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공간원소 친화력
석목이 원형 석판에서 걸어 내려오며 물었다.
“친화력이 3급 이상 나왔습니까?”
석목이 괴이한 표정을 하고 있는 노인을 떠보듯 물었다.
“허, 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노인이 기괴한 표정으로 석목을 위아래로 쳐다봤다.
“제 몸에 무언가 이상이라도 있습니까?”
노인의 대답에 기뻐하던 석목은 다시 그의 눈빛을 보고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사는 무인과 달리 친화력의 정도가 그 사람의 잠재력 크기를 대표한다. 3급 이하의 친화력을 가진 자는 성계술사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보지. 해서 본 문에서는 3급 이상의 친화력을 가진 자만 자원을 투자해 육성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 만약 5급 이상의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론상으론 월계술사가 될 가능성도 있지.”
노인이 시선을 거두고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여기까지 들은 석목은 한껏 상기된 눈빛으로 옆에 있는 검은 수정 기둥을 바라봤다.
노인은 석목의 행동을 본 후 고개를 가로젓고,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네가 만약 흰색과 검은색 수정이 아닌 다른 수정 기둥을 다섯 칸 밝혔다면 종문에선 네게 매우 특별한 대접을 했을 것이다. 허나 검은 수정기둥이 대표하는 것은 공간원소로 효용가치가 매우 낮다.
공간원소는 시간원소 바로 다음으로 희소하기 때문에 흑마문의 역사 전체를 뒤져봐도 해당 친화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하여 정식적인 수련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법술사와 혼사가 그나마 가까운 영역이지만 그 두 술사가 사용하는 술법을 수련하기 위해선 남들보다 2배 이상의 공을 들여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높은 경지에 오르기는 거의 불가능 하다.”
석목은 노인의 말에 크게 실망했으나 잠시 후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석목은 영법전에 들어오기 전까지, 자신이 술사의 소질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한데 뜻밖에 갑자기 술사학도가 되게 생겼으니 이는 오히려 굉장히 기뻐해야 하는 일이었다.
석목의 기억대로라면 광원전에서는 술사학도만 되더라도 큰 보수의 임무를 받을 수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석목이 물었다.
“그렇다면 저는 정식 술사학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석목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파란색 기둥과 빨간색 기둥을 바라봤다. 두 기둥 모두 세 칸을 채우지 못했다.
“그건 문제없다!”
노인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럼 진법술사가 될 수 있는 것인가요?”
노인의 대답을 들은 석목이 흥분한 기색으로 재차 급하게 물었다.
“너로서는 진법술사와 혼사 외에는 애초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노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노인의 말투는 굉장히 까칠했으나 석목에게는 매우 아름답게 들렸다. 만약 정말 진법술사가 될 수 있다면 앞으로 수련을 위한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석목은 몹시 들떠서 마음이 자꾸만 벅차왔다.
“술사학도로 등록하는 곳으로 안내하겠다. 따라오너라!”
노인은 술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흥분하는 사람들을 이미 여럿 본적이 있었다. 하여 석목을 상대하지도 않고 즉시 전당의 뒤편으로 향했다.
평범해 보이는 벽을 더듬거리자 갑자기 숨겨져 있던 사람 높이의 문이 생겨났다. 석목은 기관설계의 교묘함에 놀라며 재빨리 노인을 뒤쫓았다.
숨겨진 문 뒤의 통로는 길지 않아 두 사람은 곧 어느 밀실에 도착했다.
밀실의 공간은 크지 않았고 내부의 배치는 굉장히 간결했다. 바닥의 중앙에는 무수한 은색 문양과 알 수 없는 문자로 빼곡한 진법이 새겨져 있었다.
“어서 들어오지 않고 뭘 그리 멍청히 서 있느냐?”
이미 진법의 가운데 서있던 노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석목을 향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내 석목이 급하게 진법의 가운데로 들어오자 노인은 그제야 노란색 부적을 꺼냈다. 노인이 부적을 살짝 흔들자 부적의 끝단에 불이 붙더니 빠르게 불타올랐다. 불에 탄 부적은 노란색 빛으로 변하더니 진법에 흡수되었다.
