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길을 막다
“본 문이 서로 싸우는 것을 장려한다지만 반드시 준수하여야만 하는 규칙도 많이 존재한다. 이따가 너희에게 보급품과 함께 규정이 적힌 수첩이 지급될 것이다. 그 규정이 언젠가 너희들의 목숨을 한 번 쯤은 구해줄 수도 있으니, 전부 다 외우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다.
막 본 문에 입문한 너희들이 다른 선배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따라서 너희는 1년간 비무 대회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고, 누구도 너희에게 도전을 할 수 없도록 보호 받는다.
만약 누군가가 너희를 핍박한다면 집법당(执法堂)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너희 본인이 원했거나 증거가 없는 경우에는 그럴 수가 없겠지.”
주광이 마지막 말을 하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광장에 모인 소년소녀는 현무종에게 선택 받은 총명한 아이들이라 주광의 말을 모두 이해하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본 문의 제자는 갑급, 을급, 병급 세 등급으로 나뉘고 각 등급에서 다시 순위가 나뉜다. 등급과 순위에 따라 매달 받는 지원의 정도도 찬차만별이지.
석 달에 한 번 진행하는 순위전에서는 등급 내 순위변경만을 두고 다툰다. 1년에 한 번 진행하는 등급전에서는 등급과 상관없이 도전을 할 수 있다. 모든 신입 제자는 가장 낮은 병급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너희가 병급의 가장 낮은 순위라 하더라도 더 밑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본문에는 보통 제자 외에도 잡역을 하는 하인들이 있다. 그중에 실력이 비범한 자들이 꽤 있지. 매년 등급전에서 하인 중에 가장 강한 30명과 병급 제자 중 가장 순위가 낮은 30명을 교체한다. 1년 후에 아마 너희들 중 누군가는 보통 제자의 신분을 잃고 지위라고는 전혀 없는 하인이 되겠지.”
주광의 말을 들은 석목은 매우 놀랐다. 규정이 이렇게 가혹하니 아무리 게으른 사람이라도 필사적으로 수련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필요한 정보는 다 말했다. 순위와 도전에 관한 사항은 돌아가 규정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너희에게 질문을 3가지만 받아 상세하게 대답해 주겠다. 궁금증이 있는 자는 물어도 된다.”
주광이 턱을 만지며 말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주 사형은 어느 경지에 올랐고, 어떤 등급에 속해있습니까? 그리고 순위는 몇 위인가요?”
무리 중의 한 소년이 큰 소리로 물었다.
질문을 들은 석목은 정신을 집중했다. 주광의 대답을 통해 흑마문의 대략적인 수준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허허, 좋은 질문이구나. 가르쳐주지. 나는 후천중기의 경지에 올랐고 을급 49위다.”
주광이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본 문의 제자는 총 몇 명입니까? 각 등급에는 몇 명의 제자가 있죠?”
가녀려 보이는 소녀가 물었다.
“각 등급마다 인원수는 큰 차이가 있다. 갑급 제자는 10명으로 지위는 다른 종문의 직계 제자에 해당한다. 을급 제자는 108명, 병급 제자는 자세하게 알아보지 않았지만 2000명 정도 되겠구나.”
주광이 턱을 만지며 대답했다.
“주 사형, 질문이 있습니다. 본 문에서 혈맥무인에게 해주는 특별한 대우가 있습니까?”
석목이 물었다.
그의 질문을 들은 사람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주광을 쳐다봤다.
“특별한 대우? 본 문에 있는 봉주 13명과 대장로 8명, 부문주 2명 중 혈맥무인이 몇 명이나 될 것이라 생각하나? 고작 3명이다. 본 문에서 가장 강한 대장로도 혈맥무인이 아니다. 물론 혈맥무인의 천부적인 능력을 본 문에서도 아예 무시하지는 않는다.
매년 등급전에서 선천무인들이 자질이 좋은 사람을 수제자로 받아들이곤 하는데 그중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게 혈맥무인이다. 그리고 본 문에는 혈맥무인을 위해 설립한 혈경각(血经阁)이 있다.
그곳엔 혈맥무인이 수련할 수 있는 특별한 무공도 있고, 다른 일반 무공보다 흑염령 절반 정도로도 교환이 가능하다.”
