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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62화 (62/916)

62화. 연이은 격변 (2)

맞은편에 있던 사사는 살짝 흐려진 낯빛으로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자 흑마문 장문인이 한 손을 가볍게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풍 사제는 어찌 그리 말하는가. 말해보라.”

흑의의 노인이 말했다.

“장문인께서도 방금 말씀하셨다시피 야만족의 이번 침입은 목적이 불명확합니다. 어쩌면 지난번과 같이 그저 일부 물자와 사람을 강탈하려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지원을 거절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선 한동안 사태의 추이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대제국의 3종이 우선 야만족과 겨루는 것을 보며 상대의 내막을 살펴보고 결정을 해야 합니다. 5년 전, 우리 염국의 상결군(上阕郡)이 야만족에 침입해 연달아 성을 점령당했을 때 우리 흑마문과 풍화문만이 연합해 마지막까지 그들을 격퇴했었지요. 대제국의 3종은 몇 사람 지원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장문인께서도 그 일을 잊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금안의 남자가 콧방귀를 한번 뀌곤 차갑게 말했다.

이에 장내가 모두 침묵했고, 몇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기도 했다.

흑마문의 장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의자의 손잡이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금안의 남자의 말에 마음이 흔들린 모양이었다.

“당시에는 고작 야만족 중 한 부족만이 침입한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염국의 두 종문만으로도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상황은 5년 전 그때와는 크게 다릅니다. 야만족의 기세가 매우 매서운 것을 보아 아마 진즉부터 모의를 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흥하성이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점령당했겠습니까? 지원을 지체하면 그 때는 늦습니다!”

다급해진 사사가 다급히 일어나 말했다.

금안의 남자 역시 그 모습을 보고 급하게 몸을 일으켜 무언가 말하려했다.

흑마문의 고위층은 명확히 두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 세력은 사사가 중심이었으며 다른 한 세력은 금안의 남자 풍 공자가 중심이었다. 이 두 세력이 옥신각신 한다는 건 종문 내에도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일이었다.

“그만 다퉈라.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들어봐야겠구나.”

장문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사와 풍 공자는 서로를 보고 콧방귀를 크게 뀌며 각자 자리에 앉았다.

바로 그때, 장내에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한 흑의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빠르게 들어와 큰 소리로 황급히 고했다.

“큰일입니다! 현무종의 대장로 화요와 천음종의 대장로 공손우가 변고를 당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천천히 말하라.”

놀란 장문인이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장내의 다른 사람들 역시 모두 놀랐다.

“장문인과 각 장로, 봉주께 보고 드립니다. 방금 받은 소식에 따르면 현무종 내 금지에서 폐관 수련을 하던 화요가 야만족 제일의 강자 망상에게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같은 날, 공 장로도 외출을 하던 중 지계(地阶) 경지에 오른 야만족의 기습을 받았습니다. 종문으로 도주하는데 성공했지만 중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흑의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장문인은 크게 놀란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 정보가 사실인가?”

사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본 문에서 현무종과 천음종에 심어놓은 첩자가 보낸 정보입니다. 절대 틀릴 리가 없습니다.”

흑의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장문인은 곧 손을 휘저어 중년 남자를 내보냈고, 장내 모든 이들의 표정이 매우 어두워졌다. 특히 풍 공자 세력들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현재의 상황을 봤을 때, 빠르게 준비하지 않는다면 아마…….”

사사가 급하게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장문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야만족 제일의 강자라 불리는 망상은 수십 년 전에 이미 지계 중기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화요 역시 지계 초기의 경지에 들어선 강자이지요. 그런 그를 살해했다니 더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야만족이 이번에 과감하게 대규모 침입을 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이번 야만족의 침입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것 같습니다.”

말석에 앉아 있던 골호가 말했다. 그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이 일에 지계의 강자까지 개입된 이상 대장로께 아뢰어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풍 공자가 말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명령을 하달하겠다. 종문의 수비를 강화하고 모든 제자들의 하산을 금지한다. 경계진법을 전부 가동해 야만족 고수가 본 문을 기습하는 것을 막도록 하라.”

흑의의 노인이 명령을 내렸다.

“네!”

장내의 모든 사람이 급하게 일어서며 일제히 대답하고 분분히 밖으로 나섰다. 사사와 풍 공자는 가장 마지막으로 나서며 서로를 한번 쳐다본 뒤 무표정한 얼굴로 각자의 길을 갔다.

풍 공자는 계단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다 어느 모퉁이에 도착한 풍 공자는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1호 산봉우리 뒤의 산을 바라보았다.

이 각도에선 그 산에 위치한 고요한 정원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정원은 산봉우리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고 주위는 미미한 검은색 안개에 덮여있었다.

그곳은 흑마문의 대장로가 폐관수련을 하는 곳으로 평소에 장문인을 제외하곤 각 봉주나 장로들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풍 공자의 눈에 순간 기이한 빛이 스쳐지나갔고, 그는 곧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갔다.

그의 신영이 멀어지자 주위의 한 바위 뒤에서 관능적인 몸매를 가진 소녀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금소채였다.

금소채는 풍 공자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 아름다운 눈을 반짝였다.

