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꿈속의 노인
석목이 책장과 새장이 있는 방으로 돌아오자 국 사숙의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을 보니 뭔가 수확이 있었나 보구나.”
국 사숙은 뒷짐을 진채 탁자 뒤에 서있었다. 거대한 앵무새는 석목을 보고 뭔가 말하고 싶은듯했지만 국 사숙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국 사숙의 보살핌 덕에 혈경각에서 대력마원 탈태결을 얻게 됐습니다.”
석목이 탁자 쪽으로 걸어가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오, 잘됐구나. 잠깐, 뭐라고? 어쩌다가 그 심법을 골랐지? 몽고가 주의를 주지 않던가?”
국 사숙은 석목이 고른 심법을 숨기지 않고 말해주자 만족한 얼굴을 보이다, 곧 무언가를 생각하고 석목을 기괴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몽고 선배님께서는 이 심법에 관해 상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석목은 다시 몽고에게 들었던 얘기를 국 사숙에게 전했다.
“보기와 다르게 끈기에 자신이 있나보구나. 허나 어느 단계까지 버틸 수 있을 런지. 허허……, 아직 흑염령 6개가 남았으니 무예를 하나 고르는 것이 좋겠구나.
국 사숙은 석목을 위아래로 훑다가 손을 휘저은 뒤 다시 거대한 앵무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석목은 왼쪽과 가운데 책장 사이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가운데 책장을 향해 걸어갔다.
“정말 반야천상공을 고르겠느냐? 내가 주의를 주지 않았다고 나중에 탓하지 말거라. 이 심법은 보기에는 간단해 보여도 수련에 필요한 단약을 구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출해야한다.
또 두 심법을 수련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전에도 시도했던 사람이 있었다. 허나 과욕은 화를 부른다는 이치는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것 아니냐. 실제 싸움에 있어선 심법뿐만 아니라 무예 역시도 매우 중요하단 말이다.”
국 사숙이 자신의 앞에 놓인 죽간을 보며 말했다.
“국 사숙의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석목은 그에게 남은 흑염령 6개를 모두 건네며 말했다.
흑염령을 받아든 국 사숙은 더 이상은 말리지 않고, 그 죽간과 한 옥간을 이마에 번갈아 대며 무언가를 중얼 거렸다.
잠시 후, 국 사숙이 석목에게 옥간을 건네며 주의사항을 말해줬다.
“국 사숙은 술사이십니까?”
옥간을 받아든 석목이 물었다.
“허허, 안목이 뛰어나구나. 맞다, 이 몸은 영계술사다. 술사 중에서도 매우 특수하고 희소한 혼사지. 허니 이 세계에서 이런 쓰레기를 소환해낸 게지.”
처음엔 뽐내듯이 얘기하던 국 사숙이 곧 분노한 눈빛으로 앵무새를 쳐다보며 몽둥이를 들어올렸다.
“주인님 그러지 마세요……, 엉엉…….”
거대한 앵무새가 꽥꽥 소리를 지르며 애원했다.
석목은 분노한 국 사숙의 모습을 보고 눈치껏 조용히 인사를 하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 * *
장경각을 떠난 석목은 이미 오시(*午時: 오전 11시 ~ 오후 1시)가 된 것을 보고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돌아온 석목은 건빵을 먹고 돌 침상 위로 올라갔다. 곧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석목이 품에서 옥간을 조심스레 꺼냈다. 두 비급을 외우기 위해 주어진 시간은 고작 3일 뿐이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석목은 대력마원 탈태결이 기록된 적색 옥간을 머리에 대고 두 눈을 감았다. 그 후, 석목은 반시진이 훌쩍 지나서야 몸을 움찔하며 눈을 떴다.
아홉 단계를 세세하게 읽어본 석목은 심법의 수련법이 전혀 복잡하지 않고 오히려 알기 쉽다는 것을 발견했으나, 즉시 수련에 착수할 수는 없어 보였다.
대력마원 탈태결을 수련하기 위해선 마살(魔煞)의 기를 흡수해야했다.
옥간에 적힌 바에 따르면 마살이라는 것은 음기가 충만하고 오염된 지역에서 생겨나는 일종의 탁기였다.
하여 일반적인 자연의 기와 다르게 인체에 백해무익한 것이었고, 그런 탁기를 흡수해 신체를 강화하고 다시 벌모세수를 통해 노폐물을 배출하니 수련에 고통이 동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석목같이 심법을 수련한 적이 없는 수련자의 신체로는 탁기로부터 경맥을 보호할 진기가 없기 때문에 잘못하면 경맥이 파괴돼 폐인이 되거나 사망에도 이를 수 있었다.
때문에 체내에 진기를 어느 정도 쌓지 않고 수련을 시작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렇다 보니 처음부터 두 심법을 동시에 수련할 필요가 없게 됐다.
석목은 우선 반야천상공을 수련하고 진기가 모이면 탈태결을 수련하기로 결정했다.
