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흑마13봉(黑魔十三峰)
여천기가 팔을 크게 휘두르자 방안에 눈조차 뜨기 힘들 정도의 광풍이 일었다. 이어 그가 손을 뒤집자 여천기의 모습이 점차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곧이어 날카로운 채찍소리가 들려오더니 갑자기 방안의 광풍이 멈췄다.
어느새 바닥에 내려온 금소채는 손에 푸른 가시가 박혀있는 검은 가죽채찍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여천기가 서있던 자리는 채찍에 깊게 파여 있었다.
석목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마비운이 비수로 미친 듯이 내려찍어도 멀쩡했던 바닥이 그녀의 채찍질 한 번에 깊이 파인 것이었다.
“풍행술사(风行术士)는 정말이지 재미없어. 조금 불리하다 싶으면 누구보다 빠르게 도망간다니까.”
금소채가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 채찍이 다시 사라졌고, 그녀는 몸을 돌려 소매에서 옥패(玉佩)를 꺼내 깨뜨렸다. 이내 검은 기운이 휘몰아치며 그녀의 몸을 감싸자, 소녀의 몸이 순식간에 관능적인 몸매를 가진 여인으로 변했다.
금소채의 얼굴은 그전과 비슷했지만 더욱 아름다워졌고,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육감적으로 변한 몸매는 잠시도 사내들의 시선을 뗄 수 없게끔 만들었다.
“어때? 그 전보다 더 예쁜 것 같니? 깔깔깔, 너희 둘이 전부터 나를 훔쳐보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단다.”
금소채가 요염한 눈빛으로 두 소년을 바라보자,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소년들의 안색이 급격하게 창백해졌다.
석목은 입술을 굳게 닫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곧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멈추고, 파란 옷의 사내와 호랑이 가면을 쓴 골호가 걸어 내려왔다.
“금 사매, 사매 덕분에 두 성계술사를 상대할 수 있었다네.”
파란 옷의 사내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골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금소채만 적나라하게 쳐다보았다.
“사부님의 명대로 행동한 것뿐이에요. 여천기는 흑마사에 물렸으니 살아남더라도 분명 크게 앓을 거예요.”
“수련을 시작하고 채 30년도 되지 않아 성계술사의 경지에 오른 여천기는 세 나라를 통틀어도 두 손가락 안에 드는 술법의 천재지. 그의 수련 속도를 최소 반년은 늦추었으니 사매가 본 문에 큰 공을 세운 것이네.”
파란 옷의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골 사형,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은 이 사매를 원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원한다면 바로 사부님께 혼담을 꺼내도 좋아요.”
금소채가 요염한 눈빛으로 골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금 사매가 재밌는 말을 하는구나. 난 사매를 친동생처럼 생각한다네.”
골호는 황급히 시선을 돌려버렸다.
“겁쟁이! 현무종의 추격자들을 물리치긴 했지만 아직 대제국의 국경 안쪽이에요. 아직 안심하긴 이르니 어서 출발하죠! 흑마문으로 복귀할 때까지는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어요.”
그들은 몇 마디를 더 나누다 방을 나섰고, 방문은 다시 밖에서 굳게 잠겼다. 석목과 두 소년은 그들이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숨을 길게 토해내며 긴장을 풀었다.
바로 그때, 정신을 잃었던 아이들이 신음하기 시작했다. 여천기가 준 단약이 효과가 나타난 듯했다.
“석 형제가 저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주겠나? 현무종은 포기하고 흑마문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을 듯하네. 어쩌면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르지.”
장발의 소년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흑마문에 대해서 좀 물어 보고 싶습니다. 보아하니 흑마문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별로 없는 듯해 보여서요.”
석목이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발의 소년과 곱슬머리 소년은 서로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운을 뗐다.
“말 못할 이야기도 아니지. 흑마문은 염국의 풍화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현무종과도 실력이 막상막하인 곳이라네. 각국 제자들을 빼앗는 일은 이 전부터 여러 번 발생했었지…….”
