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구령술(拘灵术)
반 시진 후, 석목은 침상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벽에 걸린 검은색 도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국 사숙의 제안을 저울질했다. 큰 대가를 지불해 얻은 도를 법기로 만들지 못하면 뛰어난 물건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석목도 이계와 이계의 동물에 대해 흥미가 있었고 국 사숙의 일을 돕는다면 짐작컨대 이계의 생물을 한두 마리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미 이계에서 거대한 앵무새와 화금석 소환에 성공한 것을 생각하면 국 사숙은 이 분야에 정통했다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석목이 아는 국 사숙은 확신이 없다면 위험을 무릅쓸 사람이 아니니 안전상에도 분명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석목은 며칠을 더 고민하고 머뭇거리기를 반복했다.
며칠 후, 석목은 다시 장경각으로 가 국 사숙의 제안을 승낙했다. 국 사숙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두 사람은 3일 후 정오에 국 사숙 거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국 사숙은 흰색 옥간을 꺼내 신속하게 자신의 주소를 적어줬다. 옥간을 받아든 석목은 이계 방문에 관한 일에 대해 몇 가지 더 물은 후 장경각을 떠났다.
* * *
드디어 3일 후 정오 무렵이 되었다.
석목은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이고 분주히 검은색 산봉우리 산기슭으로 향했다.
산봉우리에는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여럿 솟아있었고 일부 낮은 관목들과 화초가 있었지만 높은 나무는 없었다. 석제 건축물은 버섯같이 무리지어 산의 이곳저곳에 분포해 있었다.
황량해 보이는 검은색 산봉우리는 바로 흑마문의 13호 산봉우리였다. 석목은 이 봉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살았지만 실제로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봉우리에는 푸른 돌이 깔린 약 1장 넓이의 좁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고 길의 도중에는 더욱 좁은 갈림길이 초라한 돌집까지 이어져 있었다.
국 사숙이 거주하는 건물은 정상과 가까운 매우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절대 찾기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2각 후, 석목이 드디어 봉우리 정상에 위치한 국 사숙의 집에 도착했다.
허나 석목이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문이 저절로 열렸다.
“어서 들어오너라! 한참을 기다렸다.”
안에서 국 사숙의 짜증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서해 주십시오. 수련을 하던 중 갑자기 깨달음이 와서 시간을 잊고 잠시 늦었습니다.”
석목이 무표정하게 서 있는 살이 뒤룩뒤룩 찐 국 사숙에게 용서를 구했다.
“음, 수련 중에 깨달음이 있었다면 어쩔 수 없지……. 준비 작업은 이미 끝내 놓고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국 사숙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수련하는 사람이 깨달음을 얻을 때 순간적으로 다른 모든 일을 잊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석목은 방의 왼쪽 구석에 길이가 1장 가까이 되는 괴상한 도마뱀이 엎드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도마뱀은 머리에는 뿔이 하나 달려 있었고 다리는 6개였으며, 전신은 어두운 녹색 비늘로 덮여 있었다. 도마뱀은 녹색과 황색을 동시에 띄는 눈을 치켜뜨고서 석목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허나 국 사숙에게 어떤 명령을 받았는지 어떤 행동을 보이진 않았다.
“설마 이것이 소문 속의 화금석입니까?”
석목이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렇다. 화금석의 타액은 극독이면서 금속도 녹일 수 있지.”
대답을 한 국 사숙이 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는 살찐 손을 뻗어 벽의 어느 곳을 가볍게 눌렀다.
쾅!
평평했던 벽에 돌문이 생기고, 갑자기 안쪽을 향해 열린 그곳에 어두운 통로가 드러났다.
“아래 밀실에서 진행할 것이니 따라오너라.”
고개를 돌려 석목을 부른 국 사숙이 즉시 통로를 향해 걸어갔다.
석목은 급하게 국 사숙을 뒤따라갔다.