다시 적색 옥간을 내려놓고 흰색 옥간을 집어 이마에 가져다 댄 석목은 이번엔 한시진이 넘어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옥간을 내려놓은 석목의 얼굴엔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반야천상공에 대한 설명 역시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없어 금세 11단계를 전부 외울 수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석목은 곧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속으로 심법의 구결을 외웠다. 심법의 수련법은 이전까지 석목이 해왔던 신체를 단련하는 수련과는 전혀 달랐다. 자연의 기를 체내로 흡수해 본인의 진기로 만들어야 했다.
본래 수련의 성취는 수련하는 자의 자질과 심법의 종류, 환경 등의 영향을 받는다. 자질이 뛰어날수록 기를 잘 느끼고, 심법이 정교하거나 자연의 기가 충만한 환경이라면 더욱 손쉽게 주위의 기를 끌어올 수 있었다.
석목은 곧 심법의 첫 단계를 따라 운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심법에 따라 자연의 기를 느꼈지만 체내의 경맥에 끌어들이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석목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집중했으나 아무리 반복해도 자연의 기만 점점 더 뚜렷하게 느껴질 뿐, 체내의 경맥에 들어서는 순간 반발력이 생기며 도로 배출되는 것이 반복됐다.
석후혈맥을 각성한 자는 진기를 모으는 속도가 일반 사람에 비해 훨씬 느리다더니 과연 그랬다. 석목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지만 낙담하진 않았다.
수련 속도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느리다면 남들보다 부지런하면 됐다. 실력을 키워 수련자원을 얻어낸다면 미래에는 반드시 남들보다 뒤처지지는 않을 터였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무수히 실패를 반복하던 석목이 극히 적은 양이지만 결국 자연의 기를 경맥에 끌어다 넣는데 성공했다.
드디어 진정한 무인의 출발선에 올라선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어둡던 하늘도 밝아지고, 밝았던 하늘은 다시 또 칠흑같이 어두워졌지만 석목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 그대로 앉아있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몸을 움찔거리던 석목이 두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꼬박 하루밤낮을 수련했지만, 석목은 전혀 피로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몸에 힘이 넘치는 듯했다.
이내 석목이 주먹을 휘두르자 공기를 가르며 큰 소리가 났다.
석목은 두 눈을 빛내며 제 두 손을 바라봤다. 신체의 힘은 그대로였지만 주먹의 위력이 크게 늘어 있었다.
경맥에 흩어져 천천히 흐르던 미약한 기는 석목이 곧 마음을 먹자, 순간적으로 매우 빠르게 중앙으로 모여 한 가닥 실 같은 진기를 구성했다.
석목이 하루 온종일 수련해 끝끝내 성취해낸 결과물이었다. 비록 매우 얇긴 했지만 석목도 드디어 한 가닥의 진기를 가질 수 있게 됐다.
이는 곧 석목이 진정한 후천초기의 무인이 되었다는 증거였다.
방금 전 주먹의 위력이 갑자기 강해진 것도, 이 진기 한 가닥 덕분이었다.
석목은 기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다 갑자기 진기를 손바닥에 집중시켰다. 곧 손이 뜨거워지며 살짝 부풀어 오르더니, 손바닥 주변에 은은한 백색 빛이 흘렀다. 금오의 혈살장과 아주 닮은 모양새였다.
* * *
석목은 곧바로 정원으로 뛰어나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구석에 놓인 맷돌만한 푸른 돌을 발견했다.
“하!”
석목이 기합과 함께 빠르게 뛰어나가, 손바닥을 뻗어 돌을 가격했다.
휙-
돌을 가격한 석목이 몸을 날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모든 과정은 한 호흡 안에 이루어졌다.
달려들어서 가격하는 속도는 너무 빨라 집중하지 않으면 동작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쿵!
이윽고 돌에 나있던 손바닥 자국 주위로 순간 균열이 일어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돌덩이가 다 산산조각이 되어 무너졌다.
숨을 몰아쉬는 석목의 안색이 살짝 창백했다. 손바닥은 살짝 빨갰지만 다치진 않은 듯했다.
이내 석목은 돌조각을 집어 들고서 즐거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괴력에 내공이 더해지자 주먹의 위력이 더 강해졌다. 물론 진기를 갖기 전에도 일격에 돌덩이를 부술 순 있었지만 이렇게 조각을 내진 못했다.
석목은 금오와의 혈전을 떠올리며 당시 자신이 이 정도의 힘을 갖고 있었다면 크게 밀리지 않았거나, 어쩌면 대등한 형세를 이루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석목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돌조각을 으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위력은 대단했지만 방금 일격으로 석목은 체내 모든 진기를 소모했고, 회복하기 위해선 한동안 운기조식을 해야만 했다, 금오와 같은 후천중기의 무인과 맞붙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진기를 모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석목은 다시 침상으로 돌아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앞으로의 수련계획을 생각했다. 우선 가장 급한 것은 대력마원 탈태결의 수련이 가능하도록 반야천상공을 수련하는 것이었다.
