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법력
“이해가 안 가는 것이 하나 있어 사숙에게 여쭙고 싶습니다.”
석목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게 무엇이냐?”
손안이 말했다.
“장경각에서 술사의 비급을 봤는데 수가 이곳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곳 비급과 비교해 이곳에 뭔가 특별한 점이 있습니까?”
석목이 궁금했던 점을 질문했다.
석목을 한번 쳐다본 손안은 콧방귀를 뀌고 천천히 답했다.
“장경각의 비급은 큰 종문이라면 대부분 소유하고 있는 상대적으로 평범한 비급이다. 본 문의 제자라면 원소 친화력이 없더라도 흑염령으로 교환할 수 있지. 허나 이곳 영법전의 비급은 다르다. 수량은 적지만 우리 흑마문 술법의 정수가 모두 담겨있지. 푸른 석판에 문양을 남긴 정식 술사학도만이 수련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석목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 하도록. 이제 이곳의 금제를 잠시 풀 것이니 마음에 드는 비급을 하나 고르도록 해라.”
약간 짜증 섞인 투로 말한 손안이 주문을 외우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옥간을 덮은 빛의 장막이 몇 번 반짝인 후 천천히 사라졌다.
금제를 푼 손안은 석실 한 귀퉁이로 가 뒷짐을 지고 천장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석목은 눈앞의 옥간을 보고 흥분한 듯 호흡이 조금 가빠졌다.
장경각에서는 어떤 비급을 고르더라도 흑염령 6개가 필요한데 그보다 가치가 높은 술법을 대가없이 배울 수 있다니. 확실히 술사에 대한 대우가 무인보다 좋았다.
석목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가슴을 진정시킨 뒤 가장 가까이 있는 책장으로 다가갔다.
반 시진 후, 석실에 보관된 100여 가지 비급을 전부 훑어본 석목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곳에 있는 비급 대부분은 수련을 위한 비급이 아닌 보조비급이었다.
지금 석목이 들고 있는 진화현령술(真火玄灵术)을 예로 들면 이름은 굉장히 멋있었지만 사실 화속성 단약을 정제하기 위한 보조비급으로, 수련한다면 화속성 단약을 정제할 때 효과를 다소 증가시켜줄 뿐이었다.
이 외에도 연단술을 간단히 하거나 생소한 약초를 기르는 법, 부적이나 진법을 만드는 법, 여러 법기를 만드는 방법 등 여러 비급이 많이 있었으나 대부분이 다 보조비급이었다.
결국 진정한 수련을 위한 비급은 아주 드물었다. 겨우 10여개의 법문이 있긴 했지만 이 대부분도 오행술사를 위한 법문이었고 풍, 뇌, 빙 등 속성의 술사에게 적합한 법문은 고작 2개 뿐이었다.
진법술사, 부적술사, 혼사가 수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온신술이라는 이름의 비급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온신술 또한 이들만을 위한 비급은 아니었다. 온신술은 수련하는데 있어 원소 친화력에 대한 요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어떤 종류든 영근을 가진 술사라면 누구나 수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석목은 실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손 사숙, 어찌 이 많은 비급 중에 수련을 위한 비급이 겨우 이것 밖에 없습니까?”
석목은 한참을 찾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구석에 서있는 손안에게 물었다.
“수련비급은 연단술이나 진법서, 무인의 심법보다 훨씬 진귀하고 희소하다.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는 수련비급은 거의 모두가 성계술사가 될 때까지 수련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장경각에서 보관하고 있는 수련법은 대부분 비급이 온전하지 않거나 술사 견습생 시기에만 잠깐 사용하기 적합할 뿐이다.”
손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온신술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석목이 책장에서 회색 옥간을 꺼내들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손안은 석목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허허, 온신술을 얕보지 말거라. 위력과 수련의 속도는 다른 수련비급보다 느리지만 흑마문 내에서 월계술사가 될 때까지 수련할 수 있는 3대 수련비급 중의 하나다! 적합한 법문을 찾지 못했다면 온신술을 선택하는 건 탁월한 선택이라 할 수 있어!
온신술은 수련 속도는 느리지만 체내에 쌓이는 법력이 정순하고 안정적이라 수련을 하다 주화입마에 빠지는 경우가 매우 적다. 법력의 안정성은 진법술사와 혼사에게 특히 중요하기에 너에게 매우 적합하다고 할 수 있지.
