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야습
일주일 후, 석목의 방 안.
수없이 많은 흑빛과 은빛 검광이 반짝이며 휙휙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빠르게 휘둘러지는 운철흑도가 석목의 몸을 물 샐 틈 없이 보호했고 월광해담은 그 사이사이를 드나들며 석목의 주위를 민첩하게 선회하고 있었다.
그때, 석목이 갑자기 왼손 손가락을 움직였다.
쉬익!
은색 검광이 마치 날카로운 화살처럼 탁자를 향해 발사됐다.
은색 곡도는 탁자와 부딪치기 직전, 기이하게 방향을 틀더니 탁자의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곧 석목의 전신을 감싸던 검은색 검광이 사라지고 날아 돌아온 곡도와 흑도가 동시에 등 뒤의 두 칼집으로 들어갔다.
석목은 가볍게 숨을 뱉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비장의 수가 생겼으니 이젠 어떠한 상황이 와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됐다.
이윽고 손가락에서 반지를 뺀 석목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좌언과의 대결을 겪은 후 석목은 병급제자의 실력을 재평가했다.
고작 100위 언저리인 좌언과 겨루며 상당히 고전했을 뿐만 아니라 자칫 크게 다칠 뻔 했다. 산수도를 사용하지 않고 등급전에서 좋은 순위를 얻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준비를 더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영부보경에는 토(土)속성 방어 부적인 금갑부(金甲符)가 있었다.
그 부적은 경신부와 동일한 12개 부문으로 구성돼있었지만 부문이 경신부보다 상당히 복잡했다. 그 부적을 사용해 생기는 보호막은 후천후기 무인의 전력이 담긴 공격을 막아낼 수가 있었다.
그 부적을 지니고 금사갑을 입는다면 등급전에서 높은 순위를 얻을 확률이 상당히 올라갈 것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석목은 곧 금갑부 제작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토속성 영근이 없는 석목이 금갑부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토속성의 영석을 구해야만 했다.
다음날, 석목은 광원전에 하급 부적을 제작해주는 대가로 토속성 하품 영석을 구한다는 공고를 올렸다.
등급전이 가까워서인지 부적제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하여 공고를 올린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화회와 존영각이 거의 동시에 석목을 찾아왔다. 둘 사이에서 고민을 하던 석목은 결국 전부 다 받아들였다.
그 후, 석목은 10일동안 부적을 전부 다 제작했다. 석목은 보수로 토속성 하급 영석 2개뿐 아니라 십만 냥 이상의 은자를 덤으로 받았다.
하지만 석목은 한동안은 더 이상 부적제작 의뢰를 받지 않을 계획이었다. 등급전이 가까워져 이런 일에 소비할 시간이 없기도 했고 많은 부적을 유통해서 하급 부적에 대한 수요가 일시적으로 대폭 줄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 *
10일 후, 석목의 집.
한 손에 황토색 영석을 든 석목이 법붓을 든 다른 손을 천천히 움직여 푸른 부적지에 부문을 그리고 있었다.
열한 번째 부문이 완성됐을 때 부적이 노란 빛으로 반짝이더니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아!”
가볍게 탄성을 내뱉은 석목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 시도였다. 지금까지의 시도 중 가장 잘 그린 부적이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곧 첫 번째 토속성 하급 영석의 영력이 전부 다 소진 될 것 같았다.
술법진의 모든 부문은 독립되어 있지 않고 연결돼 있었다. 부문이 복잡할수록 그 연결도 더욱 복잡해지기 때문에 술법진이 쉽게 불안정해졌다.
석목은 결국 3일 동안 2개의 토속성 영석을 전부 사용해 금갑부적 하나를 제작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한 장만으로는 부적의 효력을 실험할 수 없어서 부적의 효과를 확인하지 못한 석목은 약간 불안해졌다.
역시 가장 믿을만한 것은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 석목은 그 후 반야천상공과 온신술을 필사적으로 수련하며 등급전 전에 다음 단계로 돌파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석목이 얼마 뒤에 열리는 등급전 준비에 열을 올리는 사이, 멀리 떨어진 대제국에선 3국의 모든 종문을 경악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 * *
오주(吾州), 복주(复州), 예주(芮州)는 대제국의 36주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3개 주였다. 야만족의 황무지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이 변경의 3주는 모두 연경부(延庆府)의 관할지였다.
