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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23화 (23/916)

23화. 풍화통(风火筒)

“풍리가 마음을 썼구나.”

자색 활을 만지며 중얼거리는 석목의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다시 확인해 보니 보따리에는 활 말고도 가죽 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그 안에는 긴 화살이 있었는데, 촉은 흑철로 만들어졌고 깃에는 검은 깃털이 가지런히 박혀 있었다.

석목은 가죽 주머니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 활대에 걸어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화살주머니를 챙겨 방을 나섰다. 그 후로 석목은 꼬박 하루 동안 사유지에서 활을 쏘는 연습을 했다.

석목은 전에도 무관에서 궁술을 배운 적이 있어 자강궁을 손쉽게 다뤘다. 지나가던 하인들도 석목이 50보나 떨어진 과녁을 여러 번 명중하는 모습을 보고 매우 놀랐다.

* * *

시간은 흘러 저녁이 됐다.

사유지 응접실에선 종수가 눈을 크게 뜬 채 묻고 있었다.

“오라버니, 정말 삼주로 가서 군무당에 들어갈 건가요?”

“네, 며칠 뒤에 바로 떠날 계획이에요.”

석목이 평온하게 말했다.

“오라버니가 떠나면 전 어떡하죠? 이 사유지는요?”

종수가 얼이 빠져서 물었다.

“논밭과 주루는 이미 며칠 전에 장쇄를 시켜 팔아 치웠습니다. 종 낭자는 제가 진 이모 곁으로 보내줄게요. 오씨 가문이 낭자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더라도 절대 금씨 가문에 있는 낭자를 건드리지는 못 할 거예요.

그게 싫다면 저와 함께 떠나도 좋습니다. 종 낭자 어머님 먼 친척이 노용부(卢龙府) 청수성(清水城)에 계신다고 말한 적 있었지요? 그 성은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삼주로 가는 길에 먼저 그곳으로 데려다 줄게요.”

“오라버니의 곁에 남아있을 순 없나요? 혼자 타지에 가게 된다면 분명 허드렛일을 할 사람이 필요할 거예요.”

종수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한참 후에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종 낭자, 삼주는 야만족의 황야와 매우 근접해 야만족이 수시로 침입해요. 제가 낭자 아버님 유언을 따르진 못하더라도 낭자를 그리 위험한 곳으로 데려갈 순 없어요. 게다가 국경 수비군의 군무당에 들어가 무공을 수련하게 된다면 따로 나와서 방을 얻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을 겁니다.”

석목은 종수의 말에 담긴 어렴풋한 애정을 듣지 못한 듯,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석목의 대답에 종수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런 뒤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고서 말했다.

“네, 그렇다면 친척에게 의탁 하도록 할게요.”

“잘 생각했어요. 그럼 떠나는 날까지 채비를 하도록 해요.”

석목은 종수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석목이 준비를 다 마치고 풍성을 떠나는 날을 고작 며칠 남겨뒀을 즈음, 어느 사건이 터졌고 석목의 계획은 처참히 망가졌다.

* * *

“뭐라고? 사유지 논밭을 헤집고 다니는 무리가 있다니, 어떤 놈이 감히?”

석목은 황급히 보고하는 장쇄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무리를 이끄는 사람은 분명 금씨 가문 전 도련님이셨습이다. 전에 얼굴을 본 적이 있으니 틀림없을 겁니다. 도련님,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미 팔기로 했다곤 하나 아직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논밭이 이대로 망가진다면 그들도 교환하지 않으려 할 겁니다.”

장쇄가 허둥거리며 말했다.

“전 도련님이라면 금전을 말하는 것이겠지? 좋다, 내가 가보도록 하지.”

석목은 논밭을 훼손한 자의 이름을 듣고 눈빛을 차갑게 굳혔다.

그 금씨 가문 다섯째 어르신이란 사람이 원래 석목의 몫인 기령단을 금전에게 주지 않았더라면 석목도 굳이 풍성을 떠나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상황에서 그의 아들 금전이 논밭에서 소란을 피운단 얘기를 들으니 평소 침착한 성정의 석목도 불같은 화가 치솟았다.

* * *

석목은 즉시 사유지를 나서 논밭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논밭에 도착한 석목은, 화려한 옷을 입고서 커다란 말을 타고 여우를 쫓고 있는 소년들을 발견했다.

