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규칙
“금 사형, 갑자기 석목에게 흥미를 가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석목의 실력이 나쁘지는 않다만 사형의 눈에 들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곽무가 금환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는 것이 무엇이냐? 소문은 아직 나지 않았지만 석목은 한 달 전 영법전에서 술사의 천부적 소질이 있다는 것을 검증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 소질도 결코 낮지 않다 하더군.”
금환이 눈빛을 반짝이며 천천히 말했다.
“술사의 소질이요?”
금환의 말을 들은 곽무가 크게 놀랐다.
“이 사실은 아직 다른 세력이 알지 못하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반드시 우리 존영각으로 끌어들여야해. 운 좋게도 그 아이가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모두 우리 존영각에 소속돼있다. 너는 그 아이와 최대한 가깝게 지내면서 절대 다른 세력에서 채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금환이 잠시 생각하다 낮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금 사형, 걱정하지 마십시오.”
곽무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금환은 몇 가지 더 지시를 내린 후 떠났다.
곽무는 금환이 떠나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 골짜기에서 도를 든 석목이 걸어 나왔다. 곽무는 급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석목을 반겨주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석목, 곽무는 11호와 12호 봉우리 사이에 있는 골짜기에 도착했다.
무성한 푸른 나무로 그늘진 골짜기엔 거대한 원형 광장이 있었다. 면적은 족히 4~500평은 돼보였고 광장에는 연무대 10개가 줄지어 있었다.
그 광장에는 검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북적하게 모여 있었다.
1,000명이 훨씬 넘는 제자들이 연무대를 다 둘러싸고 있었고 그들 사이 이곳저곳에선 시끄러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력이 매우 뛰어난 석목은 광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멀리 10개의 연무대에서 이미 누군가 비무를 펼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비무를 펼치는 사람들 곁엔 소매에 ‘을’자가 수놓아져 있는 사람이 한 명씩 서있었다.
을급 제자들이 바로 시합의 심판인 듯했다.
광장은 연무대 주위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환호성과 열기로 가득했다.
“석 달에 한 번 진행되는 순위전은 오직 우리 병급 제자들을 위한 대회라네. 갑급과 을급의 제자들은 참여하지 않지. 대회의 목적엔 무예를 갈고 닦는 것도 있지만 가장 주된 목적은 병급제자의 순위를 정하기 위한 것이라네. 매년 한 번 있는 승급전을 위한 준비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지.”
곽무가 말하는 동시에 손을 뻗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석목이 곧 그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광장 한 쪽에 10장이 넘는 높이의 거대한 검은색 비석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비석엔 위에서 아래로 은색글씨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거리는 100장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석목이 시력을 살짝 집중하자 비석에 적힌 은색 글자가 다 보였다. 적혀 있는 것은 전부 사람의 이름이었다.
입문한 후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보는 병급제자의 순위였다.
석목의 얼굴 위로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비석의 가장 위에 적혀 있는 이름은 단천리였고 그 아래로 순위에 따라 이름이 줄지어 있었다.
“설마 여기서 저 비석의 글씨가 보이는가?”
곽무가 비석을 집중해서 보는 석목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글자가 보이기는 하나 선명하게 보려면 더 가까이 가야할 것 같습니다.”
석목이 살짝 웃으며 설명했다.
대화를 하는 사이, 두 사람은 비석 주위에 도착했다.
이곳엔 100명 이상의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석목과 같이 입문한 신입 제자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근처에는 여러 제자들 사이 둘러싸인 남봉도 보였다. 기백이 전보다 더욱 넘치는 것으로 보아 혈룡회에서 얻은 수확이 적지 않아 보였다.
신입 제자들 사이에 남봉은 이미 유명인이었다. 비석 주위의 몇몇 사람들은 남봉을 보며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석목은 남봉을 한번 보고 시선을 돌려 비석의 순위를 봤다.
“곽 사형, 이곳에 1위라고 적혀있는 단천리는 어떤 사람인가요?”
석목이 눈을 가늘게 뜨며 비석의 가장 위에 적힌 이름을 보고 물었다.
“단 사형 말인가? 매우 신비로운 사람이지. 평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극히 드물어 나도 몇 번 본적이 없어. 저번 승급전에서도 이미 후천중기의 무인에 해당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어. 소문에 따르면 바람계열의 술사학도라 하더군.”
곽무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석목은 깜짝 놀랐다. 병급제자 중 서열 1위가 자신과 같이 무공과 술법을 동시에 수련한 사람일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보아하니 무공과 술법을 잘 섞어 사용하면 실력이 배로 오를 수 있는 것 같았다.
