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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65화 (65/916)

65화. 가아

“석 사제, 임무는 완수했는가?”

현무종의 남색 복장을 입은 청년이 차갑고 거만하게 말했다.

미간을 잠시 찌푸린 석목은 품속에서 은이 둘러진 골패를 꺼내 파란 옷을 입은 청년에게 건넸다.

청년은 물건을 받아들고 몇 번 확인하더니 품에서 1척 정도 되는 크기의 흰색 옥쟁반을 꺼냈다. 곧 은색 막대기를 꺼내 옥쟁반을 찍었다.

웅~

옥쟁반이 위로 흰 빛을 발사했다. 그 빛은 2척 크기의 빛의 화면을 구성했고, 화면에는 임무가 한 줄씩 나타났다.

사람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빛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파란 옷 청년은 그중 야만족 순찰대 제거 임무를 은색 막대기로 찍었다.

순간 빛의 화면이 반짝이더니 흰 빛을 뿜었다. 흰 빛 사이로 곧 야만족 청년의 모습과 골패의 그림이 나타났다. 골패 위에 적힌 기괴한 글자까지 뚜렷하게 보였다. 석목이 건넨 골패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파란 옷 청년은 골패의 그림을 여러 번 대조해보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청년이 주문을 외며 은 막대기로 빛의 화면을 다시 한 번 찍자, 빛의 화면이 반짝이면서 제거 임무가 순식간에 다 사라졌다.

석목이 또 품에서 손바닥만 한 검은 영패를 꺼내 파란 옷 청년에게 건넸다. 영패의 한쪽 면에는 석목의 이름이, 다른 한쪽 면 가장자리에는 구름 모양의 부문이 새겨져 있었고, 가운데에 숫자 452가 은색으로 적혀 있었다.

이내 파란 옷 청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은색 막대기로 석목의 영패를 한 번 찍었다.

곧 은빛이 빛나며 석목의 영패에 적힌 숫자가 20 증가해 472로 변했다.

두 사람 사이로 검은 빛이 반짝였다.

푸른 옷 청년은 다시 영패를 석목에게 던졌고, 석목은 영패를 받아들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어느 방을 향해 걸어갔다.

야만족과의 전쟁이 시작되고 1년 사이 세 국가의 군대와 야만족 군대가 여러 차례 대규모 전면전을 펼쳤다. 7대 종문의 인족연맹 역시 야만족의 8부와 세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

세 차례의 전투로 양측의 지계 강자와 선천무인 모두 사상자가 발생했다.

지계의 경지에 오른 강자는 야만족보다 인족이 더 많았지만, 야만족 제일의 강자 망상은 인족의 지계 강자가 맞설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세 차례의 전투 후, 양측의 선천무인 이상의 고수가 더 이상 나서지 않자 후천경지의 수준을 가진 이들이 전투의 주력이 되었다.

인족은 야만족이 점령한 변경 3주에 후천무인을 대량 파견해 상대의 중요 거점을 끊임없이 습격하며 교란시키거나 야만족의 토템용사를 제거해 상대의 전력을 천천히 깎아냈다. 야만족 역시 이와 같은 수를 사용했다.

어느 순간 큰 격돌은 사라지고 날마다 작은 싸움만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7대 종문 연맹은 더 효과적으로 야만족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각 종문의 제자들을 동원했다. 각 종문의 고위층은 이제껏 없었던 합의를 이뤄 각 종문의 자원을 한데 모았고 연맹 임무와 공로 점수 제도를 만들었다.

연맹의 고위층은 각 종문의 제자를 선발해 부대를 만들고 각종 임무를 분배해 야만족과 맞서 싸우도록 했다.

연맹의 임무를 다 완수하면 공로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점수는 인족 연맹의 일부 대형 거점이나 각 종문에서 수련 자원으로 교환이 가능했다.

연맹 임무는 꽤 난이도가 있었다. 그중 석목처럼 전투의 최전선에 배치돼 야만족 진지에 깊게 침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위험한 임무에 속했다.

