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존영각과 혈룡회
“위험해!”
“피해요!”
백석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석목은 눈빛을 번뜩이며 남봉을 바라봤다.
남봉과 백석이 전광석화와 같이 빠르게 교차했을 때, 다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전혀 눈치 해지 못했지만, 뛰어난 시력을 가진 석목은 달랐다.
백석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 건 남봉의 기이한 방울이었다.
이내 백석이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며 정신을 차렸다. 그가 정신을 잃은 시간은 고작 두 호흡 정도였지만 그 사이 남봉의 비수는 그의 어깨 바로 근처까지 다가와 있었다.
놀란 표정을 지은 백석은 순간 무수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바로 몸을 틀어 왼쪽 어깨를 오히려 비수 쪽으로 내밀곤, 은은하게 빛나는 오른손을 남봉의 급소 쪽으로 휘둘렀다. 양패구상을 노린 것이었다.
남봉의 눈에도 순간 놀란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멈출 수가 없었다.
그때, 사람의 머리만한 불덩이가 연무대를 향해 빠르게 날아가 두 사람 사이 바닥에 정확히 떨어졌다.
꽈르릉!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충격파가 용솟음쳤다. 백석과 남봉은 충격파에 휩쓸려 뒤로 튕겨져 나가, 한참을 뒷걸음질 치고서야 겨우 똑바로 섰다.
놀란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불덩어리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있었다. 석목과 소명이었다.
창백해진 얼굴로 양팔을 앞으로 뻗고 있는 소명의 손끝에는 아직 불빛이 조금 남아 있었다.
“소 형…….”
옆에 있던 석목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소명이 팔을 내려놓았다.
“술사다…….”
일순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연무대 위의 남봉도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백석만은 놀란 기색이 없었다. 백석은 남봉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연무대 아래의 소명을 바라봤다.
“흑염령 때문에 백 형이 상처받도록 놔둘 순 없었습니다.”
소명이 백석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백석도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백석이 곧 고개를 돌려 남봉에게 말했다.
“남 낭자의 혈맥은 과연 대단하더군요. 오늘 한 수 배웠습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이만 끝내는 것이 어떨지요.”
“그렇게 하죠. 제 능력에서 이렇게 빨리 벗어나다니 저도 꽤 놀랐습니다.”
백석에게 대답을 한 남봉이 방울을 딸랑거리며 연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연무대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곡곤과 금발 사내는 이 광경에 매우 놀랐다.
“신입 제자들 중 영근을 가진 자가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스스로 술법을 수련해 내다니! 화(火)속성 원소에 대한 교감능력이 굉장히 뛰어난가 보군!”
곡곤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때, 금발 청년은 곡곤이 말을 하는 사이, 이미 곡곤을 지나켜 연무대를 향해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곧 그 모습을 본 곡곤도 급하게 연무대로 향했다.
연무대 근처의 제자들은 곡곤과 금발의 청년 일행이 빠르게 다가오자 겁에 질려 분분히 길을 터 주었다.
연무대 아래로 내려온 백석과 대화를 하던 석목, 소명은 청년들이 다가오자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석목은 걸어오는 이들 중, 곡곤과 곽무가 있는 것에 꽤 놀랐으나 겉으로는 티내지 않았다.
“백 사제, 멀리서 비무를 하는 모습을 지켜봤어, 안본 새 더 정진했더군.”
금발의 청년은 백석과 매우 잘 아는 사이인 듯 하하, 웃으며 말했다.
“과찬입니다, 금 사형.”
백석은 금발의 청년에게 인사하고 뒤에 있는 곽무를 향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이 사제는 처음 보는군. 백 사제의 친구겠지?”
금발의 청년이 온화한 표정으로 소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백석은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소명을 쳐다봤다.
소명의 창백한 얼굴을 본 백석은 잠시 머뭇거리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친우 소명입니다.”
백석이 웃으며 말했다.