논밭을 이리저리 오가며 뛰어다니는 여우의 몸놀림은 매우 민첩했고, 소년들은 낄낄거리며 여우를 뒤쫓았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석목은 여우와 말에게 밟혀 망가진 농작물을 보며 안색이 새파래졌다.

“도련님, 저 분이 금전입니다!”

이때, 장쇄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파란 옷을 입은 납작코 소년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석목은 소년을 차갑게 훑어보고, 논밭 가운데로 걸어갔다.

바로 그때, 여우가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소년들을 끌고 석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소년들의 선두에는 파란 옷의 금전이 있었다.

소년들은 석목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속력을 줄였지만, 금전만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더 거세게 채찍질을 하며 석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금전, 멈춰!”

“뭐하는 거야?”

뒤에 있던 소년 몇 명이 깜짝 놀라 말렸지만, 금전은 전혀 멈추지 않았다.

석목은 곧바로 달려오는 여우는 발로 차버리고, 이어서 돌진해오는 말을 향해 매섭게 주먹을 내 질렀다.

쿵!

파란 옷의 금전과 타고 있던 말이 1장 가까이 날아가 떨어졌다.

뒤에 있던 소년들은 화들짝 놀라 소리를 내며 금전에게 몰려왔다.

“네놈이 죽고 싶은가보구나!”

금전이 자신을 깔고 있는 말을 밀어내고 분노하며 일어났다. 상처는 입지 않은 듯했지만 가슴팍의 옷이 살짝 찢어져 있었다. 그 찢어진 옷 사이로는 어렴풋한 금색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깜짝 놀랐어!”

“저 놈이 석목이야? 힘이 정말 강하잖아!”

“풍성 제일의 수련자라는 칭호를 가졌었다던데 아주 평범해 보이는군.”

“금전 저놈이 어떻게 금사갑을 입고 나왔지?”

“그러게 말이야. 저 물건은 다섯째 어르신이 생명처럼 아끼는 물건이라 평소 같으면 만져보지도 못할 물건이잖아.”

금씨 가문 자제로 보이는 소년들이 금전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을 보고 뒤쪽에서 저마다 떠들기 시작했다.

“감히 나를 때리다니! 네놈을 썰어버리겠다!”

금전은 주변 반응은 전혀 아랑곳 않고, 미친 사람처럼 옷을 찢어버린 뒤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았다. 찢어진 옷 사이론 금빛 연갑이 빛나고 있었다.

“금전 이놈이 작정을 하고 왔구나!”

“금사갑을 입었으니 후천무인이 오지 않고서는 상대할 수 없겠는걸?”

“다들 금전이 저 여우를 일부러 이 논밭으로 내몬 것을 눈치 챘어?”

“응, 눈치 챘어. 분노를 꾹 억누르고 있는 게 보였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으려 하더군.”

금씨 가문의 자제들은 둘의 싸움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낄낄거리며 대화에 한창이었다.

휙-

금전이 두 검을 석목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파공성이 크게 울리더니 갑자기 각각 2개의 검영으로 다시 흐릿하게 나누어졌다.

“오, 금전의 분영검법(分影剑法)이 소성의 경지에 올랐구나.”

한 소년이 금전의 초식을 보고 가볍게 탄성을 내뱉었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에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펑!

석목은 몸을 피하지 않고 좌측 검영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은 검의 실체에 정확히 명중했고, 검은 곧 금전의 손을 떠나 하늘로 멀리 날아가더니 푹, 논밭에 떨어져 박혔다.

금전은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한 걸음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검을 쥐고 있던 그의 손아귀는 다 터져 피가 줄줄 흘렀다.

짝! 짝!

석목이 화살처럼 빠르게 금전에게 다가가 양쪽 뺨을 번갈아 때렸다.

석목이 나름 사정을 봐주고 때렸음에도 금전은 마치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2바퀴를 돌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양쪽 볼이 크게 부어오른 금전은 눈앞이 깜깜해 한순간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깨닫지도 못했다.

석목은 팔짱을 낀 채 바닥에 주저앉은 금전을 차갑게 내려다봤다.

소년들의 웃음소리도 일순간 다 그쳤다. 금씨 가문 자제들 역시 일제히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로 그 자리에 다 얼어붙어 있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분영검법을 파훼했지?”

