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연나(烟罗)
이 시각, 집 안에 있는 석목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석목의 눈엔 은은한 금빛이 뿜어져 나왔고, 검은 법붓을 쥔 얼굴에도 피곤이 역력했으나 눈빛만은 굉장히 신중했다.
바닥엔 1장 크기의 팔각형 진법이 새겨져 있었다. 진법을 구성하는 부문은 이전에 석목이 공부했던 부문과 또 크게 달랐다. 매우 괴상해 보이는 이 부문들은 고대의 어느 상형문자같은 문양을 하고 있었다.
부문 모양은 어떤 것은 가축 같고 어떤 것은 조류 같았으며 어느 것은 무엇인지 전혀 알아 볼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이것들은 기괴한 낙서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서로간의 연결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진법의 연결점에는 네다섯 개의 회색과 흑색 광석이 끼워져 있었다. 미미하게 반짝이는 광석들은 다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다.
이 광석들은 오행속성 영석보다 더욱 진귀한 공간속성의 영석과 음속성의 영석이었다. 그는 한동안 벌어들인 대부분의 은자를 이것들을 구매하기 위해 사용했다.
석목은 길게 숨을 내뱉고, 손에 든 법붓을 챙겨 넣고 진중한 표정으로 주문을 몇 마디 외었다. 순간 진법이 은은한 검은 빛을 뿜어냈다.
이 광경에 석목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이것은 그가 난생 처음으로 설치한 진법이었다. 진법을 설치하는 것은 부적을 제작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워서, 3일을 소모해서야 겨우 진법을 완성했다.
석목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아깝다는 얼굴로 증령단을 복용했다.
몇 번 호흡을 하던 석목은 갑자기 두 눈을 뜨고 진법에 한 손바닥을 올려놓은 뒤 법력을 세차게 주입해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진법에 끼워진 영석이 눈부신 빛을 내뿜었다.
이어서 소환진법은 검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고, 석목의 손바닥에서 가까운 곳부터 부문이 하나씩 빛을 뿜어냈다. 잠시 후, 모든 부문이 빛을 내자 주위에선 웅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주문을 외우는 석목의 목소리도 점점 커졌고 이에 상응하듯 진법이 발산하는 검은 빛도 점점 밝아졌다.
1각 후, 팔각진법에서 발산하는 빛은 눈이 부실정도로 환해졌다. 그리고 방 안에는 검은 연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방엔 문과 창문 모두 다 닫혀있었기에 다행히 밖에선 이 놀라운 현상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석목의 이마에 파란 핏줄이 서고, 땀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때, 완벽하게 작동한 진법에서 흡인력이 발생해 석목의 체내에 얼마 남지 않은 법력을 빠르게 흡수했다.
석목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주문을 외우는 목소리는 매우 또렷했다.
곧 진법 중앙에 서서히 죽음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잿빛 연무가 나타났다.
석목은 이 모습에 크게 기뻐하며 품에서 빠르게 흰색 병을 꺼내, 뚜껑을 열고 잿빛 연무 위에 뿌렸다.
휙!
검은색 액체가 병에서 뿜어져 나와 회색 연기에 흩뿌려졌다.
천천히 생겨나던 잿빛 연무는 회색 액체를 흡수한 후 굉음과 함께 미친 듯이 뿜어져 나왔다. 연무는 어느 힘의 이끌림에 따라 회전을 하다 곧 1장 크기의 잿빛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소용돌이에서 분리된 상당한 양의 잿빛 연무는 이내 사방으로 퍼져 진법 위를 전부 덮었다.
석목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빠르게 주문을 외다 돌연 한 손가락을 뻗었다.
순간 손가락에서 검은 빛 한 줄기가 나와 잿빛 소용돌이에 흡수됐다.
펑! 펑! 펑!
진법에 끼워져 있던 영석이 거의 동시에 터지기 시작해, 잿빛 소용돌이엔 팔뚝 두께의 검은색 번개가 번쩍, 하고 빛났다. 번개는 곧 천둥소리와 함께 사라지며 방 전체를 뒤흔들었다.
곧 팔각진법의 빛이 모두 꺼지고 연무의 소용돌이가 갑자기 멈췄다. 대신 진법의 중앙에 흐릿한 사람의 그림자가 생겼는데, 흩어지지 않은 연무에 모습이 가려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석목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집중해 그 그림자를 봤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갑자기 옆에 둔 운철흑도를 급히 쥐고 다른 한 손으론 품속 부적을 꺼냈다.
