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술사
자고 있던 석목이 갑자기 몸을 확 일으켰다.
석목은 계속해서 심장이 널뛰는 것 같은 기분이었고, 전신에서도 땀이 비 오듯 흘러 옷이 온통 다 젖어있었다.
하지만 석목은 몹시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력이 놀랄 만큼 향상된 날 이후, 석목은 달빛이 있는 날이면 항상 꿈속에 들어가 달의 정수를 흡수하며 시력을 강화시켰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시력이 강화되는 속도가 점차 느려져 이젠 달빛이 충만한 날에도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반면, 오늘의 꿈은 그 전까지의 꿈과는 전혀 달랐다. 나무에 올라가 달의 정수를 흡수하지 않고 노인의 이야기만을 들었지만, 석목은 어째서인지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석목은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꿈속 원숭이가 깨달은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석목은 침상에서 내려와 방안을 서성이며 때때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은 마치 꿈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하얀 원숭이를 보는 듯, 그와 매우 흡사한 모습이었다.
석목은 꿈속 노인이 가르쳐 준 것이 분명히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했지만 한참을 고민해도 결국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에 석목은 그저 짙은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잠을 청했다.
* * *
다음날, 석목은 잠에서 깨 집밖을 나섰다.
한참을 노력한 그는 반야천상공 입문의 경지에는 오를 수 있었지만, 그 심법을 계속 수련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줄골단이 필요했다. 석목은 세 나라에서 공통으로 사용 가능한 은표를 10만 냥이나 넘게 갖고 있었지만 줄골단의 가격을 알지 못해 내내 불안했다.
새벽안개가 짙게 낀 산골짜기는 매우 고요했다.
석목은 집을 나선 뒤, 자신과 같은 복장을 한 신입제자들 여럿이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두 흥분과 기대 가득한 표정을 보아하니 그들 역시도 수련을 위한 준비를 하러 가는 듯했다.
석목은 계속 산골짜기의 중심에 위치한 광장을 향해 걸어갔다.
이각(*二刻: 30분)뒤, 석목은 광장 왼쪽의 푸른 돌로 포장된 넓은 거리에 도착했다. 길 양쪽엔 다양한 상점이 있었고, 은은한 약초 향도 풍겨왔다.
약초냄새를 맡은 석목은 걸음걸이를 빨리해 금세 어느 3층 누각 앞에 도착했다. 그곳엔 그의 예상대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매우 시끌벅적했다.
고개를 들어 누각의 입구를 바라보자, 단향각(丹香阁)이라고 쓰인 금색 간판이 보였다.
곧 가게 안에 들어간 석목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은 내부에 잠시 놀랐다.
이곳은 매우 밝았고 천장의 높이는 대략 3장정도 됐다. 100명이 들어오더라도 좁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넓이였다.
진귀한 자심목(紫心木)으로 만든 계산대 뒤에는 자심목으로 만든 높은 진열대가 놓여있었다. 어느 진열대에는 다양한 약초가 진열돼있었고, 어느 진열대에는 각종 단약이 들어 있는 작은 병이 진열돼있었다.
가게 안 계산대 앞쪽에는 흑마문의 제자가 2, 30명 정도 있었는데, 다들 대부분 계산대 뒤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계산대 뒤에서 진열대를 바쁘게 오가며 진열대 위의 병이나 약초를 집어 들었다.
석목은 그 분주한 사람들의 소매에 ‘병’자가 적혀 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주광이 말했던 잡역제자가 분명해 보였다.
잡역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수련자이며 그중 경지가 높은 자는 줄체신공 11성의 경지에 오른 자도 있다고 했었다. 이들이 잡역하인이 되면서까지 흑마문에 들어 온 이유는 잡역제자 중 가장 우수한 30명에 들어 병급 제자가 되기 위한 것이었다.
“뭘 사야할지 모르겠다면 제가 안내를 해드릴까요?”
문 뒤에 서있던 18살 정도 돼 보이는 잡역제자가 석목에게 걸어와 인사하며 웃는 낯으로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우선 직접 보겠습니다.”
석목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내 석목은 잠시 주위를 훑어보고 곧바로 중간 계산대로 걸어가 진열대의 물건을 관찰했다,
호극단(虎极丹), 자운소(紫云苏), 오사액(五蛇液), 원령단(元灵丹)…….