야만족의 황무지는 토지가 좋지 않고 항상 자원이 부족했다. 그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자 그들은 인접한 삼국의 인족(人族)을 노리기 시작했다. 수시로 병사를 파견해 자원을 강탈했고 사람을 납치해 노예로 삼았다.
대제국의 변경인 이 3개 주는 야만인이 집중적으로 침입하는 지역으로 잠잠할 날이 없었다.
대제국의 조정은 이를 좌시하지 않고 대군을 주둔시켜 침입을 막아냈다.
야만족은 고대 거인의 혈통을 계승한 종족으로, 일반적으로 인족보다 건장하고 키가 컸으며 성격은 포악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중 토템용사(图腾勇者)는 몸에 토템문신을 새기는 방식으로 체내에 괴수의 혼을 봉인해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고 더욱 흉악하고 잔인해진다.
토템용사는 인족의 무인과 비슷하며, 강했지만 일반인보단 그 수가 훨씬 적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만족과의 교전에서 인족은 언제나 큰 피해를 입었다.
100여 년 전, 대제국에 호국대장 악대가 혜성처럼 나타나면서 상황이 점차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대제국군을 용맹하게 통솔해 승리를 거듭하며 야만족을 단번에 삼주 밖으로 몰아냈다.
악대는 혁혁한 공을 인정받아 진만공이라는 칭호와 작위를 하사 받았다. 대제국에 손꼽을 정도로 적은 왕과 성씨가 다른 국공(国公)이 된 것이었다.
* * *
깊은 밤. 오주, 흥하성(兴贺城).
면적이 수백만 평에 달하는 흥하성의 구불거리는 성벽은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용 같아 보였다. 야만족의 황무지와 오주의 경계에 위치한 흥하성은 대제국의 가장 중요한 국경의 군사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다.
흥하성은 산과 강에 인접해 있어 지리적 위치가 굉장히 좋았다. 북성(北城)의 밖으로는 푸른 산맥이 펼쳐져 있었고, 산맥은 높진 않았지만 족히 몇 천리는 이어져 오주의 관문이라 불렸다.
남성(南城) 밖으로는 한없이 광활한 윤면강(伦绵江)이 흐르고 있었다. 윤면강 길이는 수만리에 달했으며 1년 내내 풍랑이 일고 무수히 많은 암초가 숨겨져 있어 물에 익숙한 어민도 감히 강을 건널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허니 물의 특징을 알지 못하는 야만족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10만의 정예군이 주둔하고 있는 흥하성은 난공불락의 성이라 할만 했다. 100여 년간 무수한 야만족 용사가 이 성을 넘지 못했다.
오주는 변경 3주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오주만 잃지 않는다면 대제국은 언제든 병마를 복주와 예주에 지원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야만족은 복주와 예주의 국경에 침입을 했더라도 깊게 침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흥하성은 대제국에게는 가장 중요한 성이었고, 야만족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진만공 악대도 이러한 이유로, 국공부(国公府)와 변군(边军)의 군무당을 모두 흥하성 내에 설립했다.
흥하성은 야간 통행금지 제도가 시행되어, 야간에는 소수의 순찰대만 움직일 수 있어 모든 거리가 조용했다.
허나 이 밤의 어둠을 틈타 이동하는 한 무리가 있었다. 야행복을 입은 10여명이 어느 객잔 후문에서 우르르 빠져나와 몰래 성의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성 내부의 길을 꿰차고 있는지 사람이 없는 골목길로만 이동했다.
같은 시간, 순찰대가 막 지나간 어느 가게의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몇 명이 나와 골목길 사이로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어느 집에서도 문이 열리더니 예닐곱 명이 나와 순식간에 또 자취를 감췄다.
같은 장면이 흥하성의 곳곳에서 연출되었다.
밤의 어둠에 몸을 숨긴 이 사람들은 순찰대를 피해 잘 이동했다.
흥하성 서쪽에 위치한 건축물은 대부분 낮고 낡은데다 다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성의 서문과 인접한 만큼 야만족 침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과거에 무너지고 재건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 까닭이었다.
악대가 흥하성에 주둔한 이후 어느 정도 상황이 개선되긴 했으나 이곳에 생활하는 이들은 여전히 대부분 빈곤했다. 때문에 이곳은 자연스럽게 성의 빈민촌이 되었다.
