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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38화 (38/916)

38화. 꿈을 재현하다

천향루를 떠난 후, 석목은 단약상점을 몇 군데 들려 단약을 조금씩 나누어 산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곽무로부터 들은 술사에 관한 이야기는 석목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석목은 곽무의 얘기를 듣고 마치 신세계가 열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흑마문으로 오던 길에 마주친 현무종의 여천기도 술사였다. 그것도 성계술사로, 당시 그의 대단한 위상은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흑마문의 이천 제자 중, 술사 학도가 백여 명이라 했으니 석목은 앞으로 분명 또 다른 술사를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석목은 비무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자원을 쟁취하기로 마음먹었기에, 지금은 그런 나중 일보단 반야천상공을 수련하는 것이 더 급했다.

석목은 곧 품에 지니고 있던 주머니에서 작은 병 수십 개를 꺼냈다. 그는 줄골단 뿐만 아니라 혈강단도 일부 샀었다.

이내 돌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석목은 흰색 병에서 혈강단 하나를 꺼내 복용했다.

석목이 묵묵히 반야천상공을 운기하자 단약의 힘이 서서히 녹아들었다. 그리고 자연의 기가 경맥에 흡수되는 속도가 많이 늘어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석목은 기뻐하며 심법 운기를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자연의 기를 천상진기(天象真气)로 변화시켜 단전에 집중시켰다.

시간이 얼마 흐른 뒤, 석목은 갑자기 눈을 떠 빠르게 푸른색 병에서 줄골단을 꺼내 복용했다.

줄골단은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았다. 곧 배 속에서 몹시 뜨거운 기운이 생겨나더니 전신을 세차게 헤집었다.

그와 동시에 석목의 전신 피부가 검붉어지고 피부 아래 혹이 솟아나더니 사방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불어 뼈에선 따닥따닥, 콩을 볶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 전신의 뼈가 마치 맹렬한 불길에 타들어가는 듯했다. 너무도 견뎌내기 힘든 고통이었다.

뼈를 태우는 단약, 줄골단이라는 이름에 딱 걸 맞는 고통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석목은 계속 반야천상공을 운기 했다. 천상진기는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고, 거기다 줄골단의 효력이 더해져 점차 더 강인해졌다.

족히 한 시진이 지나서야 석목의 피부색이 천천히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줄곧 뼈에서 울리던 소리도 멈췄다.

석목의 온몸엔 검은색 불순물이 섞인 땀이 흥건했다. 땀에 젖은 옷도 그 불순물 탓에 굉장히 퀴퀴한 냄새가 났다.

석목은 급하게 옷을 벗어 깨끗한 물로 온몸을 상쾌하게 씻었다.

석목의 체내에 있던 천상진기는 이번 수련을 통해 확실히 더 강해졌고, 석목의 신체 역시도 더불어 엄청나게 강인해졌다.

심법이 한 단계 오를 때마다 코끼리 한 마리의 힘이 증가된다고 하더니 과연 허언이 아닌 듯했다.

그 뒤로도 석목은 줄곧 반야천상공을 수련했고, 조금씩 짬을 내서 풍치도법을 수련했다.

체내의 진기가 발전하면서 풍치도법 또한 발전했다. 이제 석목은 일식십참을 해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석목은 요 며칠 줄곧 한 가지 일이 마음에 걸려, 미간을 찌푸린 채 침상 위에 앉았다.

석목은 달빛이 있는 날마다 흰 원숭이로 변해 노인의 말을 듣는 꿈을 반복했다. 허나 막상 꿈에서 깨면 노인이 했던 말은 전혀 떠오르질 않았다.

일어나 방 안을 서성이던 석목은 뭔가 결심한 듯 문을 열고 밖을 나섰다.

* * *

밤이 깊어 매우 고요한 산골짜기에는 벌레들이 우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리고 하늘에는 밝은 달이 걸려 있었다.

석목은 주위를 살피고 발소리를 죽인 채 어느 산골짜기 방향으로 갔다.