주광이 대답했다.
“그렇군요. 사형의 친절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끝났다. 저 돌집이 보이느냐? 저곳이 바로 너희 신입 제자들이 거주할 곳이다. 절반 정도는 비어 있으니 지낼 곳은 직접 고르면 된다. 그 전에 우선 의복과 1년분의 보급품을 나눠주마.”
주광이 산봉우리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있는 작은 건축물들을 가리키며 말한 뒤 떠났다.
* * *
반각 후, 주광이 다시 돌아와 아이들에게 배낭을 하나씩 나눠주며 차갑게 말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충고하지. 모든 자원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매달 지급되는 흑염령이다. 그것이 있어야만 원하는 무공과 맞바꿀 수 있다. 흑염령이 없다면 앞으로 남들에게 유린당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말을 마친 주광이 어깨에 몽둥이를 메고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다.
석목은 배낭을 보고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주광이 가리킨 돌집이 밀집된 구역을 향해 걸어갔다.
* * *
돌집을 향해 걷던 석목은 흑의를 입은 사람 8명이 그 구역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막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렴풋이 먼저 도착한 이들이 그들과 대치하며 논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통행료로 흑염령 1개를 내놓으라고?”
석목이 계속 다가가자 그곳의 상황이 점점 더 확실히 보이기 시작했다.
길을 가로막은 사람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으로 보였고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사람은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이내 그 우두머리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렇다. 며칠 동안 우리가 너희의 방을 청소했으니 청소비를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를 기만하는 것이냐? 이미 주 사형에게 흑염령의 가치를 들었는데 어찌 고작 청소비로 흑염령을 요구한단 말이냐. 게다가 누가 너희더러 청소를 해달라고 한 적이나 있느냐?
계속 길을 막고 있겠다면 집법당에 찾아갈 것이다! 1년 동안 아무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모를 거라 생각하지마라!”
한 소년이 말했다.
“집법당에 찾아가겠다고? 너희들은 집법당의 사형들을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들이 이런 사소한 일에 관여나 할 것 같으냐. 게다가 우리가 언제 너희를 건드렸지? 우린 그저 이곳에서 무공을 연습하려는 것뿐이다. 맞는다면 조심하지 않은 너희 스스로를 탓해야지. 정 흑염령을 주기 싫다면 대신 내 주먹을 한 번 받아도 된다.”
청년이 소년의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주먹을 한 번 받아내기만 하면 된다고?”
그 소년이 물었다.
“왜,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으냐?”
“흥! 정식으로 결투를 한다면 진기를 수련하지 않은 우리가 당연히 적수가 안 되겠지. 하지만 주먹 한 번 받아내는 것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나 방천욱이 네놈의 주먹을 받아 보도록 하겠다.”
소년이 잠시 생각한 후 이를 악물고 말했다.
“방 형 힘내요!”
“방 사형, 가만히 맞을 필요 없어요. 사력지법(卸力之法)으로 받아내세요!”
몇몇 소년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제각기 한 마디씩 응원을 했다.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도 무슨 일인지 듣고는 적개심을 불태우며 방천욱을 응원했다.
석목은 우두머리의 두 손이 회색헝겊으로 두껍게 감싸져 있는 것을 보고 두 눈을 빛냈다.
“석 형, 방천욱이 그의 주먹을 받아낼 수 있을까요?”
석목의 뒤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방천욱과 아는 사이인가요?”
석목이 뒤돌아보니, 누선에서 같은 방을 썼던 장발의 소년과 곱슬머리 소년이 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저는 백석, 이 친구는 소명입니다. 방천욱과 친분은 없지만 우리 둘은 그와 같은 곳에서 왔지요. 그가 저렇게 당당하게 앞에 나설 수 있는 것은 가문에서 혈장법(血桩法)을 수련했기 때문일 겁니다.”
장발의 소년 백석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혈장법이 무슨 무예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나설 정도면 분명 강한 무예겠지요. 하지만 저 청년의 두 팔을 보니 필시 특수한 권각을 수련한 것 같은데, 방천욱이 그의 공격을 받아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쉽게 얘기하진 못하겠군요.”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했다.
“우리 둘과 의견이 같군요.”