최근 100여 년간 빈민촌 역시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지만, 오늘밤 이 평화에 비로소 금이 가기 시작했다.
* * *
반 시진 후, 어느 낡은 가옥에 짙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피바다가 된 바닥엔 시체 6구가 쓰러져있고 이중엔 30대 부녀자도 있었다.
그녀의 목엔 엄지손가락 두께의 구멍이 뚫려있었고 창백한 손은 2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목에 동일한 구멍이 있는 남자아이는 잔인하고 정확한 일격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은 듯 보였다.
피바다 곁에는 일고여덟 명의 사람과 악독하게 생긴 중년의 남자가 무거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마른 청년이 나타나 가옥에 들어갔다.
“소 대인, 성의 모든 용사가 집결했고 길목에 있는 민가는 모두 깨끗하게 처리했습니다.”
마른 청년의 보고를 들은 중년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살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출발한다!”
주변 민가에서 300명의 사람들이 분분히 나타나 성의 서문 방향으로 조용히 이동했다.
흥분한 표정을 짓고 이동하는 그들은 인족과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사실 야만족이었다. 강제로 납치한 인족의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들은 과거 10여 년간 연이어 성으로 잠복파견 되었다.
야만족은 자신의 혈통을 명예롭게 생각했다. 인족은 노예나 가축정도로 생각했으며 일부 부족은 인육을 먹기도 했다.
인족의 혈통이 절반 섞인 이들은 어려서부터 부족에서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인족을 더욱 증오했다. 그렇기 때문에 방금 빈민촌의 인족주민을 도살하면서도 일말의 사정도 봐주지 않았다.
흥하성 서쪽 성벽에는 수십 장마다 성루가 하나씩 설치돼 있었다. 안에는 항시 100여 명의 병사가 주둔했으며 주야로 번갈아가며 성 밖을 감시했다.
그때, 성루에서 따분하게 성 밖을 지켜보던 병사 2명은 깜짝 놀랄만한 장면을 목격했다.
어둠 밖에 보이지 않던 성 아래에 갑자기 횃불이 하나 빛나더니 곧 빠르게 늘어나며 한눈에 다 보지 못할 정도로 넓은 불의 바다를 형성했다. 수많은 불빛이 성벽 아래 수십 리를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끝없이 펼쳐진 불빛 아래, 괴수의 가죽을 걸친 변발머리의 전사들이 한 손엔 각종 기괴한 무기를, 다른 한 손엔 거대한 방패를 들고 서있었다.
키가 1장 가까이나 되는 그들의 기세는 실로 괴수를 보고 있는 듯 아주 드셌다. 또한 많은 이들이 피부에 새긴 기이한 형태의 문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불어 이들 모두 피에 굶주린 듯 두 눈에 살의가 가득 차 있었다.
쾅!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가 온 대지를 흔들었다.
무수한 야만족 전사가 빠르게 진형을 갖추고 성벽을 향해 질주했다. 드넓은 불바다에 맹렬한 파도가 몰아치며 흥하성을 향해 매섭게 쏟아졌다.
방패를 든 전사 뒤엔 사다리를 휴대한 공성부대가 위치했고 그 뒤에는 수많은 궁수가 있었다.
“와!”
우렁찬 나팔소리가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질서 있게 성루에서 나온 인족 병사들은 수십 리에 달하는 성벽을 가득 메웠고, 일제히 45도 각도로 활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무수한 화살촉이 차가운 빛을 반사했다.
거대한 용 같은 성벽에 서늘한 빛이 솟아오르자, 성 밖에 있던 야만족 전사들 시선엔 마치 용이 비늘을 세운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쉬이익!
성벽에서 발사된 화살이 메뚜기 떼처럼 온 하늘을 까맣게 덮었다.
처참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단 한 차례의 일제사격에 성벽 아래의 수많은 야만인이 쓰러졌다.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야만족 용사들은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피에 자극된 듯 괴수처럼 울부짖으며 인족 병사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야만족 대군은 수천의 사상자가 생겼지만 결국 성벽 아래까지 물밀 듯 밀려들어와 화살비를 무릅쓰고 성벽에 운제(云梯:높은 사다리) 100여개를 설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