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눈의 변화
챙! 챙!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잇따라 울렸다. 금색 진기에 둘러싸여 있는 금환의 다리는 마치 쇠로 만들어진 듯 아무렇지도 않게 검과 직접 맞부딪쳤다.
잠깐 사이에 두 사람은 수십 번을 부딪쳤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 주위의 제자들 중 제대로 본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바로 그때, 금환이 곡곤의 검을 밟고 뒤로 뛰어오르더니 곡곤을 향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발사했다. 방금 전 격렬한 발차기와는 다른, 매우 은밀하고 서늘한 느낌의 공격이었다.
훅!
갑작스러운 금환의 공격을 막지 못한 곡곤은 볼에 몇 촌 길이의 상처를 입고, 볼에 피를 흘리며 비틀비틀 뒷걸음질 쳤다.
금환은 두 손을 뒷짐 진 채 안정적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양보 감사하네!”
금환이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곡곤은 상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천천히 검을 검집에 넣었다.
“흥!”
곡곤이 콧방귀를 뀌고 몸을 돌려 걸어가자 혈룡회의 제자들도 급하게 그의 뒤를 쫓았다.
순간 넋을 잃고 대결을 바라보던 주위의 사람들이 큰 소리로 갈채를 보냈다. 순위전에서도 이렇게 멋진 대결은 본 적이 없었다.
“금환 사형의 금월퇴(金钺腿)와 마흔지(魔痕指)가 갈수록 정교해지는군요. 이미 대성을 한 것이겠죠?”
백석이 공손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하, 2개 모두 굉장히 심오한 무예라 이제 겨우 막 소성의 경지에 올랐을 뿐이라네.”
금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지만, 표정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사실 금환은 몇 년간 수련한 이 마흔지를 다가오는 등급전에서 처음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상대의 허점을 노리려던 계획이었는데 오늘 비무로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니 한순간 계획이 틀어진 것이었다.
금환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본 백석은 눈치껏 더 이상 묻지 않았다.
2각 정도 더 기다리자, 멀리서 석목이 산길을 따라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석목은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석 사제, 한참 기다렸다네.”
금환이 하하 웃으며 석목을 반겼다.
“일이 조금 지체가 되어 금 사형을 기다리게 했군요. 죄송합니다.”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라네. 석 사제는 바쁜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지. 시간이 남아서 조금 일찍 왔다네.”
금환은 석목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석목은 백석과 소명, 곽무 등 아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부적 제작을 의뢰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겠죠?”
한동안 인사치레를 하던 석목이 물었다.
“그렇다네. 급하게 제작해야하는 부적이 있다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석 사제만큼 빠르게 부적을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더군. 보수에 관한 건 걱정하지 말게나. 분명 실망하지 않을 것이네.”
금환이 말했다.
“무슨 부적이 몇 장 필요하죠?”
석목이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금환은 석목에게 다가가 귓가에 작게 몇 마디를 했고, 석목은 잠시간 고민에 잠겼다.
“좋아요. 하겠습니다. 5일 후에 받으러 오면 됩니다.”
“알겠네. 그럼 부탁하겠네!”
금환이 손짓하자 한 사람이 석목에게 배낭을 건넸다.
배낭을 열어 본 석목은 고개를 끄덕였고, 석목은 그들과 몇 마디 잡담을 더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금환은 문이 닫히는 걸 본 후에야 한숨을 돌리며 일행과 함께 떠났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도 볼거리가 사라지자 빠르게 흩어졌다.
방으로 들어온 석목은 배낭을 탁자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금환이 요구한 부적의 수량은 많았지만 가장 하급의 간단한 부적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3일이면 모두 완성할 수 있었고 보수도 낮지 않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석목은 품속에서 갈색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기이한 냄새가 뿜어져 나오는 병 안에는 금색 단약이 들어 있었다.
그가 오늘 외출을 한 것은 바로 이 단약 때문이었다.