“순위전은 언제나 선천무인인 장로 한 분과 몇몇 을급 제자들이 주관을 해. 한데 장로님은 지금 자리에 안 계신 듯하군.”
곽무가 비석 근처에 높이 솟은 관람대 방향을 바라봤다. 그 위에 놓인 보라색 등나무로 제작된 좌석이 텅 비어있었다.
“곽 사형, 제가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순위전의 규칙에 대해 잘 모릅니다. 혹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석목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하하! 당연히 가능하지. 병급제자는 사람이 많지만 제자들끼리 서로의 실력을 잘 파악하고 있지. 때문에 충분한 자신이 있지 않는 이상 상대에게 무턱대고 도전하진 않는다네. 해서 대부분 순위가 고정적이지.
그렇기에 비무대회의 규칙 역시 매우 간단하다네. 첫날에는 신입 제자들끼리 비무를 진행하고 둘째 날은 신입제자들이 기존의 제자들에게 도전을, 셋째 날은 기존 제자들끼리 도전을 하지.
순위전에서는 술법과 무공, 무기와 법기의 제한을 두지 않고 생명을 빼앗는 것 이외에는 모든 수단이 허용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하네.”
곽무가 규칙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군요!”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일이니 그리 예의 차릴 필요 없네. 참, 사제와 함께 입문한 제자들을 제외하고도 올해 종문엔 신입 제자들이 총 4차례나 입문했네. 대략 3~400명이라 하더군.”
곽무가 손사래를 치며 설명을 덧붙였다.
석목은 다시 시선을 돌려 비석의 아랫부분을 봤다. 그곳엔 붉은색으로 수백 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위의 은색으로 적힌 글씨와는 확연히 구분됐다.
석목의 이름은 가장 마지막 100명의 사람들과 함께 적혀 있었다. 그 100여명이 바로 석목과 합께 입문한 신입 제자인 듯했다.
“둘째 날 비무에서 신입 제자가 기존 제자와 겨뤄 이기면 높은 순위에 오를 수 있고 상당히 많은 포상을 받을 수 있다네. 허나 신입 제자와 기존 제자의 실력 차는 상당하기에 도전하긴 너무 이르다 생각되네.
만약 승급전에서 좋은 결과를 얻고 싶다면 신입 제자들 사이에서 앞 순위를 노리는 게 제일 좋을 거야. 종문에서는 신입 제자들 중 10위 안에 든 사람에게 일정한 포상을 내린다네.”
곽무가 말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석목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인 뒤 예를 표했다.
“하하, 그저 경험을 이야기 했을 뿐이니 고마워할 필요 없네.”
곽무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순위전에 관한 주의사항 몇 가지를 더 물어 본 석목은 곽무에게 작별을 고하고 연무대로 향했다.
곽무는 멀어지는 석목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흐르자 비무는 더욱 격렬해졌다.
신입 제자들은 1년간 전투를 면제 받았기에 비무대회에 참가할 필요가 없었다. 허나 대다수의 신입 제자들은 입문 후 진보한 자신의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에 참여하길 더 원했다.
석목은 무턱대고 연무대에 오르지 않고, 연무대 몇 개를 오가며 비무를 관람했다.
5호 연무대에서 덩치가 큰 소년이 녹발의 소년과 겨루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장검을 사용하는 후천초기의 무인이었다.
덩치가 큰 소년의 검법은 매우 자유분방했다. 진기를 주입하여 휘두르는 검에선 검풍이 맹렬하게 휘몰아쳐 몇 장 밖까지도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녹발의 소년은 검풍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듯 마치 흔들리는 강아지풀처럼 상대의 검초를 전부 피했다.
녹발의 소년은 손에 쥔 장검으로 가끔씩 반격을 했다. 단순한 찌르기였지만 그 속도는 매우 빨라서 공격이 마치 한줄 검은색 선 같이 보였다. 그가 공격을 할 때마다 덩치 큰 소년은 정신없이 혼란스러워했다.
비무가 길어지자 싸움의 양상은 점점 변화했다.
녹발 소년의 몸놀림은 여전히 한적한 정원을 걷듯 여유로웠지만 덩치가 큰 소년은 진기의 소모가 매우 큰 듯 검법의 속도가 많이 느려져 있었고 호흡도 거칠고 가빴다.
