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석목은 그제야 자신이 나뭇가지 위에서 밤을 꼬박 보냈다는 걸 눈치 챘다.

‘백일몽!’

비록 석목이 낮에 꿈을 꾼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단어 말고는 이 괴이한 경험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내 꿈에서 흰 원숭이의 두 눈이 무수한 빛을 흡수하는 장면을 떠올린 석목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두 눈을 살살 만져보았다. 눈동자가 조금 시린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석목은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정원을 훑어보았다.

“이……, 이건!”

석목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정신을 집중하니 7~8장거리에 있는 초원의 개미까지 뚜렷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눈을 조금 돌리자 정원 구석에 있는 거미줄까지도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석목은 찬 공기를 들이 마시곤 고개를 들어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자란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역시 나뭇잎의 옅은 잎맥까지도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자세히 보였다. 석목은 크게 놀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석목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매우 즐거운 그의 웃음소리는 잠을 자던 사유지 사람들의 단잠도 다 깨워버렸다.

웃음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이들은 처음엔 화를 내다가, 사유지 주인인 석목의 웃음소리임을 알고는 그냥 다시 조용히 잠을 청했다.

석목은 웃음을 멈췄지만 여전히 흥분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침실로 돌아온 석목은 대문을 닫고 탁자로 다가가 그 위에 놓인 반쯤 녹은 양초를 매섭게 노려봤다.

휙-

도를 뽑아든 석목이 잠시 망설이다, 양초의 맨 윗부분을 베어 불을 껐다.

휙- 휙-

석목이 다시 도를 휘두르자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탁자 위로 검광이 수차례 지나갔다.

하지만 촛대 위의 양초는 여전히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있었다.

석목은 미소를 지으며 도의 뒷면으로 탁자를 쳤다.

툭!

양초가 흔들리다가 아홉 토막으로 나뉘어 탁자 위로 떨어졌다. 토막 난 양초는 크기, 모양, 두께가 모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로 잰 듯 일정했다.

“일식팔참! 도를 휘두르는 정밀도를 높이면 속도도 빨라질 것이란 생각이 맞았어. 아직은 통제력이 시력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통제력만 높인다면 일식구참도 불가능하지 않을 거야.”

석목은 눈앞의 조각난 양초를 보고 한껏 상기돼 말한 뒤, 다시 허공을 향해 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두 눈을 빛내며 도를 휘두르는 석목은 조금도 멈출 기미가 없어 보였다.

* * *

며칠 후, 저녁

밤하늘 열린 창문 틈새로 차가운 달빛이 들어와 침상 머리를 비췄다. 석목은 침상에서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석목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석목은 쏟아지는 달빛을 맞으며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석목은 매우 능숙하게 정원의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나뭇가지 위에 쪼그려 앉은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목의 몸이 살짝 떨리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

꿈속에 들어간 석목은 다시 흰 원숭이로 변해있었다. 원숭이는 여느 때와 같이 나무에 쪼그려 앉아 금빛 눈으로 하늘에서 내리는 빛을 흡수했다.

석목은 의식은 있어도 몸은 움직일 수 없어 그저 곁눈질로 주위를 훑었다.

‘3척 거리에 작은 벌레가 있었는데 오늘은 없네. 하나, 둘, 셋……, 열일곱. 어제 꿈속에선 나뭇가지에 나뭇잎이 19개 있었고, 이틀 전에는 20개가 있었지……. 역시 같은 꿈을 반복하는 건 아닌가 보군. 꿈에서도 현실과 같이 시간이 흐르는 듯해.’

일주일이나 같은 꿈을 꿨던 석목은 시력이 좋아진 이후로 더 이상 자면서는 원숭이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그 뒤론 달빛이 비추는 새벽, 나무 위에서 달을 올려다보며 백일몽의 형식으로 달빛을 흡수할 뿐이었다.

며칠간의 백일몽을 통해 석목은 점점 더 멀리, 더 선명히 볼 수 있게 됐지만 그 성장 속도는 첫날과 비교해선 굉장히 낮았다.

그럼에도 석목은 며칠 사이, 십 몇 장 밖에서 날아다니는 곤충의 다리 개수 정도는 가볍게 헤아릴 수 있게 됐고, 높은 곳에 올라가면 5~60장 거리 밖의 콩알만 한 벌레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하루는 달빛이 없는 날에도 나무 위에 올라가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꿈속으론 들어갈 수 없었다. 그에 석목은 매번 꿈속에서 흡수하는 빛이 곧 달빛에서 나온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 * *

그로부터 3일이 지났다.

석목은 사유지의 응접실에서 두 사람과 함께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석 형제, 마 사부에게 의뢰했던 물건을 가져왔다네. 그리고 따로 부탁했던 물건도. 이 물건은 구하기 정말 어려웠어.”

둘 중 나이가 많은 청년이 옅게 웃으며 무거운 보따리 2개를 건넸다.

“고마워요 풍 형. 잔금이니 세어보세요.”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고 소매에서 은표 2장을 꺼내 건넸다.

“하하. 석 형제가 어련히 잘 줬겠지! 참, 이번 무원의 입관시험에는 정말로 참가하지 않을 계획인가?”

풍리가 하하 웃으며 건네받은 은표는 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옆에 있던 고원도 석목의 대답이 궁금한 듯했다.

“입관시험 거행일이 정해졌나 보죠?”

석목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일주일 후 정오야. 광릉곡에서 열리지. 소문으로는 여러 가문의 가주가 참관할 뿐만 아니라 태수와 관원들도 온다더군.”

풍리가 대답했다.