석목은 반년 간 술법의 수련에 몰두했지만 무공 수련 역시 결코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부적 제작 의뢰를 받은 이후, 자원이 뒷받침 되자 석목은 반야천상공을 2단계까지 대성하고 곧 3단계 돌파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천심단(天心丹)은 반야천상공의 다음 단계로 돌파를 시도할 때 큰 도움이 되는 단약이었다. 하지만 3단계 돌파보단 우선 새로 수락한 부적 제작 의뢰를 끝내는 것이 먼저였다.
석목이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약병을 챙겼다. 그리고 금환에게 받은 배낭에서 부적지를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 * *
며칠 후, 석목은 상반신을 드러내고 두 눈을 감은 채 방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론 어렴풋이 연기가 피어올랐고 전신에선 비 오듯 땀이 흘렀다. 피부 아래는 수많은 쥐가 기어 다니듯 꿀렁이고 있었다. 석목의 얼굴 또한 갈수록 빨개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석목이 눈을 떴다.
쾅!
거대한 기운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주위로 퍼졌다.
석목과 가까이 있던 돌 의자는 공처럼 튕겨져 나가 벽에 부딪쳐 부서졌다.
곧 석목의 피부는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석목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천심단을 복용하고, 석목은 마침내 반야천상공 3단계 경지에 순조롭게 오른 것이었다.
석목은 전신에 힘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끼고, 시선을 돌려 벽에 걸린 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내 석목은 한 손으론 도를 쥐고 다른 한 쪽은 두 손가락만 펼쳐 칼날의 옆면을 꽉 잡았다. 이어 체내의 진기를 끌어올려 손가락에 힘을 주자 칼날의 옆면이 움푹 파이며 지문이 남았다. 석목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석목이 잠시 머뭇거렸다.
잠시 후, 석목이 한 손을 세로로 세워 다섯 손가락으로 특이한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체내 법력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상태에서 몇 마디를 읊조리자 곧 하얀 기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 구석의 돌기둥을 가격했다.
쾅!
사람의 허리정도 되는 두께의 돌기둥이 기의 화살을 맞고 폭발했고, 돌 조각들이 사방으로 날아 흩어졌다.
석목은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얼굴로 날아오는 돌 조각을 쳐냈다.
석목이 사용한 술법은 바로 온신술의 기폭술이었다. 이 위력은 소명의 화염구보다 3할은 더 강력했다.
어느새 온신술도 3단계의 경지에 올라있었던 것이었다.
석목은 평소 자신의 경지를 주위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멋대로 그의 법력이 매우 적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다들 알고 있는 건 그저 석목이 부적술사로서 놀라운 소질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 뿐이었다.
석목은 새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기폭술을 비장의 수단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아직 시전속도가 느려 실전에서 효과를 보기 위해선 많은 수련이 필요할 것 같았다.
석목은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품에서 푸른색 빛을 뿜는 영석을 꺼내 신중히 관찰했다.
잠시 후 그는 영부보경이 기록된 옥간을 꺼내 이마에 가져다 댔다. 순간 머릿속에 12개 부문으로 구성된 매우 복잡한 술법진이 떠올랐다.
“무공과 술법을 동시에 수련하는 자는 둘 중 하나를 주로 수련하고 다른 하나는 보조로 사용한다. 혹은 둘 중 하나를 수련하다가 한계에 봉착했을 때 다른 하나를 수련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
탄월식의 도움으로 술법을 수련하는데 힘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에 무공과 술법을 동시에 수련할 수 있다. 지금의 내게는 공격용 술법보다는 보조용 술법이 더 필요하다. 이번엔 반드시 경신부(轻身符)를 제작할 테다.”
잠시 후, 석목이 옥간을 내려놓고 다시 푸른색 영석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푸른 영석은 상당히 희귀하다는 풍속성의 영석이었다. 그리고 방금 영부보경에서 본 경신부 역시 동일한 풍속성의 부적이었다.
풍속성의 영석은 바로 석목이 얼마 전 하급부적 제작의뢰에 대한 보수로 받은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희소한 속성의 영석이었기 때문에 덤으로 수속성 영석까지 얹어주며 겨우 얻어냈다.
“풍속성 원소 친화력이 없으니 영석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어.”
석목이 아깝다는 표정으로 품속에서 법묵과 진청색 부적지를 꺼냈다.