이건 석목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연맹은 야만족에 맞서기 위해 제자들에게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모든 제자는 최전선에서 최소 1년 이상 임무를 수행해야지만 다른 지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 갱도는 최전선에 위치한 비밀거점 중 하나였다. 현재 이곳에는 10명이 넘는 각 문파의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모두 후천 초, 중기 사이의 경지에 오른 소수정예의 사람들이었다. 주로 맡는 임무는 야만족 용사를 제거하거나 적지의 상황을 탐색하는 등 상당히 위험한 것들이었다.

파란 옷을 입은 청년의 이름은 백옥수로 현무종의 제자였다. 그는 후천 후기의 무인으로 이들 중에서 경지가 가장 높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들의 우두머리로 선발됐다.

하지만 백옥수와 석목은 서로를 좋지 않게 보고 있었다.

또 가아란 소녀는 묘음종의 목속성 술사학도로 거점에 있는 두 술사 중 한 명이었다. 가아는 매우 아름다워 거점의 남자제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가아와 석목은 같은 술사로서 공통된 화제가 상당히 많았다. 거기다 석목은 묘음종으로 간 종수를 늘 걱정하고 있어 가아와의 교류를 상당히 반겼고, 이 두 사람은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

“석 오라버니, 기다리세요. 제가 상처를 볼게요.”

그때, 가아가 허물없이 다가와 석목의 다친 팔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 모습을 본 백옥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석목은 거절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가아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상처는 조금 길었지만 깊지 않고 중독현상도 없었다. 이에 가아도 안심을 하며 하얗고 매끄러운 손가락을 상처에 갖다 댔다.

가아가 곧 붉은 입술을 움직이며 맑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순간 그녀의 손끝에서 흐릿한 녹색 빛이 반짝이더니 곧 상처를 완전히 덮었다.

석목은 상처에서 시원한 느낌과 동시에 참기 어려운 가려움을 느꼈다. 상처는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말끔히 다 치유되고 상처가 있었던 흔적만 남았다. 3, 4일 정도 지나면 이 흔적마저 완전히 다 사라질 것이었다.

“가 사매의 치유술은 정말 대단하군요. 감사합니다.”

석목은 팔을 흔들어보다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자 매우 기뻐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전의 임무에서 오라버니 부적 덕을 봤잖아요.”

가아가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항상 사형이라 부르면서 누구는 오라버니라 부르다니 너무 편애하는 것 아니오?”

뒤에 있던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그 말에 가아도 고개를 돌려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허나 이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워 뭇 사람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다 뒤흔들어놓았다. 곁에 있던 석목도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긴 마찬가지였다.

이 광경에 백옥수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가 사매, 나도 한 번 관 오라버니라고 불러 봐요.”

어느 뚱뚱한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가아는 그를 한번 바라본 뒤 전혀 상대도 않고 석목과 인사를 나누며 자신의 방으로 갔다.

그러자 흰 옷을 입은 키가 작은 한 여자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아와 함께 떠났다. 두 사람은 할 이야기가 더 남아있는 듯했다.

흰 옷을 입은 여자는 평소 말이 적어, 석목 역시 그녀가 천음종의 여제자고 평소 가아와 사이가 좋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석목도 곧 돌아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석목은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을 택했는데, 이곳이 제일 조용했기 때문에 선택한 방이었다.

* * *

석목은 방으로 돌아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며 문을 열었다. 밖엔 등에 검을 멘 청년이 있었다.

“석 사제, 방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으니 휴식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맞겠지만……, 이번에 받은 임무가 너무 어렵다네. 만일의 때를 대비해 금갑부가 하나 필요할 것 같아…….”

등에 검을 멘 청년이 계면쩍은 듯 말했다.

“어렵게 얘기할 필요 없어요. 재료를 주세요.”

석목이 청년을 방 안으로 들이며 말했다.

석목은 이 거점의 유일한 부적술사였기에 떨어진 부적을 보충하기 위해선 전부 석목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거점에서 석목의 지위는 매우 높았고 대부분의 사람이 그에게 예의를 차렸다. 전투에선 단 한 장의 부적이 생사를 결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수고스럽겠지만 부탁하겠네.”