* * *

장문인은 1호 산봉우리에 위치한 정원이 달린 가옥 문을 열고 들어갔다.

회색 벽과 푸른 지붕으로 된 가옥은 일반적인 건축물과 다름없이 매우 평범했다. 유일한 차이라면 중앙에 1장정도 높이의 제단이 있다는 것이었다.

제단의 가장 윗부분엔 검은색 화염이 타오르며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화염의 영향인지 건물 안 공기는 다소 끈적하게 느껴졌다. 덩달아 노인의 호흡도 상당히 가빠졌다.

그는 이곳에 처음 온 것이 아닌 듯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제단의 화염을 그대로 지나쳐 제단 뒤에 위치한 안채의 문 앞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종염이 대장로를 뵙길 원합니다.”

흑의의 노인이 안채를 향해 몸을 굽혀 예를 표하며 말했다.

“들어오너라.”

방 안에서 위엄 넘치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스스르 열렸다.

장문인이 안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방 안은 매우 넓었지만 탁자나 침상 같은 일반적인 가구는 전혀 없었다.

사방의 벽엔 암홍색의 도료로 기괴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은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고 서있는 괴수 같아 보이기도 했다. 세어보니 총 여덟 개가 그려져 있었다.

방의 입구에서 보면 안쪽은 굉장히 음침해 보였다.

전부 비어 있는 방 안엔 오직 거대한 검은색 조각상 하나만 놓여 있었는데 이 조각상은 흑의를 입은 건장한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각상 화염과 같은 곱슬머리를 가진 남자였고, 얼굴은 검고 험상궂었으며 뿔이 나있었다. 입에는 긴 송곳니 2개가, 삼지창과 비슷한 긴 무기를 쥔 두 팔은 높이 떠올라 베어 내리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 조각상은 흑마문이 모시는 흑염마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공양을 위한 탁자도 없었고 제사를 위한 초도 없었다.

조각상의 앞엔 커다란 사람이 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문을 등지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대장로님.”

장문인이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이냐?”

커다란 사람이 뒤돌아보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방금 소식을…….”

장문인이 현무종의 대장로가 살해당한 것과 천음종의 대장로가 습격당한 이야기를 했다.

“화요가 종문 내 금지에서 살해당하다니! 현무종의 금지인 오급궁(五极宫)은 현명음살대진(玄冥阴煞大阵)이 보호하고 있거늘. 그 진법은 지하의 음기와 연결되어 조금의 빈틈도 없다. 그곳에 잠입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힘으로 진법을 파훼하는 방법뿐이야. 망상의 경지가 지계 후기의 경지까지 오른 것이 분명하구나. 하하……, 과연 하늘이 내린 재능이구나…….”

대장로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런 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까만 장발을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린 그는 주름 하나 없는 매끄러운 피부의 소유자였다. 나이도 많아야 40대 정도로 보였다. 장문인보다 한참이나 더 어려보였다. 허나 이 흑마문의 대장로는 겉으로만 어려보일 뿐 실제 나이는 300살에 가까웠다.

“대장로님, 본 문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장문인이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느냐. 야만족의 세력은 너희가 상상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만약 대제국의 세 종문이 멸문당한다면 우리 흑마문도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없게 되겠지. 종문 내의 제자들을 최대한 빨리 소집해 대제국으로 지원 보낼 준비를 하거라.”

대장로가 즉시 지시를 내렸다.

“네!”

“망상의 경지가 또 한 단계 올랐으니 지계의 강자까지 전부 총동원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선 내가 다른 종문의 지계 강자들과 의논할 테니 야만족 대군과 토템용사들에 관한 것은 너희가 맡도록 하거라.”

대장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장문인이 어두운 얼굴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 * *

현무종 대장로가 살해당한 사실과 천음종의 대장로가 중상을 입은 소식이 전해지자 3국의 7종문 모두가 놀라 불안감을 느꼈다.

이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그들은 즉시 연맹을 맺고자 논의를 하며 야만족의 침입에 대한 반격을 준비했다.

허나 흑마문의 고위층은 무슨 생각인지 야만족의 침입에 관한 일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래도 갑급제자와 일부 을급제자는 각각 다양한 경로로 이 소식을 접하고 긴장을 했지만 상황을 전혀 모르는 병급 제자들은 여전히 연말의 등급전을 준비하며 들떠있기만 했다.

석목은 지난날들과 마찬가지로 집에 틀어박혀 수련을 하고 있었다. 당장 집 밖의 상황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극히 적은데, 그런 석목이 지금 수만 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일이야 알리가 없었다.

석목은 반야천상공과 온신술을 계속 수련하면서 가끔 부적 제작 의뢰도 받았다. 굉장히 바빴지만 그 덕에 은자와 자원을 대량으로 얻을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석목은 결국 소환진법에 필요한 재료를 모두 구했다.

이에 석목은 집 대문과 창문을 빈틈없이 닫아 밖에서 안을 전혀 볼 수 없게 했다. 이런 상황은 며칠간이나 지속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궁금증을 가졌지만 신입 제자 사이에 이미 큰 명성을 가진 석목을 방해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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