애초에 너는 공간 친화력만 높아 다른 수련비급은 거의 수련할 수 없을 테니 이 술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손안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석목은 어이가 없었지만, 손안의 말에도 틀림이 없었다. 온신술을 택하지 않고 1급이나 2급 친화력을 가진 수속성이나 화속성 술법을 선택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석목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온신술이 기록된 옥간을 손안에게 건넸다.
“손 사숙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 술법을 선택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손으로 옥간을 전해 받은 손안은 품에서 흰색 옥간을 꺼내 두 옥간을 번갈아 이마에 대며 무언가를 읊조렸다.
잠시 후, 손안이 석목에게 백색 옥간을 건네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온신술의 초반부 다섯 단계가 담겨있다. 잘 수련한다면 영계술사까지 충분히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옥간은 잘 챙겨두도록 하고 추후 영롱각(灵珑阁)에 찾아가 술사학도에게 지급되는 자원을 수령하거라!”
초반부 다섯 단계만 담겨 있다는 말을 들은 석목은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해가 갔다. 이제 겨우 술사학도가 된 그에게 월계술사까지 오를 수 있는 수련법문을 전부 줄 수는 없었을 터였다.
‘남은 뒷부분을 얻기 위해서는 흑염령이 굉장히 많이 필요할 것 같군.’
석목은 그렇게 생각한 뒤 옥간을 정중히 받아 챙겨 넣었다.
이어 손안은 혈경각의 몽고와 같이 몇 마디 당부를 더하고 주저 없이 축객령을 내렸다.
석목은 손안에게 예를 표하고 영법전 밖으로 나섰다.
* * *
영법전을 둘러싸고 구경을 하던 제자들은 어느새 다 돌아간 듯했다. 전당 밖은 이미 텅텅 비어있었다.
석목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1각 후, 석목은 어느 누각 앞에 도착했다. 누각 대문에는 ‘영롱각’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있었다. 대문은 열려 있었고 주위엔 인적이 없었다.
그때, 어렴풋이 영롱각의 내부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롱각이라 적힌 현판을 본 석목은 가슴이 살짝 벅차올랐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석목이 막 발걸음을 내딛은 그 순간이었다. 영롱각 안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둘은 정면으로 부딪힐 뻔했지만 다행히 석목이 빠르게 몸을 멈춰 세웠다.
석목이 고개를 들자, 마르고 키 큰 청년이 보였다. 석목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더 큰 그는 매우 말라 두 볼이 깊이 패여 있었고, 마르고 긴 팔다리는 마치 대나무 장대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용모는 수려하지 않아도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꽤 상당한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병급제자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나이로 미루어 보아 신입 제자는 아닌 듯해 보였다. 영롱각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술사일 것 같았다.
석목은 속으로 여러 생각을 하며 몸을 한 쪽으로 비켜 길을 터주었다.
석목은 청년의 뒷모습을 잠시 본 후 영롱각 안으로 향했다.
영롱각 내부 구조는 매우 단순했다. 정면에 긴 나무책상이 있었고 책상 뒤에는 30대로 보이는 사내가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새로운 술사학도인가?”
사내가 석목에게 물었다.
“맞습니다. 술사의 자원을 수령하러 왔습니다.”
석목이 품에서 옥패를 꺼내 사내에게 건넸다.
사내는 옥패를 받아들고 그 위에서 어느 진청색의 판을 흔들었다.
그러자 옥패에서 빛이 나오며 진청색 판으로 날아갔다. 빛을 흡수한 진청색 판은 순간 번쩍거렸고, 곧 표면에 석목의 이름이 나타났다.
무뚝뚝한 사내는 고개를 끄덕인 후 석목에게 옥패를 돌려줬다.
* * *
반 시진 후, 석목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석목은 흥분한 표정으로 방문을 닫고, 품에서 작은 청색 주머니를 꺼내 들어있는 물건을 확인했다.
주머니 안에는 흑염령 12개, 청색 약병 1개, 그리고 붉은 돌과 파란 돌이 각각 하나씩 들어있었다. 석목은 먼저 흑염령 12개를 봤다.
술사에 대한 지원은 확실히 일반 무인보다 훨씬 많았다. 다른 것은 제쳐두더라도 일단 흑염령을 12개나 더 받은 것만 하더라도 보통 제자들은 결코 누릴 수 없는 큰 혜택이었다.
