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금소채
“묘음종이 남자제자를 잘 받진 않지만 종문 내의 선천무인이 추천을 한다면 가능했을 텐데요.”
소녀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현무종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낭자는 종문 사정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나보군요.”
석목이 물었다.
“저희 한씨 가문 조상이 현무종의 외문제자였거든요. 뜻하지 않게 속세에 돌아와 자신의 가문을 세우게 됐지만요. 제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도 많든 적든 현무종과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 제 이름은 한채희에요. 석목 오라버니 맞죠?”
한채희가 석목을 향해 어여쁘게 웃었다. 한채희는 어린 소녀였지만 벌써부터 몸 선이 아주 남다르게 아름답고, 행동 하나하나도 아주 고혹적이라 몇몇 소년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소녀를 힐끗힐끗 훔쳐보고 있었다.
그러다 한채희와 석목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일부 소년들이 석목을 향해 곱지 않은 눈빛을 보냈다. 석목의 체격이 매우 크고, 칼과 궁을 지닌 모습이 이처럼 강해보이지 않았더라면 아마 누군가 벌써 시비를 걸었을지도 몰랐다.
석목은 한채희와 몇 마디 더 얘기를 나누다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시간이 흐르자 곧 선실의 아이들도 점차 대화의 흥미를 잃어갔고 이내 대부분이 석목처럼 바닥에 앉아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때, 회색 옷을 입은 사람들 몇 명이 들어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식사를 배식해주었다.
하지만 석목은 그 음식을 먹지 않고 품속에서 딱딱하게 굳은 만두를 꺼내 천천히 씹어 먹었다.
나눠준 음식을 먹지 않는 석목에게 더욱 호기심이 생긴 한채희는 다시 계속 질문을 이었다. 석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질문에 하나둘 다 대답을 해주었다.
그 후 2각(*二刻: 30분) 정도가 흐르자, 밥을 먹던 사람들이 돌연 하나둘씩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두 잠들자 곧 회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방에 들어왔다. 그들은 식기를 치우고 조용히 나간 뒤 자물쇠로 단단히 문을 걸어 잠갔다.
그들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바닥에 누워있던 한 소년이 갑자기 일어나 굳게 닫힌 문을 보고 말했다.
“전 마비운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분은 다 일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마비운이라는 소년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전 음식을 먹지 않았어요.”
“안내자들이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른들이 말했던 것과 너무 달랐거든요.”
“흥, 밥을 먹긴 했지만 고작 미약 따위가 날 어떻게 할 수는 없지.”
바닥에 누워 있던 사람들 중 두 소년과 한 소녀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소년 중 한 사람은 장발머리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뜬 소녀는 바로 한 채수였다.
줄곧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던 석목은 대답을 하지 않고 눈만 떴다.
피부가 희고 얼굴이 준수하게 생긴 마비운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석목을 훑어보다가 이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들은 현무종의 안내자가 아니에요.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분명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모두 기절한 줄 알고 있을 테니 경계를 늦춘 지금이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예요. 저와 함께 떠나겠습니까?”
“맞아요. 저들은 분명 현무종의 적일 거예요. 저 역시 일찌감치 탈출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함께하죠.”
한채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다른 두 소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도 함께 가요.”
한채희가 석목을 향해 말했다.
“아닙니다. 전 이곳에 남아 있겠어요. 그리고 충고하자면 당신들도 지금은 얌전히 있는 것이 좋을 거예요.”
석목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혹시 무언가 발견했나요?”
석목의 말을 듣고 한채희가 순간 하얘진 얼굴로 급하게 물었다.
다른 두 소년도 표정이 살짝 변했다.
석목은 더 이상 말하기 싫은 듯 고개만 좌우로 흔들었다.
“흥! 겁쟁이들 같으니라고. 떠나기 싫다면 모두 여기에 남아있으면 되겠군. 한 낭자, 같이 가시죠.”
