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현자령
종수는 바로 눈앞으로 날아드는 금오의 손을 보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두려움에 눈을 꼭 감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종수는 갑자기 제 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으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 소리를 질렀다. 귀가 다 찢어질 것 같은 거대한 소리였다.
쾅!
그리고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가격 당한 듯 금오의 가슴이 움푹 파였다. 순식간에 튕겨져 나간 그는 몇 번이나 바닥에 곤두박질치고서야 겨우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 계집도 혈맥무인이구나!”
고개를 든 금오가 선혈을 내뿜으며 놀란 얼굴로 종수를 바라봤다.
금오는 종수가 그것도 매우 높은 등급의 혈맥을 각성한 혈맥무인임을 깨닫고 크게 분노했으나, 저도 모르게 머뭇거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비참하게 죽어버린 아들 금전이 있어 도저히 이대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지금 비수에 뚫린 자신의 손바닥도 분노를 키우는데 한몫했다.
금오는 다시 흉흉한 눈빛으로 종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곧 비명소리를 멈춘 종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네놈이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3품의 혈맥무인을 죽이려하느냐?”
어디선가 갑자기 여인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흰 죽립을 쓴 여인이 종수의 앞에 귀신처럼 나타났다. 그리곤 달려드는 금오를 향해 가냘파 보이는 손을 들어 올렸다.
휙-
그녀의 손에서 휘몰아쳐 나온 한기가 순식간에 금오를 꽁꽁 얼려버렸다.
그 광경을 본 석목과 종수는 모두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여인이 죽립을 벗고 천천히 다가왔다. 가려진 얼굴이 드러나자 여인의 매우 아리따운 미모가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서른예닐곱 정도로 보이는 그녀의 인상은 매우 차가웠으나 종수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매우 따뜻했다.
“순 노인이 부탁한 일을 처리하러 나왔을 뿐인데 이렇게 훌륭한 재목을 찾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구나! 네 이름이 뭐니? 집은 어디지? 무슨 연유로 금씨 가문의 녀석에게 쫓기고 있었느냐?”
여인은 뒤의 석목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종수만 보며 상냥하게 물었다.
“종수라고 합니다. 오라버니와 함께 풍성에 살고 있었는데, 금씨 가문의 사람에게 원한을 사 밤낮으로 도망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수가 여인의 친절함에 살짝 안심하고 사실대로 대답해주었다.
“그렇다면 우리 묘음종(妙音宗)에 들어오지 않겠느냐? 본 종은 대제국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종문이란다. 수많은 제자를 두고 있으며 각종 무공비급을 갖추고 있지. 게다가 대성만 하면 전설속 경지에 오를 수 있는 벽음만파공(碧音万波功)도 가지고 있어.”
여인이 종수를 바라보며 더욱 상냥하게 말했다.
“삼대종문 중 하나인 묘음종…….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 전에 오라버니를 치료해 주실 순 없겠습니까?”
여인과 대화하던 종수가 쓰러진 석목이 떠올라 급하게 부탁을 청했다.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힘을 많이 소진했고 양 팔이 골절됐을 뿐이란다. 아! 혈적장에 당한 상처가 조금 골치 아프겠군……. 좋다, 기혈단을 주도록 하마. 복용한다면 큰 후유증은 없을 것이다.”
여인은 그제야 석목을 훑어보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소매에서 작은 병을 꺼내 쓰러져 있는 석목의 옆에 뒀다.
이내 병을 집으려던 석목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이마에도 송골송골 굵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양팔이 다 골절된 상태에서 힘을 쓰자 일순 극렬한 고통이 덮쳐온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종수가 다급히 석목에게 다가갔다. 그런 뒤 종수는 직접 병에서 붉은색 밤꽃향 단약을 꺼내 조심스럽게 석목에 입에 넣어주었다.
석목은 단약을 복용하자마자 속이 뜨거워지며 그 열기가 순식간에 사지로 퍼져가는 걸 느꼈다. 금오의 혈적장에 당한 후 계속 가렵던 팔도 갑자기 다 괜찮아졌다.
단약을 복용하고 정신이 번쩍 든 석목은 얼음조각으로 변한 금오를 보며 여인의 경지를 가늠해보았다. 종수도 그런 석목의 모습을 바라봤다.
여인은 종수의 반응을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석목의 얼굴을 몇 번 훑던 여인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기혈단은 본 종 특유의 단약이다. 복용하면 내상, 외상을 치유하는데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무공 증진에도 큰 도움이 된다.”
“감사합니다!”