“소 사제였군. 신입 제자들이 입문한 날 본 기억이 있네. 당시 소 사제의 기개가 비범하다고 생각했는데 영근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구려. 화속성 원소에 대한 교감능력이 뛰어난 것 같으니 이제 종문 내에서 소 사제의 지위가 크게 높아질 것이네.”
그때, 곡곤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금발의 청년은 그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소 사제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니 체내의 법력이 바닥난 것 같네. 내게 마침 증령단(增灵丹)이 하나 있으니 받도록 하시게. 법력을 보충해 주는 효과가 있으니 복용하면 곧 상태가 회복될 것이야. 사양하진 말아주게.”
소명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곡곤이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 건넸다.
금발 청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증령단은 매우 귀한 단약이었다. 곡곤은 적어도 수만 냥은 호가하는 단약을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었다.
소명은 바로 받아들지 않고 머뭇거리며 옆에 있는 백석을 바라보았다.
“하하, 혈룡회의 재산은 과연 엄청나구려! 그런데 듣자하니 소 사제가 입문하던 날 곡 형에게 흑염령을 빼앗겼단 얘기가 있던데 사실인지 모르겠군.”
금발의 청년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신입 제자들은 입문 당시에 당한 일이 다시 떠오른 듯했다. 비록 다 티내진 못했지만 곡곤을 바라보는 시선은 일제히 곱지 않게 변했다.
소명의 눈빛도 살짝 가라앉았다.
곡곤도 소명의 표정변화를 눈치 채고 증령단을 천천히 거둬들였다.
“소 사제, 내 이름은 금환이오. 존영각 사람이지. 존영각엔 사제와 같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술사 학도가 많이 있소. 본 각의 다른 술사들과 교류한다면 분명 더욱 빨리 성장할 수 있을 것이오. 본 각에 들어오지 않겠소?”
금발의 청년, 금환이 매우 간절하게 말했다.
“물론 뛰어난 무인인 백 사제 역시 환영한다네.”
금환은 백석을 향해서도 말을 덧붙였다.
순간 옆에 서있던 석목의 눈빛이 흔들렸다.
석목도 존영각이란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존영각은 흑마문의 여러 조직 중에서도 세력이 꽤나 크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곳엔 실력이 뛰어난 후천무인과 술사 학도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허나 곡곤이 소속된 혈룡회와는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소 사제, 우리 혈룡회에도 두 명의 술사가 있어. 교류를 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네. 게다가 우린 술사에게 매달 무료로 단약을 나누어 주고 있어. 이 증령단도 그 중에 하나라네.”
곡곤이 급하게 말했다.
“소 사제, 존영각에서도 매달 증영단과 단약들을 무상으로 제공한다네. 뿐만 아니라 우린 영계술사의 깨달음이 담긴 책을 가지고 있어. 본 각의 한 선배가 남긴 것이지. 소 사제가 우리 존영각에 가입만 한다면 바로 읽을 수 있게 해주겠네.”
금환이 다시 소명을 향해 말했다.
연무대 주위에 있던 제자들은 존영각과 혈룡회가 소명에게 앞 다투어 초청을 하는 것을 보고 일제히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반면, 백석은 소명에게 관심을 뺏겼음에도 화는커녕 부드러운 미소만 짓고 있었다.
“영계술사의 친필 원고!”
소명이 기뻐하며 고개를 돌려 백석을 바라봤다.
백석은 말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아차 싶은 곡곤이 뭔가 더 말을 하려던 찰나, 소명이 먼저 말했다.
“존영각에 가입하도록 하겠습니다.”
금환이 매우 기뻐했다.
“매우 현명한 결정을 했네! 분명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거야! 백 사제는 어떤가? 존영각에 가입하지 않겠는가?”
금환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백석에게도 물었다.
“저도 사양하지 않고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백석이 웃으며 말했다.
금환은 그의 말을 듣고 더더욱 기뻐했다.
이내 곁에 있던 곡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앞이라 화를 내기도 곤란했다. 그러다 무리들 사이에서 다른 소녀와 대화하고 있는 남봉을 발견하고 살짝 웃으며 그 쪽으로 다가갔다.