* * *
꼬박 한 달 보름이 지난 지금, 이곳 염국 북부에 위치한 늪지에선 10마리가 넘는 거대한 동물이 석목과 100명이 넘는 소년소녀들을 나눠 태운 채 진흙 위를 나아가고 있었다.
네 다리에서 노란 빛을 뿜어내는 이 거대한 동물은, 육중한 몸집에도 늪지엔 조금도 빠지지 않고 마치 평지를 걷듯 평온하게 걸었다.
파란 옷의 사내와 골호는 가장 선두에서 거대한 도마뱀을 타고 있었는데, 금소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일행의 앞에 갑자기 짙은 안개가 나타났다. 안개는 알록달록한 빛깔로 매우 아름다웠다.
파란 옷의 사내는 안개를 보고 손을 들었고, 그 손짓에 뒤따라오던 거대한 동물들이 모두 멈춰 섰다.
골호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중얼거리다 안개를 향해 달려들었다.
휙-
골호가 꺼내든 물건에서 흰색 빛이 튀어 나와 안개를 갈랐다.
안에선 통로가 나타났고, 파란 옷의 사내는 타고 있던 도마뱀을 재촉해 먼저 통로에 들어갔다. 그 뒤를 거대한 물소 무리가 따라갔다. 그리고 골호는 후방을 엄호하듯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 * *
그 후, 반나절이 흐른 이곳은 기괴하게 생긴 나무가 잔뜩 자란 밀림 속이었다. 덩치 큰 흑의의 노인은 석목과 장발의 소년을 들고 나무 사이를 바람 같이 달리고 있었다.
석목은 그에게 잡혀 그저 먼 곳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석목의 시야에 어렴풋이 멀지 않은 숲의 끝자락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흑색 산봉우리 13개가 보였다.
“허허, 잘 보거라. 본 문이 위치한 흑마13봉이다. 저곳에 들어가면 너희는 이제 비로소 우리 흑마문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 되면 현무종도 절대 너희를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없지.”
흑의를 입은 노인이 흉측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의 뒤로 또 멀지 않은 곳에선 흑의를 입은 또 다른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손에도 너나할 것 없이 소년소녀들이 들려 있었다.
* * *
잠시 후, 석목은 흑의의 노인에게 들려 산봉우리 아래 골짜기에 도착했다.
산골짜기에 진입하자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많은 건축물들이 보였다. 그중엔 높이가 십 몇 장에 달하는 아름다운 누각도 있고 2~3장 높이의 초라한 돌집도 있었는데, 높은 건물일수록 산봉우리와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다. 작은 마을 같은 그곳엔 각자 다른 복장의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었다.
흑의를 입은 사람들은 석목과 아이들을 산골짜기의 중심에 위치한 광장에 데려다 놓고 말없이 사라졌다.
100명이 넘는 소년소녀들은 자신들을 보고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곳엔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모두 보통사람들에겐 볼 수 없는 다소 사나운 느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석목 일행을 대가만 치르면 살 수 있는 물건을 보듯 바라봤다.
“모두 꺼져! 새로 입문하는 제자를 보는 것이 처음이더냐? 보긴 뭘 봐!”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일제히 갈라지며, 안에서 상의를 벗은 거한이 나타났다. 그는 2장 길이의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주 형님이 임무를 맡았구나.”
“주 형님, 괜찮은 녀석이 있다면 우리 이화회(离火会)에 꼭 보내주십시오.”
“저번에도 너희 이화회에서 먼저 2명이나 골라가지 않았느냐. 이번엔 우리 철석방(铁石帮)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흥, 술법이 뛰어난 제자가 있다면 무조건 우리 존영각(尊灵阁)에서 데려갈 것이다.”
사람들이 거한을 향해 일제히 인사하며 말했다.
“소문으로는 저들은 염국의 사람이 아니라 조 사숙이 대제국에서 데려온 이들이라고 하더군.”
“뭣이? 대제국의 사람들이었다니! 얼굴이 낯설게 생겼다 했어!”
“조 사숙이 손을 썼다면 분명 현무종에 들어가려던 자들이겠군. 저번에 현무종에게 입문 제자들을 강탈당한 것에 대한 복수겠지.”