* * *
통로를 빙글빙글 돌아내려가자 길이가 4장, 넓이가 3장정도 되어 보이는 밀실이 나타났다. 벽에 꽂힌 횃불들이 밀실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건물과 같은 석재를 사용해 구축된 밀실은 거의 모든 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원형 진법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진법은 석목이 장경각에서 봤던 전송진법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진법에 6개의 홈이 있다는 것이었다. 진법의 둘레에는 동일한 간격으로 계란 크기의 홈이 5개 있었고 부문과 영문(灵纹)이 가장 많이 밀집돼있는 진법 가운데에는 사람 머리만한 크기의 홈 하나가 있었다.
석목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복잡한 대형 진법을 작동할 때는 영력의 소모가 매우 크기 때문에 반드시 영석이 끊임없이 힘을 공급해줘야 하며 심지어 어느 대형진법은 영석 교체를 전담하는 사람까지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서적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5개의 홈은 의심할 여지없이 영석을 놓는 곳이었다. 또 저 진법의 중앙에 있는 홈은 아마 진안(阵眼)을 놓는 곳일 터였다.
순간 석목의 눈에 흥분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그가 가진 진도입문대전에는 진법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만 적혀 있을 뿐 완전한 진법은 거의 기록돼있지 않았다. 석목은 이렇게 훌륭한 진법을 머리에 새겨 돌아갈 수 없는 것이 한탄스러웠다.
곧 아무렇지도 않은 척 주위를 둘러본 석목은 국 사숙이 진법을 점검하느라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내 석목은 눈에 법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동공이 커져 금색으로 변했고, 석목은 이제 진법의 모든 부문이 수십 배 이상으로 크고 분명하게 보였다.
진법의 복잡한 부문은 오행부문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각 부문 사이는 영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석목이 흥미롭게 진법을 관찰하는 사이, 국 사숙이 진법의 점검을 끝마치고 몸을 일으켰다.
석목의 금색 동공은 순식간에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이 진법의 이름은 충허성현진이다. 공간속성의 진법이지. 이계 방문은 이 진법을 이용할 것이다.”
석목이 진법에 큰 흥미를 가지는 것을 보고 국 사숙이 웃으며 설명했다.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석목이 감사인사를 했다.
“혼사가 이계에 방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국 사숙이 석목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석목은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국 사숙은 손가락 3개를 펼치며 말했다.
“기억해라. 혼사가 이계에 방문하기 위한 조건은 크게 3가지다. 강력한 이계 생물의 잔해와 이계의 대략적인 공간좌표, 충분한 공간 친화력이다. 사령계에 방문하기 위한 앞의 두 조건은 이미 충족돼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 공간 친화력은 나 혼자만의 것으론 부족했는지 지금까지 세 번이나 실패했다. 하여 이번에 네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국 사숙은 드디어 석목의 도움이 필요했던 까닭을 말해줬다.
석목은 다시 눈앞의 진법을 바라봤다. 석목도 곧 국 사숙이 자신에게 무엇을 시키려는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국 사숙은 자신의 뜻을 이해한 석목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일에 대비해 석목에게 이계 방문과 관련된 혼사의 지식과 주의사항을 다시 설명해주었다.
국 사숙의 설명을 들은 석목은 그제야 일련의 과정을 확실히 이해했다.
만약 혼사의 의식이 순조롭게 이계에 도착하면 일부 이계의 생물에 표식을 심을 수 있었고, 그리하면 다시 돌아와 그 생물의 실체를 소환해 계약을 맺는 것이었다.
석목은 다시 국 사숙의 화금석을 떠올렸다. 그 도마뱀의 기이한 능력을 생각하자 뛰는 가슴을 멈출 수가 없었다.
“국 사숙, 저도 사령계에서 이계의 생물을 하나 얻을 수 있을까요?”
석목이 물었다.
국 사숙은 석목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가 한참 뒤에야 말을 이었다.
“흠……, 이론상으론 문제가 없다. 허나 정식 혼사가 아닌 네가 짧은 시간에 복잡한 법결을 외우는 건 불가능 하겠지. 내가 특별히 가장 간단한 구령술을 가르쳐 주도록 하마. 이 법결은 매우 간단히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국 사숙!”
