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목숨을 걸다
석목은 이제 움직이지 못하게 된 종수를 업은 채 말없이 산속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위쪽에서 들린 쟁쟁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석목과 종수의 위로 매 한 마리가 선회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매는 멈추지 않고 울고 있었다. 석목이 그냥 무시하고 다시 앞으로 걸어가자, 매는 계속해서 석목을 따라오며 더욱 다급하게 울었다.
“뭔가 이상해요! 종 낭자, 잠깐 내려와 봐요.”
석목이 말했다.
“알겠어요. 오라버니. 조심하세요.”
종수는 피곤해서 석목의 등에 업혀 단잠에 빠져 있었으나, 석목의 목소리를 듣고 얼른 정신을 차렸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인 뒤 종수를 가볍게 내려주었다. 그리곤 손을 들어 어깨에 메고 있던 자강궁을 꺼내 화살을 걸었다.
휙-
하늘에서 선회하던 매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유성처럼 멀리 추락했다.
“됐어요. 계속 가죠!”
석목이 자강궁을 다시 어깨에 메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석목이 막 말을 끝낸 순간, 먼 하늘에서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날아온 흰 매 2마리는 이번엔 1리 정도 거리를 둔 채 하늘에서 선회하며 그 이상은 접근하지 않았다.
석목은 종수를 안은 채 질주하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무슨 일인가요? 설마 훈련받은 매인가요?”
종수가 석목의 품에서 물었다.
“맞아요. 성 집사에게 금씨 가문에는 추적에 능하며 하루에 천리를 날 수 있는 벽두응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그 매는 보통 추적에 능한 혈견과 같이 행동한다더군요.”
석목이 어두운 표정으로 빠르게 말했다.
달려가는 석목의 속도는 일반 말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빨랐다.
“혈견이라면, 설마…….”
“왈왈!”
종수가 말하던 도중, 멀지 않은 곳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체구가 거대한 개가 100여장 뒤 나무에서 튀어나와 석목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석목, 드디어 네놈을 찾았구나! 감히 내 유일한 아들을 죽이다니! 가죽을 벗기고 근육을 뽑아내도 한이 가시지 않을 것 같구나.”
얼굴이 긴 중년 사내가 양손에 금색 곤봉을 들고 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크고 작은 두 사람도 따라 나왔다. 금오와 견응이복이었다.
석목은 그들보다 두 시진이나 먼저 출발했지만 종수를 업고 뛴 데다 줄곧 꺾어지는 길이 없어서 결국 백두응과 혈견의 도움을 받는 이들에게 따라잡힐 수밖에 없었다.
석목은 그들을 보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더 이상 그들을 뿌리치고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곧 석목이 종수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가요, 저들을 막을 테니 얼른 뛰어요!”
“싫어요. 이번엔 저도 오라버니와 함께할 거예요. 오라버니가 없다면 어차피 저도 멀리 이동하지도 못해요. 죽더라도 같이 죽어요.”
종수가 그 자리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차분하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남아 있어도 좋아요. 하지만 숨어 있어야 해요. 그래야만 내가 적을 전력으로 상대할 수 있어요.”
석목은 종수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럼 저 바위 뒤에 숨어있을게요. 오라버니, 조심하세요!”
종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바위를 향해 달려갔다.
종수가 숨은 것을 확인한 석목이 깊은 숨을 들이 마시곤 자강궁을 꺼냈다.
그때, 혈견들은 이미 상당히 거리를 좁혀 5~60장 내로 다가온 상태였다.
쿵!
앞장 서 달려오던 혈견이 화살에 맞아 피를 뿜으며 날아가 나무에 박혔다.
퉁- 퉁-
순식간에 화살 2개가 더 날아와 다른 두 혈견의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화살에 맞은 혈견들은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그대로 죽었다.
“자강궁이다! 어서 혈견들을 대피시켜!”
석목이 손에 쥔 활을 알아본 금오가 견부에게 다급히 지시했다.
명문대가인 금씨 가문도 혈견은 쉽게 길러내기 힘든 귀한 존재였다.
견부는 혈견 세 마리가 순식간에 죽는 것에 분노해, 금오의 지시가 떨어지자 즉시 휘파람을 불었다. 살아남은 혈견 두 마리는 휘파람 소리를 듣고 바로 나무 뒤로 몸을 날렸다.
퉁- 퉁-
미처 나무 뒤로 피하지 못한 혈견 한 마리가 날아오는 화살에 목을 관통당해 몇 장(丈) 가까이 날아갔다. 다른 한 마리는 나무 뒤로 재빠르게 몸을 숨겼지만 나무를 뚫고 날아오는 화살에 몸이 뚫리며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이로써 혈견 다섯 마리가 석목이 쏜 화살에 의해 전부 다 죽었다.
