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사령계
석목이 물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전, 국 사숙은 이미 은색 그릇을 진법 중앙에 놓고 영석 다섯 개 모두를 전부 홈에 끼워 넣었다.
“이 부적에는 사령계 공간 좌표가 기록돼있다. 내가 진법을 발동 시키면 너는 즉시 이 부적을 뼛조각에 붙이도록 해라.”
국 사숙이 석목에게 검은 뼛조각과 은색 부적을 건네며 지시했다.
양손에 각각 뼛조각과 부적을 조심스럽게 받아든 석목이 진법 안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국 사숙도 석목의 맞은편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내 국 사숙이 알 수 없는 주문을 읊조리며 열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수인 여러 개를 연달아 맺자 흰 빛줄기 몇 가닥이 은색그릇에 쏘아졌다.
곧 은색 그릇의 표면에 새겨진 작은 부문들이 눈이 부실 정도의 은색 빛과 강력한 법력 파동을 내뿜었다.
그와 동시에 충허성현진의 모든 부문과 영문이 빛났고, 주위의 허공에선 큰 파동과 함께 진동소리가 울렸다.
바로 그때, 밀실 안 모든 횃불이 동시에 꺼지더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뒤이어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순간 두 사람 아래 진법이 반짝이더니, 다섯 가지 빛이 솟아져 나와 두 사람을 감쌌다. 둘은 마치 다섯 색깔의 휘황찬란한 빛을 입은 것만 같았다.
이어 은색 빛으로 반짝이던 그릇 안쪽에서 은색 안개가 천천히 선회하며 뿜어져 나왔다. 선회하는 안개는 점점 빠르고 크게 변했고 안개 속에는 빛이 반짝였다.
이는 밀실의 어두운 환경과 어우러져 한없이 넓은 하늘에 별이 총총 박혀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석목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꿈같은 장면에 넋이 빠졌다.
“멍하니 무엇을 하는 것이냐!”
국 사숙의 목소리를 들은 석목이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급히 손에 든 부적을 발동시켰다. 그 순간, 눈부신 은색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휙!
이내 부적을 다른 쪽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뼛조각에 붙이자 빛이 두개골에 흡수되며 종적을 감췄다.
“잠시 후 혼돈의 공간에 도착하면 나에게 꼭 붙어있어야 한다.”
국 사숙이 석목을 보며 소리쳐 말했다.
“네!”
석목이 놀란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급하게 대답했다.
국 사숙은 말없이 손을 움직여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은색 그릇에 새겨진 부문이 다시 반짝이더니 은색 새 2마리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날아올라 두 사람의 이마로 들어갔다.
석목은 정신이 아늑해지며 눈이 절로 감기는 것을 느꼈다. 석목의 의식은 곧 은색 새에 붙어 몸을 떠나 은색 그릇으로 들어갔다.
* * *
어느새 석목은 자신이 오색찬란한 혼돈의 공간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 공간은 대해처럼 끝도 없이 넓었고 표면에는 각종 물체들이 떠있었다. 어떤 것은 멀리에, 또 어떤 것은 가까이 있었으며, 어떤 것은 빛을 발했고, 또 어떤 것은 전혀 빛을 발하지 않기도 했다.
공간은 매우 깊었고, 먼 곳에선 알 수 없는 힘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 힘은 꼭 석목을 계속 끌어당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떠냐. 사령계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지느냐?”
바로 그때, 석목의 머릿속에서 국 사숙의 목소리가 울렸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석목은 곧 자신이 흰색 빛으로 변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옆에 더 큰 빛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국 사숙이 분명해 보였다.
“느껴집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느껴집니다.”
석목이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좋아! 함께 그 힘을 따라 가도록 하자. 저 천체들에는 가까이 가지 않도록 조심하려무나.”
국 사숙의 말투에 기쁨이 묻어났다.
석목은 대답을 하고 즉시 알 수 없는 힘을 따라 앞으로 움직였다. 국 사숙이 변한 빛도 석목의 뒤를 바짝 쫓았다.
기괴한 모습을 한 이 혼돈의 공간을 보고 석목이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바로 공허하다는 것이었다. 석목은 표면에 떠있는 천체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국 사숙의 설명에 따르면 천체 하나하나가 전부 서로 다른 이계라고 했다.