웅-
공기의 떨림이 전해졌다.
바닥의 은색 문양과 문자가 살아있는 듯이 꿈틀거리더니 그 사이에서 흰빛이 새어나왔다. 잠시 후, 그 빛이 매섭게 터져 나오며 석목과 노인을 감쌌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 * *
석목은 잠시 어지러움을 느끼다 눈을 떴다.
이곳은 지하의 어느 전당이었다.
전당 내부는 모두 알 수 없는 푸른 돌로 장식돼 있었고, 면적은 100평정도 되었다. 내부가 텅텅 비어있는 전당은 매우 광활하고 웅장하게 느껴졌으며, 천장에는 수십 개의 야명주가 끼워져 있어 꼭 아침처럼 밝았다.
전당 가운데에는 거대한 푸른색 석판이 벽처럼 솟아 있었다. 석판의 한 면에는 맹수의 머리모양을 한 커다란 청동향로가 놓여 있었고, 갓난아기의 팔 두께정도 되는 두꺼운 보라색 향초도 향로 안에 꽂혀있었다. 향초의 머리 부분에는 이미 검게 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석목은 거대한 석판에서 시선을 멈췄다.
푸른색 석판에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백개가 넘는 문양이 새겨져있었다. 가장 위에는 담홍색 별 문양 2개가 있었고, 그 밑에는 녹색 구름문양 8개가 새겨져 있었다. 또 그 아래로는 동그란 문양 100여개가 새겨져 있었다. 모두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는 그 문양들은 매우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냈다.
석목은 석판에 새겨진 문양들을 보고, 곽무가 흑마문에는 술사가 10명, 술사학도는 100여명 정도 된다고 얘기해줬던 것을 떠올렸다.
“말하지 말거라. 두리번거리지도 말고.”
노인이 갑자기 엄숙한 표정으로 힘차게 말했다.
노인의 말을 들은 석목이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고 공손하게 섰다. 노인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가 향초를 손으로 부채질했다.
향초 윗부분이 불도 없이 스스로 빛나기 시작해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잠시 후, 푸른 석판의 왼쪽 위에 새겨진 별 문양이 반짝거리더니 담홍색 빛을 뿜어냈다. 빛은 향로 위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모호한 환영으로 변했다.
그 환영은 장발을 한 중년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 사숙!”
노인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술사의 소질을 가진 제자가 새로이 나타난 것인가?”
사 사숙이라고 불린 중년 사내가 노인의 뒤에 서있는 석목을 보고 물었다.
노인은 사 사숙에게 석목의 원소 친화력을 측정했고, 석목이 5급 공간원소 친화력을 가졌다는 사실과 2급의 화속성 친화력, 1급의 수속성 친화력을 가졌다는 것을 정중하게 설명했다.
“공간원소 친화력 5급?”
중년 사내가 매우 놀라워하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석목을 바라봤다.
깜짝 놀란 석목은 급하게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한참 뒤, 사내가 물었다.
“석목입니다.”
석목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5급 친화력이 매우 귀하기는 하나 공간속성이라는 것이 아쉽구나. 본 문이 세워진 이래로 이렇게 높은 공간속성 친화력을 가진 자가 없었으니 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중년 사내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석목은 그의 말을 듣고 살짝 긴장했다.
“이렇게 하지. 네게 두 가지 선택권을 주겠다. 하나는 관례에 따라 평범한 술사학도의 기준에 따른 자원을 지원받는 것이다. 대신 이외의 다른 혜택은 제공되지 않는다.”
중년 사내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석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사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영원히 흑마문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그럼 성계술사인 이 몸이 직접 네게 가르침을 내릴 것이다. 뿐만 아니라 평범한 술사학도의 몇 배에 달하는 자원을 제공할 것이다. 만약 네가 천부적인 능력을 보인다면 이후에 내 수제자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
이어진 중년 사내의 말에 노인이 놀라운 표정으로 석목을 바라봤다.
“종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첫 번째 선택지를 고르겠습니다.”
