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참패
둘째 날, 통이 틀 즈음 석목은 도를 챙겨 순위전이 펼쳐지는 원형 광장에 도착했다.
백석과 남봉은 이미 도착해 각각 두 무리 사이에 둘러 싸여 있었다. 두 무리 모두 거대한 비석의 양측에 확연히 구분돼 서 있었다.
백석은 소명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의기를 중요시하고 무예 역시 고강한 백석은 존영각에 가입한 후 신입 제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명망을 얻었는데, 첫날 순위전에서 10위 안에 들며 더욱 명성이 높아졌다.
“석 형, 왔군요! 어제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백석이 석목을 보고 크게 웃으며 반겼다. 옆에 있던 곽무와 소명도 석목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과찬입니다. 그저 힘만 좀 강할 뿐 백 형에 비해선 한참 멀었습니다.”
석목도 손을 흔들며 가볍게 웃었다.
그때, 곁에 있던 곽무가 더 가까이 걸어왔다.
“곽 사형, 사형도 오늘 비무에 참가하나요?”
곽무는 등에 메고 다니던 양날도끼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에 백석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그렇다네! 나에게 도전을 하려거든 옛 정을 기대하진 말게나!”
손에 쥔 도끼를 들어 올린 곽무가 웃으며 말했다.
백석이 하하, 웃으며 화제를 돌려 전날 비무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어제 5위 안에 든 사람들의 활약은 매우 대단했다. 그들은 남봉을 제외하고 전부 석목보다 조금 먼저 종문에 입문한 신입 제자였다.
대화를 하는 사이, 광장에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첫날과 비교해 2배 이상은 돼보였다. 종문 내의 병급 제자가 대부분 다 모였기 때문이었다.
전날 격렬한 비무를 거친 탓에 신입제자는 이제 200명 정도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기존 제자들에게 도전하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30위 안쪽의 신입제자들 밖에 없었다.
기존 제자들은 신입 제자들보다 1년 먼저 심법을 수련했기 때문에 30위 안쪽에도 들지 못한 신입 제자가 기존 제자에게 도전하는 건 사실상 스스로 치욕을 자처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고 시도하고자 하는 자는 언제나 조금씩은 다 있었다.
예년 순위전의 결과를 보면 신입 제자 중 10위 안쪽에 드는 사람도 기존 제자에게 패배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둘째 날의 순위전은 신입 제자가 기존 제자에게 도전을 할 수 있다곤 하나 사실 하루를 통틀어 봐도 많은 비무가 이루어지지 않기에 첫날과 셋째 날 보다 치열하지 않았다.
곧 해가 중천에 뜨자 북 소리가 몇 번 울렸다. 시끄러웠던 광장은 잠시 조용해 졌다가 다시 떠들썩해졌다.
드디어 둘째 날 순위전의 막이 올랐다.
* * *
얼마 후, 연무대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장내가 점차 조용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신입 제자들이 한바탕 하려는 듯 벼르고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막상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석목은 살짝 긴장한 것 같은 백석과 소명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입 제자들은 잘 듣거라. 앞으로 반 시진 이내에 도전하는 자가 없다면 비무는 종료될 것이다.”
검은색 비석의 근처에 있던 관람대에, 어느새 졸린 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있었다. 그는 술이 든 병을 들고 보라색 등나무 의자에 앉아 나른하게 말했다.
노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광장의 허공에서 끊임없이 메아리 쳐 모든 사람이 다 명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곧 신입 제자들이 대화하는 소리와 기존 제자들의 비웃음 소리로 광장이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내가 나서지!”
석목이 서있는 곳의 멀지 않은 곳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 마치 한 마리 새처럼 두 손을 펼치고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사뿐히 한 바퀴를 돈 그 자가 연무대 중앙에 착지했다.
“본인은 강용입니다. 1342위인 정한 사형에게 도전하겠습니다!”
강용이 심판을 맡은 을급제자에게 공손히 예를 표하고 말했다.
1342위는 기존 제자들 중 가장 마지막 순위였다. 이내 사람들이 소곤소곤 대화를 하는 소리로 광장이 떠들썩해졌다.