무예의 경우엔 여분의 흑염령이 없어 풍치도법과 쇄석권을 계속 수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미 두 무예를 대성한 석목은 진기의 도움까지 더하면 당장의 상황에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석목이 곧 다시 적색 옥간을 이마에 대고 외우기 시작했다.
현재로서는 대력마원 탈태결을 수련할 방법이 없었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 반드시 이를 꼼꼼히 외워둬야만 했다.
* * *
셋째 날 정오가 되었을 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석목이 폭음에 놀라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석목의 앞에 가루가 된 두 옥간이 보였다. 3일이 지나자 장경각에서 복제한 두 옥간이 스스로 폭발한 것이었다.
다행히 석목은 이미 그 두 심법의 내용을 꼼꼼히 외운 상태였다.
석목이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방 밖에서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그 앞에 백석과 소명이 나란히 서있었다.
“석 형, 사흘간 집에서 나오지 않다니 폐관수련이라도 하는 겁니까? 조급하게 한다고 마냥 좋은 것도 아니니, 우리와 함께 흑마문의 곳곳을 돌아다녀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백석이 웃으며 물었다,
석목은 잠시 고민하다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도 좋겠군요. 며칠간 안에만 있었더니, 마침 나가서 걷고 싶었습니다.”
석목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마침 반야천상공에 필요한 줄골단을 구하기 위해 단약을 거래하는 장소를 파악하고 싶었다.
“하하. 잘됐군요. 그럼 바로 출발하지요.”
백석과 소명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다른 제자도 초대하는 것은 어떨까요?”
소명이 제의했다.
“음, 어제 보니 온 몸에 방울을 가득 달고 다니던 소녀가 바로 근처에 사는 것 같았습니다.”
백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한 돌집을 가리켰다.
셋은 잡담을 하며 그곳으로 걸어갔다.
* * *
그날 저녁, 석목은 침상에 누워 천천히 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의 침상은 창문과 바로 붙어 있어 창 틈새로는 밝은 달빛이 석목을 은은히 비춰주었다.
별들 사이로 높이 솟은 달 너머, 주위를 에워싼 다른 산들 사이에서도 가장 높이 우뚝 솟아 있는 검푸른 산봉우리가 보였다.
그 정상엔 광활하고 평평한 풀밭이 있었고 각종 맹수와 조류, 초식동물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서로 먹고 먹히는 천적들임에도 불구하고 중앙에 있는 옥석을 둘러싸고 나란하게 서있었다.
그리고 그 옥석의 위엔 가부좌를 틀고 앉은 백발의 노인이 있었다. 양손은 길고 하얬고, 긴 눈썹은 눈꼬리에서부터 흘러내려 허리까지 닿아 있었다.
노인은 손에 나무 막대기를 든 채, 온화한 눈빛으로 주위 동물들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이내 서늘한 밤바람이 불고, 풀밭의 들풀들이 잔잔한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하지만 정상에 모인 동물들은 오직 긴 눈썹의 노인만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넓은 풀밭에 수많은 동물이 모여 있었지만, 고요한 밤하늘 아래선 오직 노인의 목소리만 들릴 듯 말듯 메아리쳤다.
온 몸이 하얀 원숭이도 이 동물 무리들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이 원숭이는 매우 초조해하며 계속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노인의 목소리는 계속 귓전에 맴돌았으나, 원숭이는 아무리 집중해도 노인의 말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끽!”
주위 동물들이 집중한 눈빛으로 노인의 말을 전부 다 알아듣자, 흰 원숭이는 더욱 초조함을 참지 못해 결국 울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이곳에서는 매우 크게 들렸다. 순간, 긴 눈썹을 가진 노인의 말이 끊겼다.
다른 동물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흰 원숭이를 분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노인의 앞이라 감히 함부로 행동하진 못했다.
흰 원숭이를 본 노인은 하얀 눈썹을 움찔거리다, 일어나 천천히 흰 원숭이에게로 다가갔다. 흰 원숭이 앞에 있던 동물들은 노인에게 길을 터주며 더욱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 원숭이를 바라보았다.
흰 원숭이는 노인을 향해 엎드려 애걸하는 눈망울로 낮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긴 눈썹의 노인이 살짝 웃더니, 들고 있던 나무 막대기로 흰 원숭이의 머리를 가볍게 3대 때렸다.
흰 원숭이의 몸은 나무 막대기에 맞을 때마다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런데 그때, 흰 원숭이는 갑자기 두 눈이 맑아지더니 사고가 확 트이는 기분을 느꼈다. 노인이 지금껏 했던 말도 순식간에 다 이해되었다.
“우끼…….”
흰 원숭이가 몹시 기뻐하며 긴 눈썹의 노인에게 절을 하자 주위 동물들이 질투어린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