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날카롭게 맞서다
몇 차례 심호흡을 하자, 석목의 눈에 초점이 점차 잡혀가기 시작했다.
꿈에서 깨어난 석목은 일말의 피곤함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머리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시원한 느낌 덕에 더없이 상쾌했다.
석목은 갑자기 낮에 수련했던 반야천상공을 떠올리며 크게 놀랐다. 벽에 막힌 듯 전혀 이해가지 않던 부분이 지금 이 잠시잠깐에 간단히 이해가 된 것이었다.
석목은 자신의 머리 깊숙한 곳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탄월식은 심법의 깨달음에 큰 도움을 줘서 계속 수련한다면 심법수련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석목은 방금 이 깨달음으로 곧 반야천상공의 1단계를 완성할 수 있을 듯했다.
석목은 몸을 일으켜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 뒤 주위에 이상한 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 * *
집에 돌아온 석목은 즉시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반야천상공 1단계 구결을 되뇌었다. 곧 자신이 새롭게 이해한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혈강단을 복용하고 호흡을 천천히 늦추며 자연의 기를 느꼈다.
호흡이 극도로 느려지자, 그는 곧 줄골단도 복용하고, 심법의 1단계 구결에 따라 운공을 시작했다.
점차 몸에 자연의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석목의 체내로 들어와 경맥을 따라 흘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경맥에서 흐르던 진기는 점점 강해지며 바늘만큼 두꺼워졌다. 두꺼워진 진기는 경맥의 어느 한 교차점에서 나누어지더니 막혀있던 새로운 경맥을 뚫고 들어갔다.
어젯밤의 깨달음 덕이었다. 별다른 차이는 없어 보였지만 이는 굉장히 큰 성과였다. 새로운 경맥을 뚫은 이후 진기를 쌓는 속도는 매우 빨라졌다.
석목은 이후, 일부 풍치도법과 쇄석권을 수련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밤낮으로 반야천상공만 수련했다.
그리고 달빛이 있는 밤이면 항상 꿈속으로 들어갔다. 흡수한 달빛의 정수는 탄월식을 통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축적하고 압축했다.
두 달이 지나자, 쌀알만 하던 머릿속의 결정은 콩알 만해졌다.
여전히 그 결정체의 정확한 능력은 알지 못했지만 사고의 속도를 높여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수확이었다.
두 달 사이 석목은 반야천상공의 첫 단계도 완성했다. 덕분에 석목의 힘은 전에 비해 3할 정도 상승했고, 진기를 사용한다면 그보다 2배 이상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전신의 피부도 강인해져 몇 단계 더 수련한다면 일반적인 도창은 이제 석목의 피부를 뚫을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체내에 있는 천상진기 역시 제법 규모를 갖춰, 전력으로 쇄석권을 세 번 날리거나 풍치도법 두 번을 쓸 수 있게 됐다.
천상진기의 도움 덕에 석목의 풍치도법은 대원만의 경지에 가까워져 가볍게 일식십일참을 펼칠 수 있게 됐다. 쇄석권의 위력도 크게 증가해, 전력으로 주먹을 휘두르면 1장 정도의 암석은 일격에 조각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금오와 같은 후천중기의 경지에 오른 무인과 정면으로 맞붙더라도 대항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석목은 배낭에서 은표를 몇 장 꺼냈다. 3만 냥도 되지 않는 은표가 그에게 남은 전 재산이었다. 그가 수련을 위해 지출하는 비용을 계산하면 앞으론 반년 정도밖에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반야천상공을 수련하기 위해 소모되는 비용은 역시나 일반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미리 모아두었던 돈이나 탄월식이 없었다면 그는 아마 1단계도 완성할 수 없었을 터였다.
석목은 씁쓸하게 웃었고, 조만간 흑마문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경로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내 석목은 은자를 챙긴 뒤, 바닥난 혈강단과 줄골단을 구매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 * *
돌집이 밀집돼있는 구역엔 사람의 왕래가 늘어있었다.
곡곤에게 다쳤던 제자들이 회복을 다 마쳤기 때문이었다.
석목은 길을 따라 걷다가, 광장 방향으로 꺾었다.