종수가 석목의 안색이 좋아지는 것을 보고 여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괜찮다면 네 혈맥을 확인해 보아도 될까? 어떤 혈맥인지 짐작은 가지만 혹시 모르니 정확히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여인이 말했다.
“좋아요. 얼마든지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종수가 석목을 한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마침 내게 혈여의(血如意)가 있다. 다른 법기보다 더 정확하게 혈맥을 확인 할 수 있을 거야. 이곳에 피를 한 방울 떨어뜨리렴.”
여인이 기뻐하며 소매 속에서 곧바로 흰색 여의를 꺼냈다. 곧 앞으로 걸어 나간 종수는 손을 깨물어 여의에 피를 떨어뜨렸다.
여의는 옅은 금색 빛을 발하며 매우 은은하게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도 나타났다.
여인은 고개를 숙여 문자를 자세히 보더니 다시 기쁜 얼굴로 말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구나. 네가 각성한 혈맥은 3품의 혈맥으로 본 종의 창시자가 각성했던 봉음혈맥(凤音血脉)이란다. 이 혈맥을 가진 사람만이 벽음만파공을 가장 높은 경지까지 수련할 수 있지.”
“제가 3품의 혈맥을 각성했다고요?”
종수가 물었다.
“정식으로 소개하마. 난 묘음종 표묘각(飘渺阁)의 각주인 엽홍약이라고 한다. 묘음종의 대장로인 내 스승님을 대신해 너를 그 분의 제자로 받으려 한다. 네가 동의한다면 나와 같은 항렬의 제자가 될 것이고, 네 또래의 제자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높은 지위와 신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엽홍약이 종수의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제가 그 대장로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면 선배님처럼 강해질 수 있나요?”
종수가 물었다.
“벽음만파공을 수련한다면 소성의 경지에 오르기만 하더라도 선천무인에 버금갈 힘을 가질 테니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질 것이다.”
엽홍약이 즉시 대답했다.
“어차피 갈 곳 없는 신세긴 하나……, 오라버니께선 어찌했으면 좋겠어요?”
종수도 엽홍약의 말에 가슴이 뛰었지만, 석목에게 먼저 의견을 구했다.
“선배님은 선천무인이십니까?”
석목은 잠시 침묵하다, 결국 궁금하던 것을 물어봤다.
“보는 눈이 있구나. 그래, 난 선천무인이 맞다.”
엽홍약이 거만하게 대답했다.
“대제국에 선천무인은 몇 명밖에 없다고 들었습니다.”
석목은 잠시 놀라워하다 다시 주저하며 물었다.
“속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선천무인은 일부분일 뿐이다. 대부분 조정을 위해 일하는 소위 호국무인이라 불리는 자들이지. 우리 종문의 고수들은 대제국이 멸망 위기에 봉착하거나 속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만 나선다. 대제국의 황실조차 우리 3대 종문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어느 가문이든 쉽게 멸족 시킬 힘을 가지고 있지.”
엽홍약이 말했다.
“그렇다면 진정한 무인은 모두 종문에 있겠군요.”
석목이 매우 놀라워하며 물었다.
“맞다. 다른 두 나라 상황도 같아. 종수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졌으니 묘음종에 들어오기만 하면 선천무인이 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엽홍약이 대답했다.
“그럼 반드시 묘음종에 가야겠군요. 종 낭자, 제의에 응하는 게 좋겠어요.”
석목이 숨을 길게 내뱉은 뒤, 종수를 보며 말했다.
“묘음종에 가겠습니다. 대신 오라버니도 함께 갈 수 있게 해주세요.”
종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엽홍약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기대감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 조정보다도 강한 종문이라니, 석목 또한 가능하다면 반드시 들어가고 싶었다.
엽홍약은 종수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다른 요구라면 들어줄 수 있겠지만 그것만은 안 될 것 같구나. 혈맥무인이거나 자질이 뛰어나 본 종의 심법을 수련하기에 적합한 사람을 제외하곤 이제껏 남자 제자는 받은 적이 없단다. 때문에 종문의 장로부터 내문제자까지 전체를 찾아도 사내는 매우 적지. 내가 아무리 표묘각 각주라도 그 관례를 쉽게 깨뜨리긴 힘들 것 같다.”
“오라버니도 혈맥무인입니다!”
종수가 엽홍약의 답을 듣고 황급하게 말했다.
“뭐라고? 혈맥무인? 그럼 무슨 혈맥인지 한번 확인해 보자꾸나.”
엽홍약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확인할 필요 없습니다. 석후폐맥을 각성했습니다. 분명 선배님의 눈에 차지 않을 겁니다.”