등에 검을 멘 청년은 석목의 수락에 매우 기뻐했다. 이윽고 청년이 부적지 몇 장과 노란색 법묵, 토속성 영석을 품에서 꺼내 석목에게 건넸다.

물건들을 탁자에 올려놓고 부적지를 펼친 석목은 한손에는 영석을, 다른 한 손에는 법붓을 들고 막힘없이 부문을 써내려갔다.

부적지에 노란 부문이 점차 늘어나다가 반각도 채 되지 않아 금갑부 부적이 다 만들어졌다.

금갑부는 최근 석목이 가장 많이 제작한 부적이었다. 이제는 눈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성공률이 굉장히 높아졌다.

석목은 부적과 남은 법묵, 부적지, 영석을 청년에게 건넸다.

“석 사제의 부적제작 능력은 정말 대단하군. 우리 종문의 몇몇 부적술사들은 10번을 넘게 시도해도 부적제작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네.”

부적을 건네받은 청년이 기뻐하며 말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진 사형. 아무리 칭찬해도 비용은 깎아 주지 않을 겁니다. 부적 한 장에 공로점수 2점입니다,”

석목이 장난을 치며 영패(令牌)를 꺼내 탁자위에 올려두었다.

“그야 당연하지.”

청년이 자신의 영패를 꺼내 두 번 쓰다듬자 조그마한 빛이 두 개 솟아나와 석목의 영패 안으로 흡수됐다.

곧 청년이 감사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한데 그가 나가자마자, 이번엔 파란 옷을 입은 현무종의 제자가 찾아왔다.

“석 사제, 마침내 돌아왔군. 수고스럽겠지만 경신부 한 장만 부탁하겠네.”

석목은 문 너머로 2명이 더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 광경을 본 백옥수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는 곧 천천히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눈빛엔 잠시 음산한 기운이 스치듯 지나고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백옥수는 나무탁자를 손으로 치며 표독하게 말했다.

“흥, 이번엔 운이 좋았지만 다음번에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이런 곳에서 후천초기의 제자가 목숨을 잃는 것 정도는 굉장히 흔한 일이거든.”

* * *

반 시진 후, 석목은 마지막 부적까지 전부 제작해 건넸다. 어느덧 석목 영패의 공로점수는 20점이나 늘어나있었다.

이 시기를 참아내고 연맹의 본영으로 돌아가면 공로점수를 굉장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7대 종문의 자원이 한곳에 모여 있으니 이 공로점수로 평소 볼 수 없었던 희귀한 영석이나 강한 위력을 가진 법기, 진귀한 단약으로 교환할 수도 있었고, 공로점수만 충분하면 다른 종문의 무공서를 얻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석목은 곧 방문을 닫고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병에서 쉬골단을 꺼내 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목의 안색이 파래졌다, 하얘지기를 반복했다. 입은 옷도 무형의 기에 펄럭거렸다.

한참 후, 석목은 두 눈을 뜨고 매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석목은 1년 동안 종문의 명령을 받아 이리저리 떠돌며 싸우면서도 전혀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단약의 힘을 빌려 반야천상공을 4단계까지 수련해 후천중기의 경지까지 올랐고 5단계도 곧 얼마 앞두지 않고 있었다.

온신술 역시 탄월식의 도움으로 몇 달 전에 4단계에 올랐다. 하지만 4단계에 오른 이후로는 머릿속의 결정이 법력으로 전환되는 양이 크게 줄었다. 몇 달 동안 탄월식을 수련해 만든 쌀알 크기의 결정도 법력을 아주 조금만 증진시켜 줄뿐 전과 같은 비약적인 증가는 가져다주지 않았다.

온신술은 본래 후반부로 갈수록 단계가 오르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탄월식의 도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온신술을 5단계까지 수련하기 위해서는 2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내 석목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으며 자조했다.

입문한지 2년도 안 돼 현재의 경지에 오른 것만 해도 굉장히 빠른 성장을 한 것이었다.

탄월식이 준 도움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자신은 오히려 속도가 느리단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사람의 욕심이란 정말 끝도 없는듯했다.

석목은 반성을 하며 조급해진 마음을 안정시킨 후 두 눈을 감고 수련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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