마비운이 석목을 하찮다는 듯이 쳐다보곤 한채희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마비운 오라버니,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어떨까요.”
한채희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제가 먼저 나갈 테니 낭자는 나중에 따라와요.”
마비운이 살짝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 후, 그는 소매에서 날카로워 보이는 비수를 꺼내 바로 아래의 나무 바닥을 강하게 내려찍었다.
깡!
비수가 바닥에 닿는 순간, 금속에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며 비수가 곧바로 튕겨져 나왔다. 마비운은 깜짝 놀라 비수로 찍은 곳을 깎아봤다.
“철목이군. 그것도 동쪽 바다 철형도(铁荆岛)의 백년철목(百年铁木).”
마비운은 비수로 급히 방의 이곳저곳을 열심히 찍어봤지만 예외는 없었다.
“그만해라. 이 배는 백년철목만을 사용해 건조했다. 모든 방을 찔러보더라도 어떠한 틈도 찾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때, 문 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열린 문 앞에 파란 옷의 사내가 팔짱을 낀 채로 느긋하게 서서, 마비운을 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저…….”
마비운은 깜짝 놀라 급히 비수를 뒤로 숨기고 일어나 변명을 하려 했다.
하지만 사내는 듣지 않고 다짜고짜 마비운을 향해 팔을 뻗었다.
퍽!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져 날아간 마비운은 뒤에 있는 벽에 부딪히며 입과 코로 피를 쏟아냈다. 가슴이 움푹 함몰된 그는 일격에 사망한 듯 보였다.
“명령을 위반하면 처벌한다 했었지. 여봐라! 시체를 끌어내 강에 던져라.”
파란 옷의 사내가 냉혹하게 지시했다.
그러자 밖에서 회색 옷의 사람 2명이 걸어와 마비운을 데려갔다.
파란 옷의 사내는 악랄한 눈빛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을 한번 훑어 본 뒤 웃으며 떠났다. 곧이어 밖에서 다시 문이 잠기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제히 다 일그러졌다.
* * *
그로부터 반나절이 지났다.
마비운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소년소녀는 함부로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석목은 여전히 벽에 기대 앉아 눈을 감은 채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고 한채희는 마비운이 죽은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줄곧 석목의 곁에만 붙어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 흐른 뒤, 배가 갑자기 흔들리더니 근처에서 어렴풋이 나이 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평! 감히 대제국의 국경을 넘어 들어와 본 종의 안내자에게 상처 입히다니!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마라!”
그 사내가 말을 마친 순간, 폭음이 울리더니 선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누가 왔나 했더니 조 형이 직접 오셨군요. 분명 같이 온 사람이 있을 텐데 어찌 부르지 않는지요.”
파란 옷을 입은 사내의 차분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렇게 말하니 사양하지 않고 나서겠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맑고 차가운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천기 네놈이냐?”
계속 차분하던 사내가 새로 나타난 사람을 보고 엉겁결에 소리를 질렀다. 소리만으로도 굉장히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다.
“하하, 영평. 상상도 못했나보구나. 여 사제가 마침 근처에 있어 내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왔지. 골호를 불러내라. 이번엔 반드시 너희 흑마문을 혼내줘야겠구나.”
나이 든 소리의 주인공이 하하, 웃었다.
“성계술사인 여천기가 왔으니 이 골호가 당연히 가르침을 청해야지요.”
골호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에서도 여천기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해 보였다.
곧 파공성과 폭발음이 연달아 나며 누선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마치 거대한 풍랑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현무종의 사람이 왔구나.”
“다행이야! 살 수 있겠어.”
두 소년이 기뻐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석목 역시 기쁜 표정을 지었다.
“여천기, 우리가 네놈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마. 하지만 제자들을 산 채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말거라. 경수부(惊水符)의 위력을 맛보여주마!”
잠시 후, 파란 옷을 입은 사내의 허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풍랑이 휘몰아쳤다. 거친 풍랑에, 누선은 한쪽 면에 파도를 크게 맞고 점점 강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 배가 뒤집히겠어.”