잠시 후, 석목은 숲속 풀밭에 도착했다.

그곳은 13호 산봉우리 밖의 으슥한 곳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길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평소에는 거의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석목은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마음을 놓았다.

이내 순식간에 나무 꼭대기에 올라간 석목은 쭈그려 앉은 자세로 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

흑마문에 도착한 이후 그는 줄곧 수련하기 바쁘기도 했고,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괴이한 행동이 들킬까 걱정돼 한 번도 백일몽을 꾸지 않았었다.

하지만 석목은 족히 반 시진 동안 달을 보는 자세를 유지해봤지만, 이전처럼 꿈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지?”

석목이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전엔 달빛만 있다면 이 자세를 취하는 순간 바로 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설마 더 이상 마음대로 꿈속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인가…….”

석목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석목은 아직까지도 어떤 원리로 백일몽이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사실 이렇게 갑자기 꿈속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허나 꿈속에 들어가지 못하면, 더 이상 시력을 강화할 수 없으니 석목은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석목은 그 후 반 시진동안 달을 더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하고 다시 나무에서 내려왔다.

한숨을 쉬며 방으로 돌아가려던 그때, 석목의 눈앞에 숲속 풀밭이 보였다. 달빛에 비춰진 모습이 꿈속의 장소와 아주 비슷해 보였다.

석목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풀밭 위에 앉아 꿈속 원숭이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앞을 똑바로 쳐다봤다.

자리에 앉은 후, 숨을 한 3번 정도 쉬었을까. 석목은 갑자기 머릿속에서 콰르릉, 소리가 울리며 몸 전체가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꿈속에 들어간 석목은 하얀 원숭이로 변해 있었다.

눈썹이 긴 노인은 나무 막대기를 들어 석목의 머리를 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노인에게 맞은 석목의 머릿속에 갑자기 은색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빛은 곧 한곳에 모이더니 은색 글자로 변했다. 어느 심법의 구결이었다.

첫 머리에는 ‘탄월식’이란 세 글자가 크게 빛나고 있었다.

* * *

흰 원숭이는 기뻐 어쩔 줄 몰라, 찡그린 얼굴로 양손을 하늘 높이 들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쾅, 하는 소리가 울리며 석목의 정신은 다시 풀밭 위에 앉아 있는 석목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석목은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켜 하늘을 쳐다보았다. 너무 놀란 석목은 이슬에 옷이 흠뻑 젖은 것은 신경도 쓰지 못했다.

동틀 무렵이 되어, 동쪽 하늘이 살짝 하얗게 변해 있었다.

꿈속에 들어간 후 고작 호흡만 열 몇 번 한 것 같은데, 현실은 하룻밤이 다 지나가 있었다.

고개를 가로저은 석목은 급히 눈을 감아 꿈속의 탄월식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머릿속이 온통 새하얘서, 탄월식이란 이름을 제외하곤 구체적인 구결은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석목이 이미 그 심법의 구결을 배웠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석목은 이 모순적인 느낌에 크게 놀랐다. 현실과 꿈이 어지럽게 섞인듯했다. 얼른 고개를 가로저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석목은 급히 집으로 갔다. 밤에 홀로 외출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틀 후 구름 한 점 없는 밤, 하늘에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떴다. 평온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달빛은 온 하늘과 산골짜기를 밝은 은백색으로 비췄다.

산골짜기의 한 돌집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석목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 두 눈을 빛냈다. 달빛이 비추는 밤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 * *

조용히 집을 나선 석목은 잠시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했고 달빛 아래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발걸음을 죽인 채 빠르게 풀밭으로 향했다.

주위를 크게 한 바퀴 돌며 주위를 확인한 석목은, 곧 풀밭에 앉아 달빛을 느끼며 호흡을 서서히 느리게 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석목의 몸에 힘이 천천히 풀리며 석목은 꼼짝 없이 그 자리 그대로 굳어버렸다.