“그럼 급할 필요는 없지. 우선 저들이 본 문 규칙에 적응하길 기다리자고.”
모여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광장에 있는 소년소녀들이 대제국 출신이라는 것을 알곤 낮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다 흩어졌다.
석목은 그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좋다. 시끄러운 놈들이 모두 떠났구나. 드디어 너희들을 제대로 환대할 수 있게 됐어. 너희들이 대제국 사람이던 염국의 사람이던, 원했던, 원치 않았던, 일단 흑마문에 들어왔으니 이제부터는 본 문의 제자다.
본 문에는 이미 위로는 장로와 각 봉주, 아래로는 입문 제자와 하인까지 각국의 사람들이 모두 섞여 있다. 이전에 다른 종문과 어떤 관계가 있었던지 본 문에 들어온 이상 자신을 흑마문의 제자라고 생각해야만 한다.
만약 본 문에 손해를 불러일으킨다면 그 정도에 따라서 가벼운 자는 무공을 폐할 것이고 심각한 자는 생명을 앗아갈 것이다.”
거한은 아이들을 훑어보며 말한 뒤 들고 있던 몽둥이를 바닥에 내려놨다.
쾅!
광장 바닥의 돌이 조각나 흩어졌다.
“귀하께서는 우리와 같은 신입 제자를 전문적으로 책임지는 분이십니까?”
아이들 중 누군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오해하지마라. 흑마문은 신입 제자를 위해 보모 짓을 하지 않는다. 내 이름은 주광이다. 흑마문 제자 중 한 명이지. 이곳에 온 것은 너희를 공덕전(功德殿)까지 안내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허가 없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번 한 번뿐이다. 다시 한 번 마음대로 질문했다가는 얼굴을 깨부숴 버릴 테니 주의해라. 너희들은 내가 하는 말을 집중해서 듣기만 하면 된다. 만약 따르기 싫다면 언제든 덤벼도 좋다. 본 문은 강자를 존중하고 강한 자의 말에 따른다.”
거한이 흉측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말을 듣고 소년소녀들은 대부분 표정이 어두워졌다.
석목도 누선에서 흑마문이 적자생존의 집단이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적나라한 정도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광장의 모인 이들은 거한의 폭력적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누구도 나서서 말대꾸하지 못했다.
주광은 그 모습을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어서 말했다.
“너희들은 아직 눈치를 봐야하는 신분이니 주의해야하는 지역을 대강 가르쳐 주겠다. 내가 안내를 하며 맡은 임무 중 하나기도 하지. 잘 새겨듣지 않는다면 한동안 힘들 것이다.
우리 흑마문은 사실 대륙의 중심에 위풍당당하게 위치한 천마종의 분파다. 삼대 마신중 하나인 흑염마신(黑炎魔神)을 숭배하지.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문과 다르게 내문제자니 외문제자니 하며 나누지 않는다.
자질이 좋다거나 나쁘다 해서 특별한 대우를 하거나 무시하지도 않는다. 더 심오한 무공을 얻고자 하거나 높은 지위 혹은 신분을 얻고자 한다면 상대방을 짓밟아 우수함을 증명해야한다.
바꿔 말하면 본 문은 제자들 간의 싸움을 장려한다. 대결을 하던 기습을 하던 허가범위 내에서 행동한다면, 본 문의 선배들은 절대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너희들이 실력이 뛰어나 선천무인의 눈에 든다면 제자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본 문의 많은 자원을 투자 받을 수 있다.
본 문은 석 달에 한 번 작은 규모의 비무 대회인 순위전를 진행하고, 1년에 한 번 큰 규모의 비무 대회인 등급전을 진행한다.
대회에서 걸출한 성적을 이룬 사람은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고, 각종 단약과 심법을 상으로 받는다. 도태된 사람은 지원받는 자원이 줄어들고 각종 노역을 떠맡게 되지. 실력이 강하다면 언젠가 13봉주에게 도전하는 것도 전혀 불가능 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