강용의 두 눈썹은 위로 솟아있었고 눈빛은 맑고 투명했다. 굉장히 단단하고 순발력 있어 보이는 그는 한눈에 보아도 실력이 상당해보였다.
“강용? 이름이 귀에 익는데.”
석목은 곧 그가 신입 제자들 중 12위를 차지한 자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풍포구식(风炮九式)이라는 권법을 수련한 그의 주먹은 바람과 같이 빨랐고 순간 폭발력이 대단히 강했다.
“정한은 자리에 있는가? 나와서 도전을 받거라! 셋 셀 동안 올라오지 않는다면 기권으로 간주하겠다!”
심판을 맡은 을급 제자가 강용을 한번 보고 아래를 향해 크게 외쳤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흉악한 얼굴의 청년이 사람들 사이에서 공중제비를 하며 뛰어올라 강용의 앞에 사뿐히 착지했다. 강용보다 머리하나는 작은 그가 찌푸린 얼굴로 강용을 바라봤다.
“사형에게 가르침을 청합니다!”
상대의 흉악한 눈빛을 본 강용은 척추에 소름이 올랐지만 가슴을 쭉 피며 공손히 예를 표했다.
“쓸데없이 말이 많구나, 덤벼라!”
정한이 강용을 힐끗 보고 험상궂게 말했다.
정한의 말에 얼굴이 화끈해진 강용이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강용은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진듯했지만 어느새 정한의 뒤에 서 있었다.
강용이 곧 푸르게 빛나는 주먹을 정한에게 휘둘렀다.
정한은 경멸스럽다는 눈빛을 하고 몸을 돌려 주먹을 뻗었다. 두 사람의 주먹이 부딪히자 푸르고 빨간 두 빛이 번쩍이다가 사라졌다.
쿵!
큰 소리가 울리며 강용이 끊어진 연처럼 연무대 밖으로 날아갔다. 누군가 떨어지는 그를 잡아냈지만 강용은 이미 창백한 얼굴로 기절한 상태였다. 상처 역시 가볍지 않아 보였다.
흉악하게 생긴 청년 정한은 손을 털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무대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아래의 신입 제자들이 떠들썩해졌다.
그들 대부분이 순간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조차 보지 못했다. 요행을 바라고 도전해볼까 싶었던 몇몇 신입 제자들은 이내 마음을 완전히 접어버렸다.
석목은 살짝 먼 곳에 서 있었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또렷이 다 보았다.
강용의 동작은 확실히 매우 빨랐다. 정한은 강용의 주먹이 몸에 거의 닿으려 할 때쯤에야 겨우 맞받아 칠 수 있었다. 허나 주먹이 서로 부딪혔을 땐 더욱 심후한 진기를 가진 정한의 화속성 주먹이 훨씬 더 강했다. 강용은 바로 그 주먹에 밀려 날아간 것이었다.
정한의 맹렬한 위세에 광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석목이 방금 전의 비무를 조용히 곱씹던 그때, 백석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연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그는 1341위의 공춘봉에게 도전했다.
흑의를 입은 평범하게 생긴 소년이 빠르게 백석의 앞에 나타났다. 두 사람이 서로 예를 표하고, 곧 비무가 시작됐다.
백석이 시작부터 거센 공세를 펼쳤다. 공춘봉에게 끝없이 권영을 날리는 백석의 두 팔에는 구불구불한 혈관이 팽창해 있었다.
권풍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어렴풋한 붉은 빛을 띠었다. 일순간 작열하는 공기가 자욱해지자, 연무대 아래에 있던 사람들도 덮쳐오는 열기를 느꼈다.
석목은 두 눈에 정신을 집중했다.
백석은 존영각에 가입한 후 체내의 진기가 크게 늘고 지양공의 경지가 한 단계 더 높아진 것 같았다. 열염권 역시 붉은 빛을 은은하게 띠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경지가 한층 더 높아진 듯 보였다.
공춘봉은 평온한 표정으로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저 하늘색 빛이 감도는 손날을 휘둘러 백석의 공격을 완전히 막아냈다.
백석의 두 손이 더 두꺼워졌다. 그는 더욱 많은 권영을 날렸고, 뜨거운 열기는 공춘봉을 다 뒤덮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공춘봉이 드디어 움직였다.