“죽여 버리겠다!”
견부는 금세 붉어진 두 눈으로 크게 포효했다. 그런 뒤 갑자기 바닥에 엎드리며 마치 한 마리 짐승처럼 석목을 향해 네 발로 뛰어들었다.
혈견들은 견부가 새끼 때부터 직접 키우며 가족처럼 아끼던 개들이었다. 그런 존재가 한순간에 몰살당하니 이성을 잃는 건 당연했다. 지금 견부의 머릿속엔 오로지 석목을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런! 당장 돌아 와!”
금오가 석목을 향해 뛰어드는 견부에게 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견부는 금오의 명령을 무시한 채 예측하기 어려운 몸놀림으로 석목에게 돌진했다.
석목은 견부가 돌진하는 것을 보고 신중한 표정으로 화살 3개를 꺼냈다.
퉁- 퉁- 퉁-
거의 동시에 날아간 화살 3개가 검은 궤적을 그리며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돌진하던 견부는 황급히 뛰어올라 첫 번째 화살을 피하고, 몸을 비틀어 두 번째 화살까지는 피했지만 결국 세 번째 화살은 피하지 못했다.
화살에 왼쪽 눈을 정통으로 관통당한 견부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석목은 곧바로 화살 3개를 더 쐈다. 이번 목표는 금오 곁의 응복이었다.
“어르신 도와주십시오!”
응복은 혈견들과 견부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고 공포에 떨고 있다가, 이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바닥에 엎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곁에 있던 금오는 그 모습을 보고 몽둥이를 휘둘렀다.
챙- 챙- 챙-
날아오던 화살들이 금오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부딪히며 줄줄이 두 동강 나 바닥에 떨어졌다.
“쓸모없는 놈! 여기 남거라. 저 놈은 내가 직접 상대하마.”
금오가 응복을 향해 한 마디 내뱉고 앞으로 돌진했다. 그는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5장(丈) 이상을 이동하며 석목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왔다.
석목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화살 3개를 더 쐈다.
퉁- 퉁- 퉁-
화살들이 금오가 가볍게 휘두른 몽둥이에 맞고 전부 튕겨져 나갔다.
그 광경을 본 석목은 그제야 후천 초기의 경지에 오른 무인과 후천 중기의 경지에 오른 사람의 격차를 체감했다. 곧이어 재차 화살을 꺼내려던 석목은 화살 통이 빈 것을 깨닫고 순간 몸이 굳었다.
그 순간에도 금오는 여전히 빠르게 다가오고 있어서, 이제 거리는 10여장도 채 남지 않게 됐다.
석목은 이를 악물고 자강궁을 던진 후 허리춤에서 일월도를 뽑아 금오를 향해 달려갔다. 석목이 일월도를 휘두르니 9개의 검영이 쏘아져 나갔다.
“일식구참이라니! 풍치도법을 대성했구나. 하지만 네놈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휘몰아치는 검영에 둘러싸인 금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큰 소리가 울리며 금오에게서 금빛 검영이 쏟아져 나왔다. 그 검영은 곧 석목의 검영을 전부 흩트려 버렸다.
금오의 검영에 실린 힘은 오동의 2배 이상이었다. 이내 석목의 손바닥이 찢어지고, 쥐고 있던 일월도는 그의 손을 떠나 멀리 날아갔다,
허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광풍이 일며 석목의 얼굴을 향해 또 금빛 검영이 날아들었고, 피할 여유가 없었던 석목은 급히 주먹을 휘둘렀다.
쾅!
석목의 주먹에 부딪혀 진로가 틀어진 금색 몽둥이가 석목의 어깨를 가격했다. 석목은 어깨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금오는 일격에 석목의 어깨뼈를 분지르지 못하자 매우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석목의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금사갑을 보고 그가 외쳤다.
“흥, 뼈를 분질러 버릴 심산이었건만……. 보아하니 내 금사갑을 훔쳐 입었구나. 좋다, 수년간 수련한 내 혈적장(血煞掌)을 보여주도록 하지,”
분노한 금오는 양손에 들고 있던 몽둥이를 던져버리고 순식간에 석목의 바로 앞까지 파고들어 피처럼 검붉어진 손을 뻗었다.
석목은 공격을 피하지 않고 일월도에 연결돼있던 실을 확 잡아당겼다.
그러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일월도가 강하게 튕겨 오르더니 풍차처럼 빙글빙글 빠르게 원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이는 금오와 석목을 모두 두 동강 낼 법한 아주 강한 기세였다.