각양각색의 단약을 본 석목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1층은 수련의 경지가 낮은 제자들을 위한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저렴한 단약이 한 알에 20냥 정도 했고, 그 외 대부분은 100냥에서 수백 냥에 달했다. 가난한 사람은 전혀 감당하지도 못할 가격이었다.
“응? 혈강단이군.”
석목이 드디어 익숙한 이름을 하나 찾았다.
그 아래 붉은 바탕엔 ‘85’란 검은 글씨가 적혀있었다. 신입 제자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는 혈강단 가격이 이리도 비쌀 줄이야……. 석목은 깜짝 놀랐다.
종문에서 모든 병급 제자들에게 한 달에 3개씩 나눠준다고 했으니 인당 300냥 가까이는 들 것이었다.
주광의 말대로라면 종문엔 병급 제자만 2천명 가까이 있는데다, 갑을 두 단계의 제자들은 인원수는 적어도 지원받는 자원이 병급 제자보다 훨씬 많으니 종문에선 혈강단 지급으로만 매달 백만 냥 이상을 지출하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흑마문의 저력은 석목이 기존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원하는 단약이 있습니까?”
그때, 계산대에 있던 외모가 빼어난 잡역제자가 말했다.
“줄골단이요.”
둘러보는 것에 점차 흥미를 잃은 석목이 곧바로 대답했다.
“한 알에 천 냥입니다.”
외모가 빼어난 제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비쌉니까?”
가격을 들은 석목이 크게 놀랐다.
“줄골단을 정제하기 위해서는 귀한 재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제자가 온화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그렇다면……, 세 알만 주세요.”
잠시 고민하던 석목이 품에서 은자 3천 냥을 꺼냈다.
당초 그는 단약을 대량으로 구매하려 했지만 재산을 남에게 드러내는 건 좋지 않다는 생각에 그냥 여러 차례 오가며 단약을 구매하기로 결심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계산대의 제자가 웃으며 말하자, 뒤에 있던 다른 제자가 잽싸게 진열대로 다가가 푸른 병 3개를 가지고 왔다.
병 3개를 건네받은 석목은 그중 하나를 열어 코에 갖다대보았다. 순간 코를 찌르는 기괴한 냄새가 확, 끼치자, 석목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안에 들어 있는 단약은 콩알 정도의 크기였고 밝은 빨간색을 띄고 있었다. 반야천상공에 적혀있던 줄골단에 대한 묘사와 같았다.
석목이 기뻐하며 은표를 지불하고 병을 품속에 챙겨 넣은 그 순간, 갑자기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 사제, 보아하니 이 친구는 반야천상공을 선택했나 보군!”
살짝 놀란 석목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곳엔 체격이 우람하고 호쾌하게 생긴 소년과 장발의 소년 백석이 서 있었다.
“석 형, 이분은 방금 알게 된 곽무 사형입니다. 저와 동향사람입니다.”
백석이 웃으며 소개했다.
“석목입니다. 사형께서는 어떻게 제가 반야천상공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아 본 것입니까?”
석목이 우람한 소년 곽무에게 인사하며 물었다.
곽무는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놀랄 필요 없다네. 나도 반야천상공을 선택하려 했었거든. 하지만 줄골단의 가격이 너무 비싸 결국 포기했었지. 줄골단은 정제 할 때 어느 괴수의 골수를 첨가해야하기 때문에 가격이 매우 비싸다네. 게다가 위력이 대단한 심법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워서 반야천상공을 수련하는 제자는 많지가 않아.”
곽무가 여기까지 말한 뒤 석목을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석 형, 곽 사형과 술 한 잔 하러 가던 중인데 함께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제 막 종문에 와서 모르는 것이 많으니 오늘 곽 사형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백석이 석목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잠시 망설이다 거절하려던 석목은 이어지는 백석의 말에 생각이 바뀌었다.
“좋습니다. 함께 한 잔 하도록 하시지요.”
“하하하, 술을 마실 때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재밌지!”