놀란 석목과 소년소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벽을 꽉 잡았다.
하지만 마취약을 먹고 기절한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미끄러져 굴러다녔다. 몇몇 운이 없는 사람들은 탁자나 의자에 부딪혀 머리를 다치거나 피를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마취약이 얼마나 강력한지 중상을 입은 사람들도 전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종공밀전에 적힌 마취약보다 효과가 몇 배는 더 강한 듯했다.
“악랄한 수를 쓰다니. 하지만 어디 가만히 둘까보냐! 현무번천(玄武翻天)!”
누선이 넘어가려 하자 다시 나이 든 사내의 강력한 외침이 들려왔다.
쾅!
선체 반대편에서 큰 소리가 울리고 누선이 크게 흔들거리더니 다시 중심을 바로잡았다.
그 광경을 본 파란 옷의 사내가 허둥지둥 큰 목소리로 말했다.
“현무경(玄武劲)을 이 정도 경지까지 수련했을 줄이야! 다음에 다시 만난다면 그때야말로 가만두지 않겠다!”
또 파공성이 한 번 울리더니, 파란 옷의 사내와 골호는 도망을 쳤다.
* * *
곧 아이들이 있는 방이 열리고 20대로 보이는 한 청년이 들어왔다. 금색 옷을 입은 그는 아주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이 방엔 깨어 있는 사람이 특히 많구나. 잘했다! 모두 갑판에 올라가도록. 사람 수를 다시 헤아릴 것이다. 참, 기절한 사람들에게 이 단약을 먹여라.”
준수한 얼굴의 청년이 네 사람을 보고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매우 맑은 목소리를 가진 그는 바로 앞서 성계술사라 불리었던 여천기였다.
말을 마친 여천기가 곱슬머리 소년에게 작은 병을 던졌다. 병을 받아 들고 공경하게 대답한 소년은 기절한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단약을 먹여주었다.
“여 선배님, 제가 흑마문의 계획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배의 밑바닥에 풍화문(风火门)의 신화뢰(神火雷)를 설치한 것 같습니다.”
한채희가 밖으로 나가려던 여천기에게 황급히 말했다.
“뭣이? 그것이 어디에 있느냐? 넌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여천기가 한채희의 말을 듣고 놀라 홱, 몸을 돌렸다.
“선배님, 시간이 없습니다. 우선 신화뢰가 숨겨진 위치를 가르쳐드릴 테니 나머지는 돌아와서 얘기해요.”
한채희가 몇 걸음 떨어진 위치에 서서 말했다.
“좋다, 우선 조 사형에게 가자꾸나.”
여천기가 한채희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여천기가 팔을 휘둘러 한채희를 매섭게 내던졌다.
순식간에 옆문으로 내던져진 한채희는 머리가 막 문에 부딪히려 할 때 갑자기 사라지더니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천장 위에 나타났다.
소녀는 발은 위로, 머리는 아래로 향한 자세로 거꾸로 서서 깔깔, 웃었다.
여천기는 한채희를 무섭게 쳐다보며 다시 한 번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팔에서 반 척 길이의 검은 뱀이 날아가더니 일순 바닥에 처박혔다.
“흑마사! 악독한 수를 쓰는구나! 너는 분명 흑마문의 금소채렸다!”
여천기가 바닥의 검은 뱀을 보고 분노에 차서 말했다.
“내 정체를 순식간에 알아채다니, 대제국에서 월계술사(月阶术士)의 경지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천재답구나! 하지만 조심성이 너무 부족하구나. 내 아가의 이빨 맛이 어떻지? 흑마사에 물렸으니 앞으로 삼사년은 힘들 것이다.”
한채희가 웃으며 말했다.
“골호, 영평, 겁도 없이 다시 돌아왔구나!”
바로 그때, 누선 밖에서 다시 진동소리가 들리며 조 사형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