석목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석후폐맥? 그 말이 사실이라면 본종에 들어올 일말의 희망조차 없다.”
엽홍약이 정색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묘음종에 가지 않겠습니다. 오라버니가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저 혼자 종문에 들어가겠다고 오라버니를 버릴 순 없습니다.”
종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종 낭자, 그러지 마세요.”
석목이 감동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종수는 고개를 젓고 간청하는 눈망울로 엽홍약을 바라봤다.
엽홍약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무언가 떠올라 다시 석목과 종수에게 물었다.
“참! 내가 깜빡 잊었구나. 너희들 중 누가 현무종(玄武宗)의 현자령(玄子令)을 가지고 있지?”
“현무종의 현자령이라니요?”
석목과 종수 모두 어리둥절했다.
“아니다. 내가 직접 찾아보마.”
화악-
엽홍약이 잠시 무언가 기운을 느끼는 듯하다, 소매에서 노란 부적을 꺼내 들었다. 그 부적은 바람에 한번 펄럭거리다 저절로 불이 붙어 타들어갔다.
갑자기 석목의 가슴팍에서 어떤 물건이 진동하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이건……, 종 낭자, 이 물건 좀 꺼내주세요.”
석목이 고개를 숙여 그곳을 확인한 뒤 종수에게 말했다. 종수는 곧 석목의 가슴팍에서 한 물건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칠흑같이 검은 철판이었다. 또한 표면에는 굉장히 심오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건 처음 사찰에서 종수를 만났을 때, 처치했던 강시가 소지하고 있던 물건이었다. 이건 석목의 목숨을 두 번씩이나 구해주기도 했다.
사유지 논밭에서 금전이 급습했을 때 가슴이 뚫리는 걸 막아준 적이 있었고, 바로 방금 전 금오에게 가슴을 걷어차였을 때도 흉골이 으깨지는 걸 막아주었었다.
‘이것이 현자령인가?’
석목이 속으로 생각했다.
엽홍약은 그 철판을 한번 훑어본 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손 노인이 말한 현자령이 맞는 듯하구나. 어디서 이 물건을 얻었지?”
석목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강시를 처치했던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종수도 옆에서 열심히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 확실한 것 같구나. 강시공을 수련한 손 노인의 제자가 산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무종의 혼등(魂灯)이 꺼졌다고 한다. 한데 마침 이 현자령이 묘음종이 관할하는 지역 내로 들어오자 손 노인의 모령(母令)이 반응을 했어. 하여 그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게 됐지.
보아하니 그 제자는 경지를 뛰어넘지 못하고 주화입마에 빠져 강시가 된 것 같구나. 하지만 덕분에 네 오라버니가 갈 곳이 생겼다.”
엽홍약이 빠르게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고 옅게 웃으며 설명했다.
“그 말은…….”
종수가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물었다.
“우리 묘음종은 남자제자를 받지 않지만 현무종은 그렇지 않단다. 게다가 현무종에는 신체를 강화하는 심법도 많이 가지고 있어. 비록 석후폐맥이라 하더라도 뛰어난 신체강도를 가지고 있고, 내문제자의 현자령도 찾아주었는 데다가 내가 직접 추천까지 한다면 현무종도 틀림없이 받아 줄 것이야.”
엽홍약이 웃으며 설명했다.
“오라버니와 헤어질 수밖에 없는 거네요…….”
종수가 잔뜩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현무종에 가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석목은 단호하게 말했다.
“좋다. 추천서와 안내부적을 줄 테니 소주(昭州)의 개양성(开阳城)부근 강변 나루터에 도착해 부적에 불을 붙이거라. 그럼 현무종에서 너를 데리러 사람이 올 것이다.”
엽홍약은 종수가 다른 말을 할 틈도 없이, 현자령과 부적을 석목에게 전해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석목은 엽홍약에게 감사인사를 하려했지만, 금세 불편한 얼굴로 몸을 얼마 움직이지 못했다.
“네가 팔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잠시 잊었구나. 이왕 도와주기로 한 김에 끝까지 도와주도록 하마.”
그런 석목의 모습을 본 엽홍약이 푸른 부적 2장을 꺼내 석목의 양팔에 붙여주었다. 곧 부적은 푸르게 빛나며 겉에 그려진 문양이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석목은 부러졌던 팔이 아주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점점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이건…….”
석목은 손가락을 움직여보다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많은 영석을 들여 구매한 회춘부(回春符)지만, 너에게 선물한 셈 치겠다. 종수야, 급한 일이 있으니 어서 떠나도록 하자.”
엽홍약은 석목에게 빠르게 몇 마디 하더니 종수에게 출발을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