곽무가 흥분한 표정으로 말한 뒤,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석목은 속으로 곽무가 굉장한 애주가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세 사람은 단향각을 나와 천향루(川香楼) 라는 이름의 2층 주루에 도착했다. 이름을 말하자 점소이가 즉시 2층 방 안으로 안내했다.
석목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소명을 발견했다. 탁자 위엔 이미 음식이 나와 있었고 좋은 술이 개봉돼 있었다. 곽무는 이 짙은 술 냄새에 눈을 반짝였다.
곽무는 바로 자리에 앉아 잔에 술을 가득 따라 한 입에 전부 털어 넣었다.
“좋은 술이구나!”
백석도 시원하게 한 잔 입에 털어 넣고 그와 마주앉아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석목과 소명도 옆에서 공손히 잔을 나눴다.
술이 3잔씩 돌자 어느새 넷은 한데 뭉쳐 마셨다. 백석과 소명은 이 기회를 틈타 많은 질문을 했고, 곽무는 본인이 아는 것을 전부 상세히 설명해줬다.
“곽 사형, 술사에 대해서 아십니까?”
백석과 소명이 더 궁금한 것이 없는 듯하자, 이제 석목이 물었다. 석목은 머릿속으론 장경각의 국 사숙과 기이한 앵무새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는 술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아주 흔치 않은 기회였다.
“술사? 장경각의 국 사숙을 말하는 것이로구나.”
곽무가 고개를 들어 석목을 바라보았다.
술사는 흑마문 전체를 통틀어 봐도 매우 적었다. 하여 이들처럼 막 입문한 제자 대부분이 만나 볼 수 있는 술사는 오직 국 사숙 한 명뿐이었다.
석목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부적과 진법을 떠올린 석목의 눈빛에는 술사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었다.
백석과 소명 역시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곽무를 바라봤다.
“우리 흑마문에 수천의 제자가 있지만 술사는 고작 백여 명뿐이다. 게다가 그중 대부분이 학도지. 국 사숙과 같은 영계술사가 여덟, 그보다 더 높은 경지인 성계술사는 고작 2명뿐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영계술사부터 정식 술사라 할 수 있으니, 단 10명 정도의 술사만 보유하고 있다고 봐야지.”
석목, 백석, 소명은 놀란 나머지 표정이 다소 해괴하게 변했다. 곽무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금 말을 이었다.
“술사가 중요시 되는 이유는 종문의 모든 법기와 단약, 부적, 심지어 진법까지 전부가 그들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수가 종문의 저력을 어느 정도 결정한다고 봐도 돼.
술사가 되기 위해서는 영근(灵根)이라 불리는 술사로서의 소질이 필요하다. 그것을 지닌 사람만이 술법을 사용하기 위한 원소를 느낄 수 있지. 하지만 그런 이들은 매우 희소해 기를 느낄 수 있는 무인보다도 훨씬 적다네.”
곽무가 매우 부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국 사숙은 술사 중에서도 혼사라고 하던데 그것은 또 무엇입니까?”
석목이 다시 물었다.
“하하하, 석 사제가 아는 것이 상당히 많구나. 정말 잘 물어봤다. 술사의 종류는 다양하다네. 우선 가장 흔한 오행술사가 있지.
그 외에도 부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적술사, 진법에 능통한 진법사, 단약정제를 전문으로 하는 단약술사, 풍ㆍ뇌ㆍ빙ㆍ암ㆍ광술사, 인형술을 사용하는 인형술사, 그리고 네가 말한 혼사가 있다네.
혼사는 자신의 영혼의 힘을 사용해 이 세계의 생물과 교류하는 능력을 가졌지. 그 수는 매우 희소하다는 인형술사보다도 더 적다네.”
곽무가 매우 들떠서 설명했다. 말을 마친 곽무가 또 한 잔을 비우자 옆에 있던 백석이 얼른 잔을 채워줬다.
석목은 술사라는 두 글자를 가슴 깊이 새겼다. 기회가 되면 술사에 대해서 더욱 조사해보려는 생각이었다.
“석 사제, 흑마문 내에 곡곤이 사제와의 대결에서 체면을 구겼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군. 그는 속이 굉장히 좁은 사람이니 앞으로 조심해야 할 걸세.”
곽무가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곽 사형.”
이어 네 사람은 우스갯소리를 하며 술 세 단지를 더 마신 후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