백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곧 방천욱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팔다리를 풀며 앞으로 몇 보 걸어 나갔다. 그의 얼굴은 피처럼 검붉게 변해 있었다.
“혈맥을 믿고 자신 있게 나선 것이었구나. 하지만 그깟 것은 절대적인 실력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청년이 차갑게 웃으며 일어나 앞으로 한 걸을 내딛으며 주먹을 뻗었다.
방천욱은 검붉어진 두 팔을 몸 앞으로 교차했다.
쿵!
천에 감긴 주먹이 교차한 두 팔의 정 가운데를 가격했다.
청년의 주먹에 맞은 방천욱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뒤로 2장 가까이 날아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두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버린 그는 양팔도 이미 기괴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방천욱을 응원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내 주먹을 받아 볼 사람이 또 있나?”
청년이 주먹을 천천히 거둬들이며 물었다.
순식간에 적막이 감돌았다.
“없다면 어서 흑염령을 하나씩 내놔라.”
“신입주제에 곡 사형의 주먹을 받아낼 생각을 하다니, 정말 간도 크군!”
“그러게 말이야. 곡 사형이 수련한 파옥권(破玉拳)은 철 방패마저도 쉽게 부수는 위력을 가졌다고.”
뒤쪽에서 지켜보던 청년의 일행들이 웃으며 말했다.
“무기를 사용해도 됩니까?”
잠시 후, 신입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질문했다.
“가능하다. 대신 주먹 말고 내 검을 받아내야만 한다.”
청년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말을 꺼냈던 소년은 즉시 얼굴이 빨개지더니 입을 닫았다.
“제가 한 번 주먹을 받아 보지요.”
바로 그때, 아담한 소녀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열세네 살 정도 돼 보이는 소녀는 땋은 머리를 하고, 온몸에 은색 방울을 걸고 있었다.
“여인이라 해서 사정을 봐줄 것이라곤 생각지 말거라.”
청년이 소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제가 언제 그렇게 해달라고 말한 적이 있던가요?”
소녀가 걷자 몸에 걸린 방울이 딸랑딸랑, 멈추지 않고 울렸다.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무서운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던 청년이 주먹을 뻗었다.
휙-
소녀가 허리를 비틀며 매우 간단히 그의 주먹을 피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기괴한 표정을 짓던 청년은 잠시 후에야 팔을 거두고 물었다.
“혈맥무인인가?”
“맞습니다. 주먹을 받아낸 것으로 쳐주시겠지요?”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몸으로 막던, 혈맥의 힘으로 피하던, 모두 받아낸 것으로 봐야지. 혹시 우리 혈룡회(血龙会)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 본 회에는 혈맥무인이 많아 서로 교류하면 분명 사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청년이 소녀를 향해 마치 다른 사람처럼 웃으며 말했다.
“혈룡회라,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할게요. 지금은 먼저 쉬고 싶습니다.”
소녀는 바로 거절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상관없다. 본 회에 들어오고자 한다면, 혈룡회에 찾아와 나 곡곤의 이름을 대거라.”
곡곤이 말하며 길을 텄다.
“지나가겠습니다.”
소녀가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돌집 사이로 사라졌다.
그때, 소녀가 길을 지나가자 두 소년이 열린 길로 뒤따라 달려갔다.
퍽- 퍽-
두 소년은 곡곤이 휘두르는 주먹에 맞고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엎어졌다.
“뭐하는 짓이지? 저 아이가 방금 주먹을 받아내지 않았나!”
무리 중 한 사람이 분노해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언제 한 명이 받아내면 모두 지나갈 수 있다고 했나? 다른 사람도 지나가고 싶다면 방금 그 사매처럼 주먹을 받아내면 된다.”
곡곤이 흉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기다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니, 우리도 나서는 것이 어떨까요?”
장발의 소년 백석이 말했다.
“저는 미종보(迷踪步)를 소성의 경지까지 수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마 저 자의 공격을 피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곱슬머리 소년 소명은 고개를 저었다.
“백 형이 먼저 지나간다면, 저도 시도해 보겠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허허, 석 형이 동의할 줄은 몰랐네요. 그럼 제가 먼저 시도해보겠습니다.”
백석이 웃으며 곡곤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