석목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정신을 번뜩 차렸다. 그는 이미 흰 원숭이로 변해 은색 바위 위에 서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 ‘탄월식’이란 세 글자가 휙, 스쳐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들어보려 했지만 여느 때와 같이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이미 익숙한 석목은 전혀 개의치 않고 시선만 위로 돌렸다. 하늘에 빼곡한 흰색 빛은 이전보다 2배 이상은 더 커져있었다.

허공에서 계속 나타나는 빛들은 신비한 힘에 이끌린 듯, 흰 원숭이의 금빛 눈동자 속으로 끊임없이 흡수되었다. 꼭 흰 원숭이의 두 눈동자에 흰색 은하수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원숭이에게 흡수된 흰 빛은 전과 달리 체내에 자유롭게 퍼지지 않았다.

빛의 무리는 어떤 힘에 통제돼, 석목의 머릿속에서 안개를 형성했다.

그 안개들은 어떤 것은 짙고, 어떤 것은 옅어지는 등 매우 무질서하고 혼잡했다. 그러다 안개들은 곧 가운데로 모여 점점 우윳빛 덩어리로 압축됐다.

압축된 덩어리는 또다시 소용돌이치며 새롭게 생겨나는 안개와 합쳐지고 압축하는 걸 반복했다. 시간이 지나도 크기는 동일했지만 점점 농밀해졌다.

이내 석목은 머릿속이 굉장히 상쾌하고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영험한 영약에 몸을 담근 듯 머릿속에 신기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 상태로 한참 시간이 지나자 몹시 따분해진 석목은 참지 못하고 주위를 관찰했다. 그는 곧 자신의 아래에 있는 은색 바위가, 매우 높은 산봉우리의 낭떠러지 바로 위에 서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방으론 구름바다가 아득히 펼쳐져 있었고, 구름 사이사이로는 굳세 보이는 소나무가 잠깐씩 모습을 드러냈다.

소나무 외에도 산봉우리에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기이한 식물들이 자라나 있었다. 멀리선 때때로 짐승들의 포효소리도 들려왔다. 산봉우리의 형태는 곧고 가늘어 마치 하늘을 뚫고 서있는 한 자루의 녹색 장검 같이 보이기도 했는데, 바로 그 녹색 검 끝자락에 흰 원숭이가 서 있었다.

또 산봉우리의 주위로는 산들이 첩첩이 겹쳐 있었다. 어느 산은 웅대했으며, 어떤 산은 우아했고, 어떤 산은 그 산세가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그 어느 산도 이 흰 원숭이가 있는 산봉우리의 절반 높이에도 미치지 못했다.

산봉우리 정상에 위치한, 이 거대한 은색 바위 위에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꼭 하늘에 있는 달과 별을 손에 다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곳은 석목이 이전까지는 꿈에서 본적 없던 장소지만 흰 원숭이가 이 산봉우리에서 탄월식을 수련하기로 선택한 이유는 잘 알 것 같았다. 아마 하늘의 달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가 사방을 관찰하는 사이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렀다.

얼마 후, 흰 원숭이의 머릿속에 있던 우윳빛 소용돌이 아래에 한 알의 희고 작은 결정이 생겨났다. 우윳빛 소용돌이는 쉬지 않고 회전하며 세밀한 흰 실을 뿜어냈고, 그 실은 아래 흰 결정을 휘감으며 크기가 점점 커졌다.

결정은 계속해서 커지더니 쌀알 정도의 크기가 됐다.

바로 그때. 석목의 머릿속에서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정신이 아찔해진 석목은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악!”

풀밭에 앉아있던 석목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강력한 충격에 의해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석목의 옷은 비 오듯 흘린 땀과 이슬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안색도 창백했고, 눈도 초점을 잃어 흐리멍덩했다. 심지어 안면의 근육까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허나 이 풀밭은 매우 외진 곳에 있었고, 아직 동트기도 전이라 다행히 누구도 이곳의 이상함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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