공춘봉이 제자리에서 몸을 돌리자 파란색 회오리바람이 생겨나 권영 사이에 틈을 만들어냈다. 그 순간, 공춘봉이 몸을 움직여 백석을 덮쳤다.
찰나의 순간, 공춘봉은 이미 백석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크게 놀란 백석이 본능적으로 두 손을 회수해 가슴과 복부를 방어했으나 공춘봉은 쇠처럼 단단한 손날로 백석의 팔을 내려찍었다.
퍽!
백석은 양팔에 저릿함을 느꼈고, 동시에 그의 두 팔이 확 펼쳐졌다.
공춘봉은 백석의 드러난 가슴을 오른발로 강하게 밀어 찼다. 곧이어 백석의 몸이 흔들리며 찢어진 마대자루마냥 힘없이 날아갔다.
연무대 아래에 있던 소명이 빠르게 도약해 공중에서 백석을 받아냈다. 세차게 날아오는 백석을 받은 소명은 바닥에 착지한 후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난 후에야 겨우 멈춰 설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굉장히 짧은 순간에 펼쳐졌다.
신입 제자들 대부분은 백석의 끝없이 쏟아지는 권영과 공춘봉이 발차기를 하는 모습 밖에 보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은 백석은 그대로 잠시간 쉰 후에야 안색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왔다.
“백 형, 괜찮아요?”
석목이 백석의 가슴에 찍힌 발자국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눈을 떠 석목을 본 백석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로 그때. 석목의 눈에 익숙한 사람이 들어왔다. 백석과 소명도 무언가 발견한 듯했다.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을 향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10여 장 거리에 위치한 연무대였다. 이미 상대를 지정한 남봉은 그곳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녀의 상대는 분홍색 치마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분홍치마를 입은 여인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다. 분홍 잔상을 남기며 연무대 위를 제비처럼 헤집는 그녀의 공세, 남봉은 실로 상대가 안 되는듯했다.
남봉이 머지않아 패배할 것 같아 보이던 그 순간, 갑자기 딸랑딸랑 소리가 들리더니 치마를 입은 여인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남봉이 혈맥을 사용했다는 것을 눈치 챈 석목과 백석이 서로 시선을 교환 했다.
여인은 콧방귀를 뀌며 손을 휘저었다. 곧 허공에서 적색 부적이 나타났고, 부적은 이내 붉은 빛으로 변해 그녀의 전신을 덮었다.
이윽고 여인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옅은 적색 잔상을 남기며 순식간에 남봉을 스치고 지나갔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남봉은 그대로 인사불성이 되었다.
석목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석목은 비로소 몇 달간 심법을 수련한 신입 제자와 기존 제자의 큰 격차를 절감했다. 흑마문과 3국 7대종파의 실력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순위가 낮은 기존 제자들은 후천초기의 무인인 듯했지만 신입 제자들과의 실력은 천지차이였다.
석목이 대성한 풍치도법과 괴력을 사용해 운 좋게 몇 경기 승리한다 하더라도 순위를 얼마 올릴 수 없을 것 같아보였다.
그렇게 석목은 마음속으로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그새 신입 제자 3명이 더 도전을 했지만 모두 패배했다. 그중 한 명은 기존 제자와 호각을 이루었지만 진기가 부족한 탓에 패배했다.
그 모습을 본 신입 제자들의 도전 빈도가 늘어났다. 가장 많을 때는 동시에 연무대 4개에서 경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소명도 참지 못하고 백석과 석목에게 인사한 뒤 빈 연무대로 향했다.
연무대에 올라간 소명은 1300위 제자의 이름을 호명했다.
곧 몸집이 비둔한 사람이 연무대에 오르자 석목이 눈빛을 반짝였다.
“백 형, 소 형은 정식으로 술사학도가 된 것이지요?”
그때, 석목이 갑자기 백석에게 물었다.
“맞습니다. 3급 화속성 친화력을 가졌다고 하더군요.”
백석이 즉시 답했다.
석목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명의 상대는 몸놀림이 상당히 느려보였다. 소명은 민첩함에 중점을 둔 심법을 수련했고 술사이기도 하니 충분히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듯했다.
소명은 사전에 금환에게 얻은 정보로 상대방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