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매복 공격
1년 후, 대제국의 변경. 복주의 모성.
검은색 옷을 입은 석목이 등에는 은색, 검은색 칼집을 메고 거대한 나무의 가지 위에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석목이 작은 어촌을 나선지 눈 깜짝할 사이 벌써 2, 3년이 흘렀다. 석목의 용모 또한 그때와 비교해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짙은 눈썹과 큰 눈은 여전했지만 수련을 하며 더욱 강인한 외모를 갖게 됐고, 얼굴의 윤곽도 뚜렷해졌으며 불그스레한 피부는 구릿빛으로 변했다. 키도 처음보다 상당히 많이 커졌고, 어깨 역시 한껏 더 넓어졌으며 가슴과 두 팔도 굉장히 다부지게 변해 전체적으로 거칠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석목은 무성한 나뭇잎 사이에 완전히 가려져, 미약한 호흡을 하고 있었다.
나무가 적은 이 숲은 멀리서 보면 굉장히 휑하게 보였고, 거기에 모래바람 소리까지 더해져 이곳은 변경 특유의 황량한 느낌이 은은하게 풍겼다.
1년 전, 모성은 결국 야만족의 공격에 함락됐다.
석목은 이곳에 잠입하는 도중 처참하고 처량한 광경을 수없이 목격했다. 도처엔 야만족에게 도살당한 마을이 있었고, 수많은 밭들은 야만족의 목장이 되었다.
수천, 수만의 건장한 남자는 가축 대접을 받는 노예가 되어 이리저리 불려 다녔고 조금이라도 야만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죽채찍으로 맞았다. 여인들의 시체는 어디서나 볼 수 있었고 노인과 아이의 시체도 길거리에 여기저기 버려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목도하고, 석목의 살의는 점점 커졌다.
석목은 인족이었고 대제국은 그의 모국이었다.
이 숲의 멀지 않은 곳에는 야만족의 8부 중 하나인 정연부의 군마장(军马场)이 있었는데, 석목의 현재 임무는 바로 군마장 밖을 순찰하는 순찰마를 매복 습격하는 것이었다.
이내 어렴풋이 들려오던 말발굽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석목은 귀를 쫑긋하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은은한 금색 눈을 빛내며 나뭇잎 사이의 틈으로 10명이 넘는 야만족 기병을 뚜렷하게 확인했다.
이 기병들은 키가 1장 가까이나 됐고 덩치도 우람했다. 등에는 뼈창을 메고 허리에는 돌도끼를 차고 있었고, 타고 있는 전투마 역시 일반적인 말 보다 훨씬 크고 맹렬해 보였다.
생각해보면 일반적인 말은 야만족의 무거운 몸과 병기를 감당할 수 없었을 테니 이는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무리를 이끄는 사람은 매우 건장하고 젊은 야만인이었다. 그는 석목의 다리보다도 두꺼운 팔로 아주 무거워 보이는 1장정도 크기의 낭아봉(狼牙棒)을 너무도 가볍게 들고 있었다. 또 그의 가슴에는 포효하는 푸른 수사자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석목은 순간 머릿속에 이와 관련한 정보가 떠올랐다.
야만족의 일반 순찰대는 보통 후천 토템용사가 이끌곤 했다. 실력은 인족의 후천무인과 비슷한 정도였다.
석목은 곧 오른손을 조용히 움직여 등 뒤의 운철흑도를 쥐었다. 그리곤 두 눈을 살짝 찌푸린 채 짙은 살기를 내뿜었다.
한 달 전, 인족 고수의 기습으로 군마장이 막중한 손실을 입었다. 때문에 무리를 이끄는 토템용사는 주변을 매우 경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천천히 나무 아래를 지나가던 중 이변이 발생했다.
촤악!
무성한 나뭇잎 사이에서 무리를 이끄는 토템용사의 머리 위로, 서늘한 검광이 쏟아졌다. 이 13개의 검은색 검영을 날린 이는 바로 석목이었다.
쿵!
야만인은 성이 나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시에 두꺼운 팔이 팽창하며 푸른 사자의 털이 무성하게 자랐다. 이내 그는 수도 없이 날아오는 검영을 향해 정면으로 낭아봉을 휘둘렀다.
쾅!
13개의 검영이 흩어지며 낭아봉의 공격도 멈췄다.
공격이 충돌하는 순간 상대의 괴수 같은 힘이 쏟아지며 오른팔에 뻐근함이 느껴졌다. 늘 스스로의 힘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석목은 크게 놀랐다. 이 야만인은 후천 중기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듯했다.