이어진 시간동안 두 사람은 줄곧 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알 수 없는 힘은 점점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단조로운 풍경이 슬슬 질려갈 때쯤 석목은 자신의 기력이 상당히 소모됐다는 것을 발견했다.
“국 사숙, 혼돈의 공간에서 행동을 하면 기력이 소모됩니까?”
석목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다. 혼돈의 공간뿐만 아니라 다른 이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계에선 소모되는 기력이 이곳보다 더욱 크지. 기력이 전부 소모되면 의식은 진법의 힘에 의해 원래의 차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석목은 그제야 자신과 국 사숙이 변한 빛이 얇은 오색 빛으로 덮여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빛이 바로 두 사람을 현실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안심해라. 네 기력은 내 생각보다 강한 것 같구나. 이변이 없다면 사령계까지는 문제없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국 사숙의 말을 들은 석목은 마음이 놓였다.
이때, 석목은 빛을 발하는 얇고 긴 천체가 대화를 하는 사이 근처로 가까이 다가 온 것을 눈치 챘다. 석목은 반딧불이 빛처럼 흐릿하게 빛을 뿜는 그것에 자연히 관심이 기울었다.
“큰일이군, 저쪽은 위험하니 어서 나에게 붙어라! 절대로 저것에 빨려 들어가서는 안 된다!”
국 사숙이 갑자기 큰 소리로 석목을 일깨우며 속도를 늦췄다.
놀란 석목은 즉시 국 사숙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석목이 막 국 사숙의 빛에 닿으려한 그 순간, 강한 인력이 갑자기 석목을 끌어당겼다.
다급해진 석목이 온 힘을 다해 그 강대한 힘에 저항했다. 국 사숙이 변한 빛으로부터도 상당히 강한 힘이 전해져 왔다.
허나 국 사숙의 도움에도 석목은 여전히 그 천체를 향해 조금씩 끌려갔다.
석목은 조금씩 엄청난 공포감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급격히 커지더니 석목은 순식간에 국 사숙 옆으로 끌려갔다. 그 후, 두 사람은 즉시 자리를 떴다.
그 천체와 점점 멀어지며 이제 더 이상은 끌어당기는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석목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도와줬지만 다음번에는 너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살짝 노한 것 같은 국 사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국 사숙.”
석목이 계면쩍은 듯이 말했다.
이내 국 사숙의 의식이 변한 빛은 몇 번 반짝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국 사숙은 아직 화가 사라지지 않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국 사숙, 방금 제가 만약 그 발광체에 빨려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석목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흥! 미지의 이계를 탐험하는 것을 너 같은 술사학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느냐. 수많은 차원은 너와 진법의 연결을 가볍게 끊어 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기력이 전부 소진되더라도 본래의 몸으론 돌아갈 수 없게 되지. 그 뒤로 어떻게 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 어서 이동하자.”
석목은 아연실색했지만 국 사숙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상당한 기력을 소모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국 사숙은 성미가 약간 거칠긴 해도 역시 좋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그 후로도 여정 중에 천체를 여러 번 더 마주쳤지만 멀리 돌아 이동해 별다른 피해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나고 그들의 기력이 거의 바닥을 보일 때쯤, 검은 빛을 발하는 안개 형태의 천체를 발견했다.
석목은 처음 자신을 끌어당긴 신비로운 힘이 바로 저곳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도착했다.”
석목의 마음속에 국 사숙의 기쁜 목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두 사람이 변한 흰 빛은 갑자기 거대한 힘에 이끌려 검은 빛을 뿌리는 안개모양 천체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그런데 석목이 부드러운 검은색 안개에 들어간 것을 느낀 그 순간, 어떤 기이한 힘이 두 사람을 순식간에 갈라놓았다.
* * *
석목은 어둑어둑한 세계에서 눈을 떴다. 그의 모습은 허공에 떠다니는 비구름 같이 어두컴컴한 형체로 변해 있었다.
이곳은 매우 어두운 세상이었다. 하늘은 온통 혼탁한 회색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그것은 구름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했다.
하늘에 높이 걸린 12개의 달은 모두 검붉은 빛을 띠었다. 달들은 이 세계에 조금의 빛도 더해주지 않았을 뿐더러 외려 더 음침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회색 바닥은 도처가 진흙으로 덮여 있었다. 때때로 거품이 한두 개씩 올라오는 그 진흙 위에는 알 수 없는 생물의 새하얀 백골들이 떠 있었다.