석목은 잠깐 생각하더니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일생동안 흑마문을 떠날 수 없다면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자유가 없다면 아무리 강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중년 사내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벽에서 흰 빛이 뿜어져 나와 한곳으로 모였고, 이내 손바닥 크기의 원형 옥패로 변해 석목에게로 날아갔다.
“그 위에 피를 한 방을 떨어뜨려라.”
중년 사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석목은 잠시 머뭇거리다 손가락을 그어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중년 사내의 손에서 흰 빛이 나와 옥패로 발사되었다.
옥패는 은은하게 빛나다가 중앙에서부터 붉은색 빛이 솟아나오더니 곧 푸른 석판에 흡수됐다. 각가지 문양이 새겨져 있던 그 푸른 석판의 가장 아래에는 동그란 문양이 새로이 생겨났다.
잠시 후, 옥패에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던 빛이 한 곳으로 모이더니 마찬가지로 동그란 문양이 생겼다. 그 문양은 푸른 석판에 새롭게 생겨난 문양과 호응이라도 하듯 동시에 빛났다.
옥패의 가장자리엔 빨간 글씨로 석목의 이름도 새로 생겨났다.
옥패의 다른 한 면에는 여러 개의 부호와 문자로 구성된 핏빛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이 네가 본 문의 술사라는 신분을 증명해 줄 것이니 절대 잃어버리지 말도록 해라. 지금부터 너는 본 문의 정식적인 술사학도다.”
중년 사내가 말했다.
“예. 기억하겠습니다.”
석목이 두 손으로 옥패를 받아들며 공손히 말했다.
중년 사내는 고개를 끄덕인 후, 노인을 바라봤다.
“이후는 네가 안내하거라.”
중년 사내는 피곤하다는 듯 노인에게 지시를 내리곤 왔을 때와 같이 다시 빛으로 변해 별 문양으로 흡수돼 사라졌다.
급하게 대답한 노인은 사내의 신영이 완전히 사라진 후 몸을 일으켰다.
“따라오너라.”
노인은 석목을 한번 쳐다보고 한쪽 귀퉁이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손에 든 옥패를 위아래로 관찰하던 석목은 급히 노인의 뒤를 쫓았다.
이윽고 한쪽 벽에 도착한 노인이 벽을 가볍게 두 번 두드린 후, 손을 흔들어 벽에 흰빛을 쏘았다.
카가각-
벽에서 소리가 들리며 사람 하나가 지나갈 수 있을만한 크기의 구멍이 생겼다. 하지만 그 구멍은 푸른빛의 장막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옥패를 이용해 길을 열고 나를 따라 오거라. 미리 경고하자면 들어간 후에는 내 허락 없이 아무것도 만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무언가 건드려서 발생하는 일에 대해서는 네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노인이 허허 웃으며 푸른빛의 장막을 지나 사라졌다.
석목은 앞으로 다가가 옥패를 푸른빛의 장막에 가져다 댔다. 곧 푸른빛이 반짝이더니 두 방향으로 갈라졌다.
* * *
빛의 장막을 통과하자 안에는 검은 복도가 이어졌다.
복도에 서있던 노인은 석목을 향해 손짓하곤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노인을 따라 반각 정도 걷자 한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은 보기엔 매우 평범해 보였다. 책장 8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책장 위에는 다양한 종류의 옥간이 놓여있었다.
선반 위의 옥간은 모두 각양각색의 빛으로 덮여있었다.
“이곳은 술사의 비급을 보관하는 곳이다. 본 문의 정식 술사학도가 됐으니 규정에 따라 원하는 비급을 하나 선택할 수 있다.”
노인이 말했다.
석목은 매우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금세 노인의 경고를 기억해낸 석목은 섣불리 책장에 다가가지 않았다.
“제가 아직 선배님의 존함을 묻지 않았군요.”
석목은 갑자기 기억났다는 듯 돌아서 노인의 이름을 물었다.
“노부의 이름은 손안이다. 손 사숙이라 부르면 된다.”
노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석목이 정식으로 술사학도로 인정받아서인지, 손안의 말투는 전보다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