“남 낭자, 안 본 사이 혈맥의 힘이 더욱 대단해졌군.”
곡곤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남봉이 고개를 돌리며 활짝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남 낭자의 타고난 자질은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우수한 것 같아. 참, 전에 했던 제안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는가?”
곡곤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남봉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남 낭자, 지금 신입 제자들의 실력은 차이가 크지 않지만 외부의 도움을 받는 제자들과 그렇지 않은 제자들의 차이는 점차 벌어질 것이야. 혼자만의 힘으로는 큰 성취를 이루기 힘들 것이네.”
남봉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백석과 소명을 한 차례 본 후, 잠시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곡 사형께서 거듭 초청하시니 더는 거절할 수 없겠군요. 가입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남 낭자, 오늘 바로 혈룡회 회장에게 소개시켜주도록 하겠네. 회장은 의리가 있고 호쾌한 분이지. 남 사매와 같이 뛰어난 혈맥무인이 가입하고자 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네.”
곡곤이 기뻐하며 말했다.
남봉은 옆에 있던 소녀와 몇 마디 더 나눈 뒤에, 곡곤을 따라 걸어갔다.
비무를 구경하던 제자들은 볼거리가 사라지자 슬슬 흩어졌다.
석목도 곧 백석과 소명에게 인사를 한 후 떠나려 했다.
“기다려요.”
백석이 석목을 불러 세우고 금환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금환이 두 눈을 빛내며 석목에게로 다가왔다.
“석 사제, 얘기를 들어보니 매우 비범한 실력을 가졌나 보더군. 혈맥을 각성한 혈맥무인이기도 하고. 입문 하던 날에는 곡곤의 주먹을 정면으로 받아냈다지? 원한다면 우리 존영각에 가입하도록 하게나.”
석목은 잠시 머뭇거렸다. 순간 마음속엔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강한 힘을 가진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곡 사형의 주먹을 받아낼 수 있었지요. 제 실력이 미천하여 금 사형의 호의를 거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곧 석목이 백석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웃어보였다.
금환은 괴이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각자 자신의 생각이 있는 법이니 강요하지는 않겠네.”
금환의 입장에선 신체가 강화되는 낮은 단계의 혈맥무인을 재차 초청할 필요는 없었다.
백석은 석목이 초청을 거절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에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도 더 이상 권유하지는 않았다.
석목은 열띠게 대화하는 백석, 소명을 보고 마음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석목이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던 그때,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 형제! 잠시 기다려.”
돌아보니 호탕하게 생긴 청년이 석목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곽무였다.
“곽 사형, 사형도 존영각의 사람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석목은 술을 좋아하고 호쾌한 곽무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일개 심부름꾼이지, 별거 아니야.”
곽무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곽무는 한숨을 쉬며 주위를 살피다, 다시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석 형제는 입문한지 얼마 안됐으니 잘 모르겠지만 사실 존영각과 흑룡회는 모두 최상의 실력자들이 모여 있는 조직이야. 실력 없는 사람이 무턱대고 가입하면 얻을 수 있는 혜택도 한정되고 무시당하고 배척을 당할 수도 있지.
필요할 때는 또 호출당해 싸움에 참여해야만 하고……. 조직에 들어가지 않고 자유롭고 사는 것만 못한 생활을 하게 될 수 있다는 말이야. 석 형제가 방금 제안을 거절한 것은 사실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네!”
“곽 사형의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석목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석목이 금환의 초청을 거절한 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가입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 곽무가 말했던 연유 때문이기도 했다.
석후폐맥의 영향으로 수련의 속도가 제한되는 상황에서 조직 간의 싸움에 시간까지 빼앗긴다면 오히려 득보다 실이 더 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곽 사형,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술 한 잔 하시지요.”
석목이 광장 쪽을 한번 쳐다보곤 말했다.
“하하, 나도 저쪽으로 가야하니 같이 가도록 하지.”
곽무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