석목은 이 충돌한 힘의 반동으로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아 거대한 힘을 흘려보냈다.
곧 야만인의 낭아봉이 석목의 위로 휘몰아쳤다.
공중에 떠있던 석목은 눈을 빛내며 체내의 법력을 운철흑도로 주입해 휘둘렀다. 커다란 적색 검광은 다시 낭아봉과 충돌했다.
곧 눈부신 화염이 공중에서 폭발하고, 야만인은 얼굴에 덮치는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양손에도 극렬한 통증을 느낀 그는 하마터면 낭아봉을 놓칠 뻔했다. 더불어 그가 타고 있던 튼튼하고 커다란 군마는 석목의 거대한 힘을 2번은 버티지 못해서 네 다리가 전부 다 부러졌다.
뒤로 공중제비를 돌아 바닥에 착지한 야만인은 낭아봉을 애써 가슴 앞으로 들어올렸다.
나무 아래 착지한 석목은 오른팔이 시큰시큰해 힘이 없었다.
이내 석목은 왼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갑자기 입을 벌렸다. 작은 흰색 기가 야만인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바로 지척에서 날아오는 기의 화살을 보지 못한 야만인은 결국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푹!
흰색 기가 낭아봉을 지나 그의 가슴에 박혔다.
쾅!
기폭술이 폭발하며 그의 상반신을 조각냈다. 변발을 한 그의 머리는 곧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모든 과정은 매우 긴 것 같았지만 사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야만족 전사들은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 분분히 석목을 향해 뼈창을 던졌다.
순식간에 10개가 넘는 뼈창이 휙휙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석목은 전력을 다해 피했지만 오른팔에 손바닥 크기의 상처를 입었다.
그 잠깐의 틈을 타 10명이 넘는 야만족 전사가 허리의 돌도끼를 뽑아 들고 석목을 에워쌌다.
석목이 차갑게 웃으며 운철흑도를 바람같이 휘둘렀다. 이내 오싹한 냉기를 품은 검은색 검광이 그들을 향해 몰아쳤다.
야만족 병사는 힘이 소처럼 강했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후천무인인 석목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잠시 후, 10명이 넘는 야만족 병사는 전부 피바다 위로 쓰러졌다. 잘려진 팔다리는 사방에 널려 있었고 몸이 성한 시체는 단 한 구도 없었다.
석목은 성난 표정을 살짝 풀고 운철흑도를 등 뒤 검은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 후, 석목은 처참하게 터진 야만족 토템용사의 시체를 뒤졌다. 그러다 석목은 그의 허리춤에서 은이 둘러져 있는 골패(骨牌)를 찾아냈다. 그 위에는 지렁이 같은 기괴한 글자가 몇 줄 적혀있었다.
석목이 기쁜 표정으로 골패를 품에 챙겨 넣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석목은 서북쪽 방향으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 * *
반 시진 후, 100여명이 족히 되는 야만족 기병이 도착했다.
이들을 인솔하는 자는 일반적인 야만인보다 훨씬 컸다. 마치 불곰 같은 덩치의 이 중년 야만인은 성인 인족만한 크기의 철강도끼를 등 뒤에 교차해 메고 있었다.
지옥 같이 처참한 광경을 본 이 야만족들은 분노한 표정으로 무기를 뽑아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말에서 내린 중년 야만인이 주변을 훑어보고 반만 남은 토템용사의 시체에 다가갔다. 그는 눈썹을 몇 번 꿈틀거리다 돌연 얼굴이 새파래졌다.
“만사토템(蛮狮图腾)! 오나가 아닙니까?”
또 다른 키가 굉장히 큰 야만인이 다가와 절반만 남은 시체의 복부를 보고 매우 어두운 안색으로 물었다.
“맞네.”
중년 야만인이 이를 악물고 두 글자를 내뱉었다.
오나와 중년 야만인은 같은 부족 출신이었다. 반응을 보니 혈연관계도 있는듯했다. 키 큰 야만인은 눈치껏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용사를 연달아 살해하다니 인족이 너무 날뛰는구나. 몇 달 사이에 살해당한 수가 20명이 넘는다.”
중년 야만인이 분노에 차 이야기했다.
“이 근처에서 매복을 하다가 무리에서 떨어진 용사에게 손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즉시 통령 대인께 보고해 일대를 수색하는 게 좋겠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키 큰 야만인이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공동으로 보고하면 통령 어르신도 분명 허가하겠지. 오나는 우리 오화(乌火)부족의 가장 젊은 토템용사였어. 반드시 범인의 머리를 직접 베어 오나의 제를 지내겠다.”