바로 그때, 녹발의 소년이 손을 휘둘러 검을 막아 낸 후 몸 앞쪽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마치 활을 떠난 화살이 된 듯, 빠르게 상대의 하체를 향해 장검을 찔렀다.
장검에서 희미한 금빛이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폭발한 듯 수십 개의 검영이 생겨났다.
쾅!
덩치 큰 소년은 급하게 검을 휘둘러 방어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곧 거대한 힘에 밀려 연무대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덩치 큰 소년은 안간힘을 써도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검에 몇 번 찔렸는지 몸에선 피가 많이 뿜어져 나왔다.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상처가 위중해 아마 보름정도 침상에서 치료에 전념해야 할 것 같았다.
흑의를 입은 잡역제자가 몇 명 달려와 덩치 큰 소년을 들어 올렸다. 연무대 위의 을급 제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녹발 소년의 승리를 선포했다.
연무대 주위에서 구경하던 제자들도 떠들썩해졌다. 저마다 녹발 소년의 검법에 대한 의견을 분분히 내놓았다.
석목은 사람들 사이에서 녹발 소년이 연무대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다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7호 연무대에선 남녀 2명이 맨 손으로 싸우고 있었다. 소년은 특수한 무예를 익힌 듯했다. 하얀 빛이 그의 두 손을 감싸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주먹이 마치 옥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두 손을 펼쳐 칼처럼 위 아래로 휘두르며 세차게 소녀를 공격했다.
소녀는 몸에 꼭 달라붙는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드러난 몸 선이 아주 아름답고도 가냘파보였지만 사용하는 무예는 매우 사나웠다. 소녀는 다섯 손가락을 매의 발톱처럼 구부려 소년의 공격에 정면으로 맞섰다.
펑! 펑!
연무대에서 충돌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공격을 공격으로 맞받아치는 두 사람의 격투는 매우 격렬했다.
한바탕 충돌한 후, 두 사람은 동시에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성난 표정의 소년이 몸을 멈춰 세우고 탄환처럼 도약했다. 소년은 백옥 같은 양손을 잡아 깍지를 낀 채 망치처럼 그녀를 내려찍었다.
내려찍는 도중, 소년의 소매가 엄청난 힘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져 근육질의 탄탄한 팔이 드러났다.
소년의 공격이 범상치 않음을 느낀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낮게 기합을 질렀다. 곧 소녀의 구부린 손가락에 붉은 빛이 모여 날카로운 가시처럼 변했다. 소녀의 양손은 이내 잔상을 만들고 낙하하는 소년을 공격했다.
두 사람이 다시 한 번 뒤엉키며 승부가 갈렸다.
소년의 양 어깨에 각각 5개씩 구멍이 뚫려 피가 흘렀다. 소년은 창백한 안색으로 연달아 뒷걸음질을 쳤고, 힘없이 쳐져있는 두 팔은 더 이상 싸울 수도 없어 보였다.
소녀의 안색도 살짝 창백했으나 그녀의 몸에는 조금의 상처도 없었다.
승패가 명확하게 갈린 것이었다.
석목은 푸른 옷의 소녀를 보며 자신이라면 어떻게 저 소녀를 상대했을지 조용히 한번 생각해보았다.
1호 연무대에선 두 사람이 불타오르듯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검을 쥐고 있었고 한 사람은 맨손이었다.
두 사람의 몸놀림은 모두 빨랐다. 진기가 더해진 그들의 장풍과 검기는 마치 실체가 있는 듯 맹렬히 휘몰아쳤고, 곧 두 사람을 중심으로 몇 장 크기에 달하는 기의 폭풍이 생겼다.
연무대 아래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석목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을 지켜보다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의 싸움은 격렬해 보였지만 둘 모두 동작이 과하게 화려했다. 더불어 빠른 속도만을 추구하다보니 공격력이 부족해 한참을 싸워도 승부가 갈리지 않을 것 같아보였다.
이렇게 몇 개 경기를 지켜본 석목은 다른 신입 제자들의 실력을 대략적으로 다 파악했다. 그리고 연무대 주위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실력이 강한 자의 이름을 기억했다.
석목이 잘 아는 백석과 소명, 남봉 등 몇 사람은 이미 연승을 거두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특히 백석은 방금 전 경기에서 몇 초식 사용하지도 않고 상대를 순식간에 기절시켰다. 존영각에 들어간 이후 실력이 크게 증진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석목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곁의 연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그 연무대는 방금 경기가 끝나 다음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석목은 눈빛을 반짝이며 그 연무대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