그때, 멀리서 어렴풋한 함성소리와 응원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들어보니 사람 수가 적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소리가 난 방향은 전에 백석과 한 번 가봤던 연무대가 위치한 곳이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연무대에서 겨루고 있는 듯했다.
그 연무대는 흑마문이 석목과 같은 신입 제자를 위해서 설립한 곳이었다. 따라서 그곳에서 비무가 이루어진다면 분명 신입 제자일 것이 틀림없었다.
석목은 눈을 반짝이며 연무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7~8장정도 되는 네모난 연무대는 바닥에서 몇 척이나 위로 솟아 있었고, 주변은 검은색 금속으로 둘러싸여져 있었다. 그리고 연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2~30명의 사람은 대부분 다 신입 제자들이었다.
연무대 위에는 두 사람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몸매가 날씬한 소년이었다. 바로 석목과 친분이 있는 백석이었다.
상대는 머리를 땋고 몸에 은색 방울을 가득 건 작은 소녀였다.
“그 아이네…….”
석목은 살짝 놀랐다.
혈맥의 능력으로 곡곤의 주먹을 피해낸 그 소녀는 석목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이후 석목과 백석은 그녀와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남봉이었다.
한데 지금 어째서인지 신입 제자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재능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 격렬히 겨루고 있었다.
* * *
연무대 위에서 겨루고 있는 백석과 남봉은 2달 전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더 강해져 있었다.
연무대 중앙에 있는 백석의 양팔은 혈관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가 주먹을 뻗을 때마다 휘몰아치는 권풍은 몹시 뜨거워 연무장을 다 달굴 정도였다.
남봉의 작은 몸은 백석이 내지르는 주먹 앞에 있으니 더욱 가냘파보였다. 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몸놀림으로 백석의 공격을 유연하게 피하는 그녀는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강아지풀 같았다.
남봉은 공격을 피하면서도 그 아름다운 눈을 백석의 몸에서 한시도 떼지 않았다. 아마 상대의 체력을 소진시켜 반격할 기회를 엿보는 듯했다.
두 사람의 실력은 막상막하라 쉽게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석목은 눈빛을 반짝이며 그 둘을 바라봤다. 두 사람이 펼치는 무예는 흑마문에 들어와 배운 후천등급의 무예가 분명해 보였다.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휘몰아치는 권풍이 불과 같이 뜨거운 것을 미루어 보아 백석의 권법은 열염권(烈焰拳)이라 불리는 무예인 듯했다. 또한 남봉의 종잡을 수 없는 몸놀림은 석목이 장경각에서 봤던 매영신법(魅影身法)과 매우 유사해보였다.
격렬한 비무 중에도 자연스럽게 강한 위력을 펼치는 것을 보니 둘 모두 이미 상당한 수련의 성과를 거둔 듯해보였다. 체내에 모은 후천진기 역시 석목보다 훨씬 더 많이 쌓은 것 같아 보였다.
석목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두 달간 그 많은 줄골단과 혈강단을 써가며 수련했으니 석후혈맥의 방해만 없었다면. 진즉 반야천상공 2단계에 올랐을 것이 분명했다.
“석 형, 며칠 안보이더니 오랜만에 집을 나섰나보군요.”
그때, 사람들 사이로 곱슬머리 소년 소명이 다가왔다.
“소 형.”
석목이 살짝 웃으며 소명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눈 뒤 나란히 서서 연무대를 바라봤다.
“백 형은 과연 대단하군요. 두 달 사이 진기를 저 정도까지 쌓다니 이미 후천초기의 경지에 오른 것 같습니다.”
석목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안목이 뛰어나네요. 맞습니다, 백 형은 이틀 전 지양공(至阳功) 3단계를 완성했습니다.”
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은 매우 놀랐다. 소명이 말한 지양공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반야천상공과 단계수가 크게 차이나지는 않을 것이었다.
두 달 새 심법을 3단계까지 수련하다니, 정말 깜짝 놀랄만한 자질이었다.
“백 형과 남 낭자는 왜 여기서 겨루고 있는 것입니까?”
