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표식을 심다
석목은 더 이상 괴수의 싸움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는 시선을 사방으로 빠르게 훑어 표식을 심을 수 있는 개체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희고 포동포동한 벌레 몇 마리와 산산조각 난 해골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 그릇만한 크기의 벌레들은 바닥을 뚫고 올라와 조각난 해골들을 갉아 먹고 있었다.
“설마 정말 벌레에 표식을 심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석목이 초조해 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엉켜서 싸우던 거대한 괴수 두 마리 중, 머리가 3개 달린 강시견의 거대한 몸이 무언가에 당한 듯 돌연 뒤쪽으로 날아갔다.
검은색 새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떨어진 날개를 바라봤다. 매우 분노한 새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입에서 회오리바람을 뿜어냈다.
콰르릉!
회오리바람은 바닥에 쓰러져 있던 강시견의 몸을 매섭게 가격했다.
주위에 있던 해골 대군에게도 회오리바람의 여파가 미쳤다. 곧 수많은 해골들은 광풍에 휘말려 하늘로 날아올라 사방으로 내팽겨졌다.
펑! 펑! 펑!
10여 구의 해골병사가 석목이 있는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지며 가루가 되었다. 그중, 한 해골은 운이 좋았는지 완전히 부서지지 않고 한쪽 팔만 절단된 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 광경을 본 석목은 매우 기뻐하며 그 해골을 향해 빠르게 이동해 구령술을 펼쳤다. 이내 희미한 흰색 부문이 반짝이며 해골의 두개골에 흡수되었다.
처참하게 부서진 탓인지 눈구멍의 푸른 화염이 곧 꺼질 것 같이 흔들리던 해골은 석목의 표식을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해골에 표식을 심자마자 석목의 모습이 흐려지고, 투명에 가까운 오색 빛으로 변해 불가사의한 속도로 사라졌다.
이윽고 한쪽팔만 남은 해골의 눈구멍에 있던 푸른 화염이 살짝 반짝였다. 이미 피에 굶주린 듯 내뿜던 포악한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외팔의 해골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멀지않은 곳에서 싸우는 해골 대군 두 무리를 멍청히 바라봤다.
잠시 후, 외팔의 해골은 돌아서 전장 반대 방향으로 한걸음씩 걸어 나갔다.
* * *
국 사숙의 거처에 위치한 지하 밀실 안, 순간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석목의 몸이 흔들리더니 갑자기 눈을 떴다. 의식이 몸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길게 숨을 내뱉은 그는 기력을 과하게 소모한 탓에 피곤해 보였지만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첫 번째 이계 탐색에서 표식을 심는데 성공해냈기 때문이었다. 비록 해골에 불과했지만 국 사숙이 말했던 벌레보다는 훨씬 강한 개체에 표식을 심었으니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석목이 온신술을 운기하자 피로했던 정신이 천천히 회복되었다.
잠시 후, 맞은편에 앉아있던 국 사숙의 비대한 몸도 잠시 흔들리다가 깨어났다. 살찐 얼굴에는 기쁜 표정이 가득했다. 큰 수확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국 사숙의 표정을 보니 큰 수확을 얻었나 봅니다!”
석목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럭저럭 괜찮았다! 네 기분도 상당히 좋아 보이는데 설마 그 짧은 시간에 표식을 심은 것이냐?”
웃음을 거둔 국 사숙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해골에 표식을 심었습니다.”
석목이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혼사로서 천부적인 소질을 지니고 있나보구나. 해골은 사령계의 가장 낮은 단계의 개체에 속하지만 일반적으로 술사학도가 표식을 심기에는 어려운 상대다.”
국 사숙이 턱을 쓰다듬으며 석목을 칭찬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석목이 웃었다.
국 사숙이 하하 웃더니 더 이상 묻지 않고 바닥에 놓인 도구를 챙겼다.