* * *
금오는 달갑지 않았지만 고작 수련자인 석목과 동귀어진을 할 수는 없었기에 몸을 비틀어 멀리 달아나, 바닥에 떨어져 있던 금색 몽둥이를 주웠다.
쾅!
금오가 몽둥이를 휘두르자, 쏟아져 나온 금빛 검영이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는 일월도 중심에 적중했다.
한철을 첨가해 매우 단단했던 일월도는 금오의 일격에 처참하게 부셔졌다.
표정이 굳어진 석목이 다시 얇은 철실을 잡아당겼다. 석목은 다시 부러져 절반만 남은 일월도를 쥐었다.
금오는 석목이 다음 행동을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즉시 뛰어올라 금색 몽둥이를 휘둘렀다. 석목도 손에 쥐고 있던 도를 휘둘러 9개의 검영을 쐈다.
쾅!
몽둥이는 일월도와 부딪히며 살짝 흔들리더니 곧 다시 튕겨져 나왔다. 하지만 이 충격으로 반쪽짜리 일월도는 산산이 부서져 조각이 됐고, 석목은 뼈가 부러졌는지 한쪽 팔을 쭉 늘어뜨린 채 뒤로 두 걸음을 물러났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온 금오가 소매를 펄럭이며 다시 핏빛으로 변한 손을 뻗었다. 석목의 머리 쪽을 향한 공격이었다.
공격을 피할 수 없었던 석목은 다른 한쪽 팔로 주먹을 휘둘렀다.
“하하, 죽음을 자초하는 구나!”
금오는 주먹을 뻗는 석목을 보고 크게 웃으며 체내의 진기를 끌어올렸다. 이에 금오의 손은 더욱 붉어졌다.
서로의 주먹이 곧 맞부딪히려는 순간, 석목은 주먹을 한번 폈다가 다시 쥐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 1척 길이 정도 되는 비수가 나타났다.
금오의 붉은 손은 이내 날카로운 비수에 뚫렸다. 그의 손은 비수에 뚫린 그대로 비수를 쥔 석목의 손을 가격했고, 충격에 석목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석목은 나무 2그루를 관통하고 큰 바위에 몸을 박고서야 멈췄다.
왈칵 피를 쏟은 석목은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금오는 비수가 박혀 빠르게 옅어지는 핏빛 손을 보며 크게 분노했다.
“온몸 뼈를 다 가루로 만들어 주마!”
얼굴까지 시뻘겋게 된 금오가 손바닥에 박힌 비수를 뽑아내고, 손의 혈도를 짚은 뒤 흉악한 표정으로 석목을 향해 다가갔다.
석목은 양팔의 극렬한 고통을 참으며 겨우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금오를 바라봤다. 그리고 석목은 자신이 전혀 금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씰룩거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석목은 일월도가 파괴될 때 손잡이에 끼워져 있던 비수를 몰래 반대쪽 소매 속에 숨겼었다. 비수로 상대가 손을 못 쓰게 만든 뒤 다시 공격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혈적장의 위력은 석목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석목은 금오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계획은 철저히 무산됐다.
양팔도 수차례 골절되고 석목은 이제 몸에 힘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석목은 더 이상 금오에게 일말의 위협도 되지 못했다.
금오가 쓰러진 석목에게 다가가 가슴팍을 세차게 걷어찼다.
퍽!
금오의 발에 차인 석목은 창백한 얼굴로 3장 가까이 날아갔지만 가슴뼈가 골절 되진 않았다. 그리고 석목을 발로 찬 금오는 발끝에 무언가 단단한 물건이 닿은 것을 느꼈다.
“음? 품속에 뭔가 숨겼나?”
금오가 중얼거리며 다시 석목에게 다가갔다.
“오라버니를 죽이려거든 나를 먼저 죽여!”
근처 바위에서 한 소녀가 갑자기 뛰쳐나와 양팔을 벌리며 금오의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그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종수였다. 석목이 중상을 입어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곧바로 뛰쳐나온 것이었다.
“이 추한 계집! 원한다면 소원을 들어주마!”
금오가 매섭게 얘기하며 손을 들어올렸다. 금오는 후천 중기의 경지에 들어서 심후한 진기를 가지고 있기에 굳이 혈적장을 사용하지 않아도 종수의 머리 정도는 충분히 터트릴 수 있었다.
“멈춰!”
그 광경을 본 석목이 어두운 표정으로 크게 소리쳤다. 곧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결국 석목은 얼마 일어나지도 못하고 다시 쓰러졌다.
금오는 그런 석목을 보고 더욱 안심해 손에 진기를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