중년 야만인이 살기 가득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 * *
그 시각, 야만인이 말한 범인은 이미 수십 리 밖을 벗어나 해무가 가득 덮인 숲 근처에 있었다.
석목은 수시로 사방을 경계하며 숲의 입구 방향으로 빠르게 질주했다.
숲에 진입해 1리 정도 더 이동한 석목은 그제야 속도를 늦췄고, 품에서 골패를 꺼내 만지작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1년 전, 야만족은 전에 없던 큰 규모로 대제국을 침략했다. 이에 맞서 3국 7종문은 신속하게 연맹을 맺어 야만족의 침입에 대항했다.
야만족은 그들의 반응이 이토록 신속할지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대제국 서부의 변경 3주를 점령한 야만족은 공세를 점차 늦추었고, 전쟁의 불길은 더 이상 깊이 파고들지 않아 염국과 황국까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가옥이 파괴되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노예가 됐다. 변경 3주와 인접한 3국의 각 주는 계속 불안함에 떨고 있었다.
흑마문의 고위층은 논의를 통해 등급전을 취소하고 제자들을 차례대로 파견해 대제국의 변경에서 야만족과 대항하도록 했다. 임무는 대체로 야만족과의 전투가 위주였다.
석목은 뛰어난 부적제작 능력 덕분에 처음에는 파견되지 않고 하급부적만 제작했다. 허나 점점 전황이 나빠지며 흑마문에 인력이 부족해지자 석목도 결국 반년 전 파견을 지시받았다.
석목은 전쟁의 가장 최전선이자 대제국의 변경 3주 중 하나인 복주에 오게 되었다.
이내 석목은 숲의 익숙한 길을 따라 숲 외곽에 위치한 낭떠러지에 도착해 커다란 나무 앞에 멈춰 섰다. 그런 뒤 좌우를 살피며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안전을 확인한 후 품에서 푸른 영패를 꺼냈다.
영패의 정면엔 대여섯 개의 붉은 부문이 새겨져 있었고 주위에는 복잡한 무늬가 둘러져 있었다.
석목은 오른손으로 영패를 강하게 쥐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법력을 주입했다. 곧 영패의 부문이 은은한 푸른빛을 내며 눈앞의 나무쪽으로 쏘아졌다.
나무뿌리에선 한동안 푸른빛이 반짝이다가 곧 1장 크기의 동굴입구가 드러났다. 안쪽으로는 어렴풋이 아래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보였다.
석목은 동굴의 입구로 들어갔다. 그러자 공기의 파동과 함께 입구가 흐릿해지더니 종국엔 흔적 하나 없이 완전히 사라졌다.
* * *
석목은 길지 않은 통로를 지나 매우 넓은 지하 공간에 도착했다.
그 공간 벽엔 흰빛을 내는 광석이 끼워져 있어 어둡지 않았다.
그곳은 방치된 갱도 같아 보였다. 벽의 곳곳에는 채굴을 한 흔적이 있었으며 방도 10개가 넘게 있었다.
조금 안쪽에는 거친 돌 탁자 하나와 돌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는데, 일고여덟 명 정도 둘러앉아 무언가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석목이 걸어오는 소리를 듣고 분분히 고개를 돌렸다.
옥광석(莹光石)이 뿜어내는 은은한 빛이 사람들 표정을 어렴풋이 비췄다. 대부분 열일곱 살 전후로 보였으며 각각 자신의 문파 복장을 입고 있었다.
석목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모두가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석 사제, 이번엔 평소보다 늦었군요.”
“모습을 보아하니 이번 임무도 순조롭게 완수했나보죠?”
석목도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일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석 오라버니, 다쳤어요?”
맑고 듣기 좋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17살 정도 돼 보이는 녹색 옷을 입은 소녀가 일어났다.
눈빛은 마치 별처럼 반짝였고 코는 앙증맞고 귀여우면서도 어여뻤다. 피부는 희고 매끄러웠으며 몸매 역시 아름다웠다.
그녀는 석목의 오른팔을 유심히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석목의 팔엔 1척 정도 되는 상처가 있었는데, 피는 이미 굳었다 해도 상처의 크기가 커서 보기만 해도 아파보였다.
“작은 외상이라 큰 불편은 없습니다. 관심 가져줘서 고마워요, 가아 낭자.”
석목은 상처를 한번 내려다보곤 용모가 수려한 소녀를 향해 웃어주었다.
녹색 옷을 입은 가아라는 이름의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때, 가아의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청년이 갑자기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순간 모두가 입을 닫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