하지만 흐릿한 그림자는 꼼짝도 않고 제자리에 서있기만 해서, 석목은 그제야 살짝 마음을 놓았다.
잿빛 연무가 점차 흩어지며 그림자 주인의 모습도 점점 자세히 보였다.
석목보다 조금 작은 해골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림자는 진법의 중앙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으며 눈구멍엔 두 개의 푸른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석목은 해골의 체내에 심어진 구령술의 표식을 감지했다. 이는 전에 석목이 사령계에서 고른 그 해골이었다. 모습이 맞는 걸 확인하게 되자 석목은 매우 기뻤다.
허나 석목은 해골을 다시 위아래로 훑어보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해골의 모습이 그의 기억과는 약간 달랐던 것이었다.
석목이 표식을 남길 당시, 해골의 온 몸은 너덜너덜했고 심지어 한 팔은 온데간데없었다. 한데 이 해골은 두 팔이 완전할 뿐 아니라 신체를 구성하는 뼈 역시 망가진 곳이 매우 적었다. 심지어 뼈의 색도 더욱 짙어진 듯했다.
석목이 앞의 해골을 관찰하는 동안 해골이 고개를 들어 눈구멍을 석목 쪽으로 고정시켰다. 그도 지금 석목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기다리던 석목은 해골이 자신을 공격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살짝 안심하며 천천히 말했다.
“이름이 무엇이지?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해골은 석목의 말에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자리에 꼼짝 않고 서있었다.
석목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큰 대가를 치르고 소환한 해골인데 지능이 상당히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에 석목은 갑자기 전 재산을 털어 채아를 소환했다던 국 사숙이 떠올랐다. 그제야 그의 마음이 절절하게 이해가 갔다.
허나 채아는 최소한 데리고 대화라도 할 수 있었지만 이 해골은 말조차 알아듣지 못했다.
석목이 생각에 잠긴 사이, 해골이 갑자기 눈구멍의 푸른 화염을 흔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이 매우 기뻐하며 황급히 말했다.
“앞으로 두 걸음.”
해골이 푸른 화염을 두 번 반짝였다. 그리고 한참 후 해골이 그제야 석목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흔들흔들 발을 앞으로 내딛어 두 걸음을 걸어갔다.
“반응이……, 너무 느리잖아!”
석목은 그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앉아.”
석목이 다시 명령을 내리자, 잠시 후 해골이 머리를 흔든 뒤 삐그덕, 소리를 내며 바닥에 앉았다.
석목은 마침내 살짝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골은 조금 멍청했지만 성실했다. 아직 진정한 계약도 맺지 않은 석목의 지시를 잘 따르고 있었다.
“잘 들어. 내가 너를 이곳에 소환했으니 이제부터 내가 너의 주인이다. 이제 소환계약을 실시할 테니 반항하지마라.”
석목은 해골의 공격에 대비해 다가가며 아주 천천히 말했다.
허나 해골의 푸른 화염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곧 다시 폈다. 아마 말이 너무 길었던 탓인 듯했다. 석목이 일부러 천천히 말했지만 해골의 낮은 지능으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석목은 해골에게 자세히 설명할 인내심이 없어 그냥 손을 뻗어 해골의 두개골에 손을 얹고 무언가를 빠르게 읊었다.
순간 검은 빛이 석목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왔다.
해골의 푸른 화염이 두 번 깜빡였고, 해골은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서 석목의 손바닥에서 나오는 검은 빛을 받아들였다. 검은 빛은 해골의 두개골 안으로 들어가 검은색 부문을 형성했다.
석목의 의식 한 가닥이 계약법결에 따라 해골의 두 눈구멍에 있는 영혼의 화염과 섞이며 한데 어우러졌다.
해골이 전혀 반항을 하지 않은 덕에 이 모든 과정을 순조롭게 마쳤다.
이내 완전히 안심을 한 석목이 팔을 거뒀다.
계약을 맺었으니 이 해골은 이제 석목의 진정한 소환수가 되었다.