“운이 좋은 것일지도 몰라. 찍어서 맞춘 것이 분명해!”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이제야 겨우 깨달은 금전은, 이내 빨개질 정도로 두 눈을 부릅뜬 채 괴성을 지르며 석목에게 돌진했다. 흥분한 금전은 초식을 펼치지도 못하고 그저 미친 사람처럼 마구 칼을 휘둘러 대기만 했다.

석목은 그 모습을 보고 차갑게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금전의 검을 옆으로 살짝 피한 뒤, 한 손으로 재빨리 칼을 잡아챘다.

흉흉한 기세로 달려들던 금전은 검을 뺏기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쨍강!

석목은 검 양쪽 끝을 잡고 힘을 줬다. 장검은 일순간 두 동강이 났다.

휙- 휙-

석목이 곧 양손을 휘두르니 두 동강 난 칼이 흰 궤적을 남기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무언가가 번뜩였다고 생각한 순간, 두 칼은 이미 금전의 양쪽 볼을 스치고 지나가 바닥에 비스듬히 박혔다. 금전의 한쪽 볼엔 가는 상처가 생기고, 붉은 피가 흘러 나왔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던 금전은 잠시 후,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네가 감히 나를 죽일 수 있을 리 없지. 나를 놀래게 하는 것이 고작인듯하니 네놈을 겁낼 이유가 없구나!”

말을 마친 금전이 품에서 손바닥 크기의 원통을 꺼냈다. 금속 특유의 광택을 띤 원통의 앞엔 엄지손가락 두께의 검은 구멍이 하나 있었다.

“금전, 풍화통(风火筒)을 훔쳐오다니 미친 거야?”

“가문의 규칙을 어기다니! 우리는 이 일과 관련 없으니 절대 엮지 마.”

“가주께서 알게 되면 두 다리를 부러뜨리는 정도로도 끝내지 않을 거야.”

원통을 본 금씨 가문 자제들은 크게 놀라 욕을 하거나 만류하는 등 반응은 각기 달랐으나, 모두가 일제히 말을 채찍질해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금전이 들고 있는 이 원통을 맹수나 독충보다도 더 무서워하는 것 같아 보였다.

“흥! 이 수모를 풀 수만 있다면 가문에 몇 년간 갇혀있어도 괜찮다!”

금전은 양 볼이 크게 붓고 한 쪽엔 피까지 흘리면서도 표독스럽게 말했다.

금전이 곧 원통을 들어 석목을 조준했다.

석목은 풍화통이 뭔지는 몰랐지만 금씨 가문의 자제들이 공포에 질려하는 모습을 보고 이미 마음에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금전이 자신에게 원통을 조준한 순간, 자신의 주먹에 맞아 쓰러졌던 말 뒤로 몸을 던졌다.

“죽어라!”

금전이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며 원통 뒤에 튀어나온 부분을 눌렀다.

훅!

원통에서 발사된 거무칙칙한 구슬이 석목을 향해 놀라운 속도로 날아갔다.

“아!”

“정말 사용해버렸어.”

“도망쳐!”

금씨 가문의 자제들은 그 광경을 보고 놀라 혼비백산했다. 말에서 뛰어내린 그들은 바닥에 엎드려 밀착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라!”

석목이 크게 외치며 말 앞다리를 잡아 날아오는 구슬을 향해 내던졌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바닥을 발로 차 바닥에 몇 척 깊이의 구덩이를 만들었다.

쾅!

검은 구슬은 말에 적중하는 순간 터져 맹렬한 불꽃을 일으켰다. 열기와 함께 사방팔방으로 휘몰아치던 화염은 족히 두 호흡은 유지하다가 사라졌다.

펑!

바닥에 말의 잔해가 비 오듯 쏟아져 내렸고, 겨우 반밖에 남지 않은 몸도 숯처럼 까맣게 다 타 있었다.

“흔적도 없이 죽어버렸구나!”

금전은 석목이 있던 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휙- 소리와 함께 검은 인영이 바닥 구덩이에서 튀어나왔다. 인영은 순식간에 금전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아!”

금전은 깜짝 놀라 피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검은 인영은 기합과 함께 금전의 배에 주먹을 꽂았다.

금전은 금사갑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쏟아지는 힘을 전부 막아내진 못했다. 두려울 정도로 강력한 힘이 갑옷을 뚫고 파고들었고, 금전은 비명과 함께 양손으로 배를 감싼 뒤 바닥에 꿇어앉았다.

검은 인영은 바로 풍화통 공격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은 석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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