석목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이내 소명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더불어 약간 부끄러운 것 같은 표정도 떠올랐다. 소명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부끄럽습니다. 전부 저 때문입니다. 석 형도 알다시피 전 곡곤에게 흑염령을 뺏겼습니다. 해서……. 석 형은 줄곧 집에서 수련을 해서 아마 모를 겁니다. 최근 신입 제자들끼리 흑염령을 걸고 겨루기 시작했습니다.
신입 제자들은 대다수가 자부심이 강하고 지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모두 후천등급의 무공서를 접하면서 실력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어제 백 형이 남 낭자가 한 제자로부터 흑염령을 따냈다는 소식을 듣고 낭자에게 도전을 했습니다. 제게 흑염령을 얻어주기 위해서요.”
소명의 설명에, 석목도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무대의 두 사람은 여전히 접전을 이루고 있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백석이 살짝 우세해 보였지만 남봉은 혈맥의 힘을 아직 충분히 발휘하지 않았다. 승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연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엔 6명이 두 무리로 나뉘어져서 보고 있었다. 한 무리엔 신입 제자들의 길을 막았던 곡곤이 있었고, 그 뒤론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다른 무리엔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청년이 앞에 서있고, 역시 뒤로는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었다. 그 두 사람 중 한 명은 곽무였다.
“금 형, 둘 중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곡곤이 금발의 청년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신입 제자들이 입문한 날 곡 형이 이미 저들의 실력을 시험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에 저 방울을 달고 있는 소녀가 곡 형의 주먹을 완벽히 피해냈다고 하니 곡 형은 당연히 저 소녀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금발의 청년이 대답 대신 다시 곡곤에게 되물었다.
“혈맥무인은 일반 무인보다 훨씬 우월합니다. 백석의 실력이 나쁘지는 않지만 한낱 일반 무인일 뿐이지요. 이는 저번 순위전에서 몸소 체험했으니 잘 알 것입니다.”
곡곤이 웃으며 말했다.
곧 금발 청년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이번 신입 제자들 중, 백석은 우리 존영회(尊灵会)에서 데리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저 남봉이란 아이는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요.”
금발의 청년이 차갑게 말했다.
“좋습니다!”
곡곤이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길어지자, 백석과 남봉도 진기의 소모가 매우 커 그들의 표정에 점차 초조한 기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내 백석이 기합과 함께 한 걸음 힘차게 내딛으며 주먹을 뻗었다.
백석의 주먹에서 1장 정도 되는 뜨거운 기의 파도가 뿜어져 나왔다.
그 상태로 그가 팔을 옆으로 휘두르자 뜨거운 기의 파도가 세차게 솟구쳤다. 기의 파도는 연무대의 거의 절반을 훑고 지나갔다. 이는 남봉의 신법이 아무리 날쌔다 하더라도 간단히 피할 순 없는 것이었다. 남봉은 한순간 연무대 구석까지 몰렸다.
백석은 바닥을 박차고 남봉을 향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곧 백석이 두 손목을 앞으로 구부리자 그의 손에 은은한 빛이 서렸다.
“조용조(雕龙爪)!”
백석이 양손을 까다로운 각도로 휘둘러 남봉의 목 쪽을 할퀴었다.
남봉도 두 손을 빠르게 좌우로 휘둘렀다.
딸랑!
남봉과 백석의 몸이 교차하며 지나갔다. 곧 백석의 뒤에서 나타난 남봉의 아름다운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녀의 왼쪽 팔을 덮고 있던 옷은 크게 찢어졌고 그 사이로 드러난 백옥 같은 팔엔 다섯 개의 상처가 나있었다. 상처에선 피가 빠르게 뿜어져 나와 그녀의 팔을 곧 새빨갛게 물들였다.
남봉의 눈에 순간 분노의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백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남봉의 오른손에는 비수가 들려있었고, 그녀는 백석의 어깨를 향해 그 비수를 휘둘렀다.
남봉은 매우 분노했지만 이는 생사를 다루는 혈투가 아니었기에 살초를 쓰지는 않았다.
순간 백석의 모습이 약간 이상했다. 그는 착지한 자세 그대로 초점이 풀린 눈으로 앞만 보고 있었다.
앞에선 남봉이 비수로 들고 날아오고 있었지만, 백석은 그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