이내 광풍이 쓸고 지나가자 바람에서 악취가 풍겼다.
도저히 생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석목은 이곳 분위기에 적응하려 부단히 노력했으나,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이름 그대로 영락없는 사망세계였다.
석목이 한창 주위를 둘러보던 그때, 갑자기 전방에서 소란스럽게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로 유추하면 그 수가 적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언덕이 석목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어 잘 보이진 않았다.
곧 석목이 마음을 먹자 그가 변한 그림자가 순식간에 언덕 위를 날아갔다.
언덕 위에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마주한 석목은 매우 놀랐다.
언덕 아래 아득히 넓은 황야에선 두 해골 대군이 미친 듯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빼곡히 모인 이들의 숫자는 5, 6만 정도는 족히 돼보였다.
그 해골들의 눈구멍엔 희미한 불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해골들은 뼈로 만든 도나 창을 사용하거나 주먹을 사용해 싸우고 있었다. 개중엔 신체가 훼손돼 완벽하지 않은 해골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쉬지 않고 미친 듯이 싸웠다.
대군들 중엔 이 해골 전사 외에 다른 존재도 있었다.
검은 갑옷을 입고 뼈로 된 말을 탄 해골 기사와 몸에서 고름이 흐르는 움직임이 굼뜬 강시, 뼈로 된 호랑이, 뱀 등 모두 다 사망한 존재들이었다.
허나 석목은 그 존재들에게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해골 대군의 위에서 비행 중인 두 마리의 거대한 무언가에게만 관심을 집중했다.
위쪽 하늘엔 거대한 괴수 2마리가 서로 싸우고 있었는데, 음산한 바람엔 때때로 귀를 찌르는 소리가 실려 왔다.
둘 중 한 괴수는 체구가 거대한 강시견으로, 크기는 2~30장정도 돼보였다. 거대한 체구는 전부 부패돼있었고 주변엔 구더기가 바글거렸다. 굉장히 역겨워 보였지만 몸에서 뿜어내는 놀라운 기세까진 감추지 못했다.
강시견의 목에는 완전히 다른 머리 3개가 자라 있었다. 왼쪽 머리는 백골, 가운데 머리는 부패돼 있었으며 오른쪽 머리는 검은 털이 자란 온전한 개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 머리 3개 모두가 비리고 퀴퀴한 침을 흘리며 멈추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맞은편 괴수는 거대한 검은색 뼈로 된 새였다. 그 체구는 강시견과 비교해도 전혀 작지 않았다. 몸에는 드문드문 반 정도 썩은 검은색 털이 걸려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흰색 뼈가 드러나 있었다. 또한 뼈로 된 두 날개는 살벌한 바람을 일으켰으며 빠르게 움직이는 긴 꼬리는 날카로운 파공성을 일으켰다.
이렇듯 두 괴수 모두는 몸에서 아주 무서운 기운을 내뿜었다. 그 기운은 석목이 이제껏 보아온 그 어떤 고수보다도 훨씬 더 강했다.
곧 머리가 3개인 강시견이 위쪽을 보더니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거대한 몸이 놀라운 속도로 움직여, 왼쪽 머리가 검은색 새의 한쪽 날개를 물었다.
공격을 피하지 못한 새는 분노의 비명을 지르며 거대한 검 같은 부리로 개의 목을 찌르며, 두 발로는 복부를 매섭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강시견은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두 앞발로 새의 몸을 잡더니 다른 두 머리로 새의 같은 한쪽 날개를 물고 세 머리로 동시에 물어뜯었다.
쿵!
검은색 새는 결국 한쪽 날개가 뜯기며 균형을 잃으면서도 강시견을 놓지 않았다. 두 거대한 괴수는 허공에서 강하게 추락하며 함께 바닥을 굴렀다.
수백 개의 해골이 하늘에서 떨어진 두 거대한 괴수에 깔려 순식간에 가루가 됐다. 주위에 있던 해골들은 자신도 엉겁결에 화를 당할까 분분히 흩어져 도망갔다.
하지만 두 괴수는 주위 상황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바닥에서 계속 물고 뜯으며 싸웠다.
바로 그때, 석목이 변한 그림자가 둥실 떠오르더니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놀란 석목은 그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욕했다.
석목의 기력으론 이 세계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아주 짧았음에도 많은 시간을 고작 싸움 구경에 다 허비하고 만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