“심맥 사자에게 석후폐맥을 각성했다는 사실을 선고 받았으니 시험에 참여해봤자 사람들에게 비웃음이나 받겠지요. 금씨 가문에서 받기로 했던 기령단도 이미 다른 사람에게 갔으니 애초에 기를 느낄 수도, 시험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석목 아우 실력이면 쉽게 기를 느끼고 무원 입관 시험도 통과할 수 있을 텐데……. 심맥 사자가 석목 아우를 발견하지만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정말 아쉽게 됐구나.”

풍리가 매우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후천무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무공은 집에서 충분히 수련할 수 있습니다. 단지 좋은 심법을 수련하지 못할 뿐이지요. 게다가 부귀영화는 누리지 못하더라도 평생 동안 걱정 없이 먹고 살 정도의 돈은 있습니다.”

석목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석 형제가 그렇게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다행이네. 그럼 우리 두 사람은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고 떠나겠네.”

풍리는 고개를 끄덕인 뒤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 * *

한참의 시간이 지나, 풍리와 고원은 말을 타고 사유지를 떠났다.

“형님, 저 놈은 이미 폐물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우리가 직접 물건까지 가져다주며 그를 도와야 한단 말입니까?”

사유지에서 시종일관 침묵으로 일관하던 고원이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셋째야,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우리에게 물건을 부탁했을 때 그의 상황에 대해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다. 해서 직접 확인하려 찾아갔던 것이다.”

“그럼 직접 보고나니 어떤 것 같습니까?”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무인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그와의 관계를 나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대제국에서 명성을 날려 진만공(镇蛮公)이란 칭호를 받은 악대 어르신 역시 어려서는 무시를 당했지만 연달아 기연을 만나며 선천무인이 됐다.

게다가 후에 야만족이 침입했을 때 천근에 달하는 거대한 도를 휘둘러 단칼에 야만족 용사 열셋을 참살해 이성국공(异姓国公)의 직위를 받았지 않느냐. 그 후 100년 동안 줄곧 국경인 삼주를 지키고 있고.”

풍리가 말했다.

“형님, 석목 그 놈을 악국공과 같은 선상에 놓고 말씀하는 겁니까? 너무 과대평가하셨습니다. 애초에 악대 어르신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잔병이 많았지만 폐맥을 각성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자강궁까지 그 놈에게 줄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활은 군에서 중위 이상의 군관만이 소지 할 수 있는 귀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그 궁을 얻기 위해 보급 책임자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습니까. 군 창고에 있는 활을 고장내면서까지 어렵게 구한 활이 아닙니까.”

고원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셋째야, 자강궁이 아무리 좋아도 한낱 물건일 뿐이다. 애초에 이 활을 사용할 줄도 모르는 우리가 가지고 있어서 어디에 쓰겠느냐. 석목이 좋은 활을 원하니 그에게 주는 것이 옳다. 잘 나가는 사람을 돕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더 큰일임을 알거라.”

풍리가 천천히 말했다.

“형님께서 그를 그렇게까지 생각하니 어쩔 수 없군요. 어찌 됐던 그놈이 우리 흑호회를 크게 도운 것은 맞으니 활 정도는 주도록 하죠.”

고원은 여전히 불만이 있어보였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풍리는 그의 말을 듣고 조용히 웃었다.

* * *

풍리, 고원이 떠나고 석목은 보따리 2개를 챙겨 침실로 돌아갔다.

탁자 위에서 보따리 하나를 펼치자 직사각형 모양의 나무상자가 나왔다. 상자를 여니 그 안엔 길고 작은 무기 2개가 있었다.

긴 무기는 3척 정도의 길이였다. 날이 살짝 휜 장도였고, 손잡이가 매우 길었는데 거의 전체의 3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짧은 무기는 1척 정도의 길이로, 전체가 가늘고 얇은 특이하게 생긴 비수였는데 매우 예리해 보였고, 손잡이 끝에는 작은 쇠고리가 달려 있었다.

석목은 그것들을 자세히 보더니 갑자기 손으로 탁자를 쳤다.

탁!

가느다란 비수가 탁자에서 튀어 올라 석목의 손에 쥐여졌다.

쉭- 쉭-

허공에 비수를 휘두르니, 차가운 검광이 푸르게 빛나며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석목은 이번엔 탁자의 모서리를 향해 비수를 휘둘렀다. 탁자는 마치 공기를 써는 것 마냥 소리도 없이 잘려져 나갔다.

석목은 곧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예리함을 보니 대량의 한철을 사용해 만든 것 같았다.

석목은 다른 손으로 장도를 집어 들어 몇 번 휘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들고 있던 비수를 장도 손잡이에 있는 틈에 끼워 넣고 비틀었다.

찰칵, 비수가 장도의 손잡이에 끼워졌다. 육안으로는 이를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석목은 한동안 그 장도를 휘두르다가 다시 나무상자에 넣고 다른 보따리를 열었다.

이 안엔 보라색 활이 있었고, 크기는 족히 사람의 절반 정도는 돼 보였다. 한 손으로 활을 들어 무게를 가늠해보니 대략 5~60근 정도 나가는 듯했다.

활대의 표면에는 물고기 비늘의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활시위는 어느 괴수의 힘줄로 만든 것 같았지만, 어렴풋이 은빛이 감도는 것을 보아 은실이 섞인 것 같았다.

“이건…….”

활시위를 당겨봤지만 석목의 힘으로도 절반 밖에 당기지 못했다.

“자강궁!”

석목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곧 석목이 손가락을 놓자 매섭게 튕겨져 돌아간 시위가 미미하게 진동하며 청명한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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