이어서 석목은 해골에게 자신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예상은 했어도 석목은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해골은 정말 특별한 능력이 없는 것 같았다. 공격의 속도는 조금 빨랐지만 실력이 쉬체신공 8단계 경지의 무인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우선 돌아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다시 소환하겠다. 소환될 때 연무가 나선으로 회전했으니 앞으로 너를 연나(烟罗)라고 부르겠다.”
해골이 큰 쓸모가 없단 생각이 들자, 석목이 한숨을 쉬며 지시를 내렸다.
해골은 정신이 계약으로 연결된 후 석목의 말을 더 빠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계의 소환수는 이 세계에 소환된 상태에서 소환자의 기력을 소모한다.
석목은 진법을 설치하고 가동하는 과정에서 이미 기력을 상당히 소모했기 때문에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다.
곧 석목이 손을 휘젓자 해골 주위로 잿빛 연무가 나타났다. 해골의 몸은 점차 연기 속으로 사라져갔다.
“사령계에서 죽지 않도록 조심해라.”
해골은 몸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석목의 마지막 말을 어렴풋이 들었다.
* * *
사령계의 어느 높은 산봉우리의 산기슭. 잿빛 연무가 나타나며 잠시 후 안에서 흰 해골 한 구가 걸어 나왔다. 해골은 바로 석목이 소환했던 연나였다.
연나는 그곳에 서서 꼼짝도 않고 서있었다.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것 같아 보였다.
눈구멍 녹색 영혼의 화염엔 어렴풋이 검은색 부문이 생겨나 있었다. 부문으로부터 끊임없이 전달되는 미약하지만 청량한 기운은 연나에게 편안한 느낌을 줬다. 연나의 머리는 전보다 더욱 영민해진 것 같았다.
제자리에서 잠시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연나는 먼 곳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영혼의 불꽃에 새겨진 검은색 부문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연나의 움직임은 이전보다 더욱 빨라져 있었다.
그때, 연나가 걸어가는 방향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멀지 않은 곳에 어두운 해골 한 구가 흔들거리며 연나의 정면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해골의 눈구멍에는 푸른 불꽃이 미약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해골은 사령계에 가장 많이 존재하는 가장 하급의 개체였다. 눈앞의 높은 산봉우리에는 사령대군(死灵大军)이 몇 부대나 있었지만 고위급 우두머리의 소집이 없을 때면 대부분의 해골들은 주위를 무작정 노닐었다. 하지만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흰 해골도 연나를 발견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사령계에서 전쟁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면 해골과 같은 하급 개체는 마주치더라도 서로를 건드리지 않고 각자의 일을 했다.
연나는 수상한 움직임 없이 평온하게 앞을 향해 걸었다.
두 해골은 2척 정도의 간격을 두고 스쳐지나 갔다.
바로 그때, 어두운 해골의 귓가에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오더니 눈앞의 세계가 갑자기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툭!
어두운 해골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어두운 해골의 낮은 지능으론 당최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인지도 몰랐고, 연나는 해골이 미처 알아챌 시간도 주지 않고 빠르게 다가와 어두운 해골의 두개골을 밟아 산산조각을 냈다.
부서진 두개골에선 푸른빛이 날아왔다.
연나는 머리를 흔들거리며 입을 벌려 푸른빛을 입으로 흡수했다. 눈구멍의 두 푸른 불꽃도 몇 번 반짝였다. 매우 만족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어서 연나는 머리가 없어진 해골의 뼈를 두드려 보며 비교적 단단한 뼈를 몇 개 골라 너덜너덜한 자신의 뼈와 교체했다.
곧 검은 연기가 흩날리며 연나의 갈비뼈와 팔뼈가 하얗게 변했다.
회색과 흰색이 동시에 존재하는 몸은 매우 기괴해 보였지만 연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연나는 아무렇게나 몸을 움직여 본 후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자신이 도대체 어디를 향하는지는 연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석목을 만난 후 그저 머릿속에선 더욱 강해져야한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동시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물건을 되찾아야 한다는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연나는 마음이 답답했다. 도대체 무슨 물건을 되찾아야 한단 말인가? 머리가 몽롱한 연나는 무언가 많은 생각을 하려 할수록 무의식적으로 비틀거리게 됐다. 그에겐 앞으로 걸어가는 이 순간조차 마치 영원히 끝이 없는 심연을 향해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