비린내를 풍기는 핏빛 법묵은 영롱한 빛이 흘렀고 부적지는 일반적인 부적지보다 더 곱고 두꺼웠다.
이 두 재료를 구매하기 위해 석목은 상당히 많은 은자를 소모했다.
높은 등급의 부적을 제작하기 위해선 더 높은 등급의 부적지와 법묵을 사용해야하기 때문이었다.
상급 부적을 제작하기 위해선 상급 요수의 피로 제작한 법묵과 특수한 가공을 거친 강한 요괴 가죽을 부적지로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현재 석목의 수준에선 그런 고급의 재료까지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푸른색 부적지 정도면 그가 사용하기에 충분했다.
석목은 재료를 탁자에 올려놓은 후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 뒤 법붓을 들어 법묵을 먹이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순간 확, 떴다.
그 순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석목의 동공이 2배로 커지더니 금색으로 변한 것이었다.
손바닥 만했던 부적지도 순간 확대되다가 탁자만한 크기로 보였고, 평소 눈에 보이지 않았던 미세한 결도 지렁이처럼 두껍게 보였다.
이 눈의 변화는 반년 전 온신술을 수련하면서부터 시작됐었다.
석목은 온신술을 수련할수록 시력이 좋아지더니 2단계에 오르자 눈에 법력을 주입하면 동공이 금색으로 변하게 됐다. 시력이 크게 증가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물건을 수십 배 이상 확대해서 관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이 능력이 부적을 제작할 때 사용하면 매우 뛰어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적 제작의 성공여부는 술법진을 정확하게 그렸는지, 그리고 부문 사이의 간격이 오차가 없이 정확한지 등에 달려있었다.
또 술법진의 모든 부문은 독립되지 않고 서로 연결돼 있어 아주 조금의 오차만 있더라도 부적제작에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그려야 했다.
석목은 사물을 확대해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정확하게 부문을 그려 낼 수 있었고, 부문 사이의 간격도 정확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본래 부적술사마다 각자 가진 법력과 원소 친화력의 종류가 다 달랐다. 하여 같은 부적이라 해도 각자가 제작할 수 있는 술법진의 구성도 조금씩은 다 달라서, 영부보경에 나열되어 있는 술법진을 그대로 베낄 순 없었다.
석목은 부적제작을 한 번 성공한 후 그 부적을 완벽하게 복제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덕분에 석목의 하급부적 제작 성공률은 무려 8~9할에 달했다.
다른 부적술사학도는 10번 이상 혹은 수십 번을 시도해 겨우 한 장을 성공하니, 석목의 성공률은 그야말로 타인과 천지차이라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석목이 반년 사이 많은 자원을 벌어들일 수 있었던 주된 이유였다.
이내 석목은 숨을 깊게 들이 마신 후, 한 손으로 푸른색 영석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법묵을 먹인 법붓을 쥐었다. 그는 정상적인 움직임보다 2~30배 느린 속도로 부적지에 부문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나의 부문을 그리는데 1각이 족히 걸렸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지만 석목은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하나 둘 이어서 부문을 써내려갔다. 부적지에 적힌 부문이 늘어날수록 석목의 등에 흐르는 땀도 점점 늘어났다.
석목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9번째 부문을 완성했을 때 무슨 연유인지 갑자기 부문이 갑작스레 반짝이더니, 석목이 무언가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부문이 푸른빛을 내며 폭발했다.
부적은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석목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손에 들고 있던 법붓을 옆에 내려놓았다.
석목은 이미 반년 간 이런 실패를 수차례 겪었었다.
지금처럼 처음으로 그리는 부적은 실패하기 더욱 쉬웠다.
그는 제자리에 서서 두 눈을 감고 부문을 그리던 과정을 여러 번 복기했다. 그래도 여전히 문제를 파악하지 못한 석목은 결국 침상으로 가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했다.
한참 후, 눈을 뜬 석목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박수를 치며 일어나 재빨리 새로운 부적지를 탁자 위에 깔았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바로 2번째 부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속도가 전보다 상당히 빨랐고 서툴렀던 부분도 사라졌다. 석목은 12개의 부문으로 구성된 심오한 술법진을 막힘없이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