진법의 홈에 끼워진 중급 영석들은 영력이 거의 소모된 듯 빛이 크게 약해져 있었다. 석목은 그 모습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중급 영석은 영력의 정순함과 그 양이 하급 영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한데도 고작 진법을 한 번 가동시켰을 뿐인데 거의 모든 영력을 잃은 것이었다.
석목은 술사가 정말 돈이 많이 드는 직업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 해골을 소환해 보고 싶겠지?”
국 사숙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맞습니다. 사숙께서 소환을 하는 법도 가르침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석목은 잠시 멍한 얼굴로 있다가, 곧 계면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국 사숙은 석목을 데리고 밀실 밖의 방으로 갔다.
국 사숙은 그 방에서 얇은 책자 한 권과 반투명한 병 하나를 찾아 석목에게 건네주었다. 병에 가득 찬 노란색 액체에선 거품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고 떫은 냄새도 났다.
“소환술법이 기록된 책자와 화금석의 독액이 든 병이다. 독액이 몸에 닿는다면 순식간에 뼈까지 녹여버릴 테니 사용할 때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국 사숙이 주의를 줬다.
“감사합니다.”
석목은 물건을 건네받은 즉시 책자를 펼쳤다.
안에는 소환진법의 배치법이 기록돼있었다. 진법은 특별히 복잡한 편이 아니라 석목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비싼 재료가 많이 필요했다.
책자의 뒤에는 영통결(通灵诀)이라 불리는 술법도 적혀있었다. 대충 읽어보니 계약과 관련된 법결인 듯했다.
“국 사숙, 이 법결은 무엇입니까?”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앞에 기록된 소환집법은 이계의 생물을 소환하기 위한 것이다. 그 생물을 수하로 삼기 위해선 통영결을 사용해 복종 계약을 해야 하지. 그렇지 않는다면 표식이 효력을 잃은 후엔 다시 소환할 수 없게 된다.
일단 계약을 맺으면 계약의 힘만으로 소환이 가능하기 때문에 재소환을 할 때는 진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참고로 이계의 생물이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은 끊임없이 기력을 소모한다.
소환된 대상의 힘에 따라 소모되는 기력의 정도도 다르지. 언젠가 영계술사의 경지에 오르면 나처럼 오랫동안 소환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국 사숙이 간단히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군요.”
“이계의 생물은 대부분 포악하기 때문에 계약을 맺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나는 처리해야하는 중요한 일이 있으니 특별한 일이 없다면 떠나도록 해라.”
국 사숙이 다시 한 번 주의를 주고 몸을 돌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석목은 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물건을 챙겨 자리를 떠났다.
* * *
사령계.
회색빛 하늘에 검은 구름이 낮게 떠있고 칼 같은 광풍이 불었다. 구름 너머의 끝없는 회색빛 하늘은 굉장히 답답한 느낌이었다.
어느 황폐한 언덕 근처에선 팔이 하나 없는 사람 형태의 해골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해골의 몸에는 뼈가 몇 개 부족했고 몇몇 뼈들은 심하게 균열이 가있었다.
해골은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곧 부서질 듯 끼익끼익,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외팔 해골은 꿋꿋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해골은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잠깐씩 발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들어 하늘에 걸린 12개의 핏빛 달을 바라봤다. 어두운 눈구멍에 푸른 불꽃 2개가 천천히 일렁였다.
한참을 걷던 해골은 결국 검은색 비탈길을 끝까지 올랐다. 주위를 둘러본 해골은 다시 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해골의 발밑 근처에서 진흙이 갈라지더니 팔뚝 두께의 흰 벌레가 튀어나왔다. 벌레는 뱀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입을 벌려 외팔 해골의 발목을 노렸다.
해골은 눈구멍의 푸른 화염을 반짝였지만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발목을 물렸다.
벌레가 하얗고 통통한 몸을 미친 듯이 흔들며 해골을 물어뜯자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해골의 뼈를 통째로 씹어 삼키려는 속셈인 듯했다.
하지만 곧 외팔의 해골이 몸을 꺾으며 상상도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단숨에 흰색 벌레의 몸을 잡아챘다.
쫙!