석목은 공짜로 술법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에 매우 기뻐하며 허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급하게 감사하지 말거라. 학습의 여부는 이 노부의 말을 끝까지 들은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 이 구령술의 장점은 배우기 간단하다는 것이다.
허나 이 법결은 너무 보잘 것 없어 기력이 자신보다 10배 이상은 낮은 이계 생물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 게다가 차원을 뛰어넘는 탓에 어쩌면 법결의 효과가 더욱 약해질 수도 있지. 술사학도의 정신력으로는 아마 사령계에서 가장 약한 생물인 벌레에게 사용해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국 사숙이 잠시 망설이다 숨김없이 말했다.
“벌레 밖에 안 된다고요?”
“혼사가 다른 이계에 방문할 수 있는 시간은 굉장히 제한적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봤을 때 내 의식이 이계에서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2각 정도였다. 술사학도의 기력으로는 고작 열 호흡 정도 머물 수 있을 거야. 그 짧은 시간에는 아마 적합한 생물을 찾기 조차 어려울 것이다. 체내에 표식을 심는 것은 더욱 힘들겠지.”
국 사숙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석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가 사령계에서 성공적으로 표식을 심더라도 이계의 생물을 소환하려면 상당한 자원과 운을 필요로 한다. 그 하찮은 앵무새를 소환할 때도 난 거의 전 재산을 다 사용했지만 말을 할 줄 아는 걸 제외하고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지. 자, 이제 모두 설명했다. 구령술을 배우도록 하겠느냐?”
국 사숙은 전 재산을 날리게 한 앵무새를 떠올리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운에 한번 맡겨보고 싶습니다. 사숙께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속으로 고민을 거듭하던 석목이 어차피 잃을 건 없다는 생각으로 말했다.
“그럼 수련할 시간 반 시진을 주마. 질문이 있다면 마음껏 물어보도록.”
국 사숙이 회색 옥간을 꺼내 이마에 갖다 대고 구령술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국 사숙은 그 회색 옥간을 석목에게 건네고, 진법의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눈을 감았다.
석목 역시 한 구석으로 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회색 옥간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옥간에 기록된 술법의 구결은 길지 않아 빠르게 외울 수 있었다.
구령술은 국 사숙이 말했던 대로 확실히 쉬웠다. 석목은 두 눈을 감고 수련을 시작했다.
수련 중에도 석목의 머릿속에는 부문이 끊임없이 선회했다. 석목은 때때로 입술을 움직이며 손가락으로 어느 법결을 그렸고 국 사숙에게 질문도 한 차례 했다.
국 사숙이 매우 꼼꼼하게 가르쳐 준 덕분에 석목은 궁금한 점을 즉시 이해할 수 있었다.
반 시진 후, 석목이 눈을 떴다. 그가 오른손으로 빠르게 수인을 맺으며 입술을 움직이자, 손에서 흰색 부문이 날아가더니 순간 허공에서 사라졌다.
“구령술을 벌써 익히다니 이해력이 상당하구나.”
국 사숙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국 사숙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석목이 자리에서 일어나 국 사숙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국 사숙은 석목을 향해 손을 젓고 품에서 물건 몇 개를 꺼냈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부적과 손바닥 크기의 검은색 뼈, 외발로 서있는 새가 2마리 그려진 그릇 각각 하나씩과 적색, 황색, 녹색, 청색, 금색으로 된 영석 5개였는데, 석목은 그 영석 5개를 보자마자 매우 놀랐다.
영석의 크기와 뿜어져 나오는 짙은 기운을 보면 말로만 듣던 중급 영석이 분명해보였다. 또한 흑색 뼈는 어느 생물의 두개골로 보였고, 훼손이 매우 많이 돼있는 상태라 어떤 생물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석목은 다시 시선을 돌려 은색 그릇을 봤다.
그릇에는 작은 부문들이 밤하늘 무수한 별처럼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반면 외발로 서 있는 새 그림은 어딘지 모르게 무언가 어색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