영법전 푸른 석판에 그려진 문양 개수를 고려했을 때,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흑마문 전체를 통틀어도 고작 100여 명에 불과했다.
곧이어 청색 약병 뚜껑을 열자 안에서 상쾌한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약병 안에는 엄지손가락만한 청색 단약 3개가 들어있었다.
석목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 단약은 술사의 법력을 빠르게 보충해주는 증령단이었다. 증령단은 상황에 따라선 전투 도중 술사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돕는 매우 귀한 물건으로, 이 증령단 3개의 가치만 해도 10만 냥은 훌쩍 웃도는 것이었다.
약병을 내려놓은 석목은 이번엔 붉게 빛나는 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붉게 빛나는 돌은 비둘기 알만한 크기였고 안쪽에 언뜻 기류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그건 바로 영석이었다.
빛이 화염과 같이 붉은색을 띠는 것으로 보아 이는 오행영석 중에서도 화영석으로 보였다. 안에서 흐르는 기류는 정순한 영력이었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3개 모두 하품의 영석이었지만 가치는 증령단만큼 귀했다.
영석을 처음으로 접한 석목은 한참을 이리저리 만져봤다.
자원은 이것들이 전부였다. 이 자원은 술사학도인 석목에게 앞으로 매년 한 번씩 제공되는 것이었다.
석목은 다시 마음을 진정시켰다. 눈앞의 자원들은 단순히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했고, 정말 실력을 정진하기 위해선 반드시 노력이 더해져야만했다.
이내 석목이 품에서 온신술의 옥간을 꺼내 이마에 가져다 댔다. 곧 옥간의 내용이 머릿속에 촘촘히 떠올랐다.
1각 후, 석목은 옥간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한번 훑어봤다.
온신술 초반부의 다섯 단계는 수련방식에 있어 반야천상공, 대력마원 탈태결과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본질적으로 자연의 기를 인체에 흡수한다는 사실은 같지만 진기보다 더욱 정순한 법력으로 전환시켜 체내에 축척한다는 점이 달랐다. 게다가 상응하는 원소에 대한 친화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기에 이는 심법을 수련하는 것보다 난이도가 훨씬 더 높았다.
온신술을 수련하면 한 단계가 높아질 때마다 체내의 법력이 2배로 증가하고 5단계까지 전부 수련하면 영계술사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매우 뛰어난 소질을 가진 술사라면 한 단계를 수련하는데 1~2년이 소요되고 자질이 떨어지는 자는 3~4년이 걸린다고 한다.
2단계를 수련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은 1단계의 2배고, 마찬가지로 3, 4, 5단계를 수련하기 위해서도 각각 앞 단계의 2배씩 걸렸다.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술사라 해도 온신술을 5단계까지 전부 다 수련하기 위해선 최소 30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석목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제야 영계술사 이상의 술사가 왜 이렇게 희소한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온신술은 수련하기는 어렵지만 3단계에 도달한 후에는 기폭술(气爆术)이라 불리는 술법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되고 5단계까지 수련하면 기환용(气环桩)이라는 술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한 시진 후, 옥간을 이마에서 떼어낸 석목은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술사로서의 앞날은 상상이상으로 험난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중도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옥간을 챙겨 넣은 석목은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온신술의 다섯 단계는 이미 전부 다 외운 상태였다. 한 번 더 자세히 상기하며 틀림이 없음을 확인한 석목은, 다시 온신술의 1단계를 법결(法诀)에 따라 천천히 운기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석목의 정신은 점점 어느 심오한 영역에 빠져 들어갔다. 눈을 뜨진 않았지만 주위의 풍경이 보이는 듯도 했다.
곧 석목은 주위 모든 것이 맑고 투명해지는 듯하다, 허공에 점점 작은 빛들이 나타나 천천히 몸속으로 흡수되는 것을 느꼈다.
빛들은 석목의 체내에서 정순한 법력으로 변해 경맥을 유유히 흘러 다녔다. 그 법력은 극히 적어 체내의 진기와 충돌을 일으키진 않았다.
시간이 천천히 더디게 흘러갔다.
석목의 체내에 쌓인 법력은 점차 단전에 모여들었고, 법력은 석목이 움직이고자 하는 대로 실처럼 변해 체내를 일주천(*一周天: 임맥, 독맥을 통해 진기를 한 바퀴 돌리는 것)했다.
그리고 그 법력이 머리 부근에 도달했을 때 돌연 이변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