외팔의 해골이 세차게 벌레를 잡아당겼다. 흰색 벌레는 입을 채 벌리기도 전에 해골의 발목을 문 그대로 반으로 찢겨졌다.
이 연속된 동작은 빛처럼 빨라서 곧 허물어질 것 같은 해골이 한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처음 벌레를 피하지 않은 것도 모두 계획된 것이었다.
외팔 해골은 이내 입을 벌리고 가볍게 숨을 들이켜 흰 벌레의 시체에서 날아온 콩만 한 푸른 화염을 삼켰다.
그러자 외팔 해골의 눈구멍에 있는 푸른 화염이 조금 커지더니 몸에서는 검은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해골의 몸에 닿자 갈비뼈의 균열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검은색 연기는 점점 옅어지더니 곧 소멸됐고, 해골은 눈구멍의 푸른 화염을 몇 번 반짝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전과 같이 느린 속도로 걸어갔다.
* * *
석목은 국 사숙의 거처를 떠나 빠르게 집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닫고 자리에 앉은 석목은 몹시 흥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 국 사숙을 도우며 혼사에 대해 상당한 이해를 했다. 그뿐 아니라 그가 혼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혼사로 활동하기 위해 드는 비용은 다른 술사보다도 놀라울 정도로 커서 지금 수준으로 돈을 벌어선 꿈도 꿀 수 없었다.
석목이 품에서 얇은 서책을 꺼내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세세하게 읽었다.
그 후, 종이와 붓을 꺼낸 그는 무언가 꼼꼼히 계산을 했다.
곧 깜짝 놀랄만한 숫자가 나왔다.
이 소환진법을 만들기 위해선 최소 40만 냥이 필요했다. 게다가 이 견적은 진법을 실패했을 때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가격이었다.
석목은 씁쓸하게 웃으며 서책을 챙겨 넣었다.
얼마 전 존영각에 부적을 만들어 주고 보수를 받았지만 현재 그가 가진 은자는 고작 30만 냥 정도뿐이었다. 진법을 만들기 위해선 무려 10만 냥 정도나 부족했다.
또한 술법과 반야천상공을 수련하기 위해서도 은자가 필요했다. 소환을 위해서 수련을 중지할 수는 없었다.
석목은 한숨을 쉬었고, 한동안은 해골을 소환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석목은 잠시 머뭇거리다 화금석의 독액이 들어있는 병을 꺼냈다.
해골을 한동안 소환할 수 없게 됐으니 운철흑도에 관한 일을 먼저 처리할 생각이었다.
화금석의 독액을 얻었으니 이젠 흑도를 법기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하지만 석목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석목은 조평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다.
조평이 부적술사인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다만 흑도에 어느 술법을 새길지는 고민할 필요가 있어보였다.
석목은 그렇게 생각을 하며 영부보경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 * *
3일 후, 조평의 대장간.
“하하, 며칠 사이에 이렇게 많은 화금석의 독액을 얻어오다니 역시 석 사제는 대단하네. 그 화금석은 국 사숙이 굉장히 아끼는 소환수라 우리 이화회에서 독액을 얻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했었네. 그런데 이리 쉽게 대량의 독액을 얻어내다니 정말 감탄스럽구나!”
조평이 독액이 담긴 병을 보더니 석목을 한껏 칭찬했다.
“때마침 국 사숙의 일을 돕게 돼 얻었을 뿐입니다. 독액을 얻었으니 이제 조 사형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석목이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내가 돕겠네. 내가 직접 만든 도니 법기로 만드는 것 역시 내가 직접하고 싶었다네.”
조평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석목은 대장간에 오면서 조평이 요구했던 부적을 챙겨왔다.
이 정도 양의 부적은 다른 부적술사학도라면 한 달이 걸려도 완성하기 힘들었겠지만 석목은 고작 며칠 사이에 이를 다 제작해냈다.
부적을 받은 조평은 석목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더욱더 커졌다.
“쇠뿔도 단 김에 뽑는다고 바로 지금 시작하도록 하지. 따라오게.”
조평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