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혈자임무(血字任务)
시간이 빠르게 흘러 순식간에 저녁이 되었다. 거점 사람들은 경계근무를 서는 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석목은 발소리를 죽이고 빠르게 거점을 나서, 입구의 절벽 근처에 위치한 거대한 나무 아래로 갔다.
밤은 굉장히 고요했으며 하늘에 걸려있는 달은 유난히 밝았다.
“석 사제, 또 나가는가?”
거대한 나무 근처에 있는 바위 뒤에서 보초를 서던 제자가 석목이 나오는 것을 보고 머리를 내밀어 인사했다.
석목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발소리를 죽여 조용히 숲으로 향했다.
석목이 달빛이 있는 날마다 항상 밖에서 밤을 보낸다는 사실은 이 거점에 있는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석목도 어느 비술을 수련하는 것이라 말했고, 다른 사람들도 딱히 의심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일부 심법은 밤에만 수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각 후, 석목은 거점에서 몇 리 떨어진 숲의 공터에 도착했다.
석목은 주위를 한번 살핀 뒤, 별다른 이상한 점이 없자 안심했다.
거점 사람들이 부적술사인 석목의 미움을 살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비밀을 캐내려 하진 않겠지만 만일을 위해 석목은 수련을 할 때마다 장소를 바꿨다.
이윽고 석목은 품에서 푸른색 부적 4장을 꺼내, 주위에 배치하고 주문을 외웠다. 곧 부적들이 잠시 빛나다가 잠잠해졌다.
석목은 이 광경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적 4장은 일반적인 부적이 아니었다. 이름은 사방통령부(四方通灵符)로 부적 4장을 동시에 사용하면 반경 100장 내의 모든 움직임을 탐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석목이 몇 달 전, 풍화문 제자에게 10만 냥의 은자와 화속성 하급 영석을 지불하고 교환한 것이었다.
이 부적 4장 덕분에 석목은 안심하고 탄월식을 수련할 수 있었다.
석목은 부적 4장을 바닥에 설치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탄월식의 자세를 취해 꿈속으로 들어갔다.
꿈속에서 석목은 어김없이 또 원숭이로 변해 고개를 들고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달빛이 석목의 두 눈으로 흡수되었다.
또 그렇게 하룻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고, 석목은 몸을 움찔거리며 꿈에서 깨어났다.
석목의 머릿속엔 콩알만 한 결정이 떠다니며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결정이 법력으로 전환되는 양이 줄어들자 석목은 더 이상 결정을 흡수하지 않고 결정의 크기를 계속 키워 나갔다.
석목은 숨을 길게 내뱉으며 일어나 거점을 향해 돌아갔다.
* * *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이른 아침의 숲속은 매우 아름다웠다.
석목은 기척을 숨긴 채 언덕을 넘었다.
주변으론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의 울창한 초목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구불구불 흐르고 있었다.
석목은 밤새 수련을 한 까닭에 마침 목이 말라 냇가로 가 물주머니에 시냇물을 가득 채웠다. 막 물을 마시려는데 앞쪽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석목은 물주머니를 챙기고 운철흑도 손잡이를 쥐고서 천천히 몸을 숨겼다. 이내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석목은 살짝 고개를 내밀어 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했다.
앞쪽 멀지 않은 곳에 아침햇살과 물안개에 덮인 한 아름다운 소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은 그녀의 몸 위로 폭포같이 흘러내려, 물속에 아득한 운무처럼 퍼져 있었다.
곧 소녀의 옥처럼 하얗고 매끄러운 팔이 물을 가르며 좌르륵 소리를 냈다.
물방울은 그녀의 어깨를 타고 흘러 수면 위로 떨어졌다.
떠오르는 태양에 비친 그녀의 피부는 정말 눈이 부시게 새하얬다.
석목은 순간 제자리에 굳은 채 가쁜 호흡만 내쉬었다.
때마침 소녀가 물속에서 옆쪽으로 살며시 돌아섰다. 곧 연하고 부드러운 두 봉우리와 함께 고운 얼굴이 드러났다. 가아였다.
석목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결국 그 바람에 마른 나뭇가지를 밟게됐다.
“누구냐!”
가아가 놀란 표정으로 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물속에서 푸른 덩굴이 뻗어 나와 석목을 덮쳤다.
석목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쪽으로 공중제비를 뛰었다.
푸른 넝쿨은 석목이 서있던 곳을 내려찍으며 바닥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석목은 매우 놀랐다. 평소 가아는 실력을 상당히 숨겼던 것 같았다.
곧 푸른 덩굴이 바닥에서 튕겨 오르더니 다시 뱀처럼 석목을 덮쳐왔다.
석목은 허리의 운철흑도를 뽑아 휘둘렀고, 이내 검영이 몇 개 생겨나 푸른 덩굴을 향해 쏟아져 나갔다.
붉은 검영이 덩굴을 조각냈지만, 잘린 덩굴은 죽지 않았다. 덩굴은 절단면에서 검은 즙을 뿜어내며 빠르게 새로 자라났다. 새로 자라난 덩굴은 검은색으로 어렴풋한 비린내를 풍겼다.
놀란 석목이 운철흑도를 몸 앞으로 누이며 다른 한 손으로 화염구 부적을 꺼냈다.
“아, 석 오라버니! 오라버니였군요…….”
어느새 물에서 나온 가아는 옷을 다 입고 있었다. 허나 검은 머리카락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 촉촉하게 젖은 채 몸 뒤로 흐트러져 있었다.
석목을 본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아의 외모는 본래 몹시 아름다웠지만, 막 씻고 나와 온몸에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마치 물위에 금방 핀 연꽃을 보고 있는듯했다.
눈앞의 가아는 매우 수려하고 청아한 모습이었다.
“가 사매, 훔쳐보려던 것이 아닙니다. 공교롭게도 이곳을 지나가다 소리를 듣고 적이 출몰했다고 생각했어요…….”
석목이 약간 겸연쩍게 말했다.
“최근 거점에서 몸을 숨기느라 목욕을 하지 못해서 해가 뜨기 전에 와서 몸을 씻고 있었어요.”
가아가 수줍은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빠르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손을 휘저으니 검은 넝쿨은 바닥을 뚫고 사라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순간 매우 어색해졌다.
“크흠……. 곧 날이 밝을 것 같으니 어서 돌아가도록 하죠.”
석목이 마른기침을 하고 운철흑도를 칼집에 넣으며 먼저 침묵을 깼다.
얼굴을 살짝 붉힌 가아는 조용히 머리를 정리한 후 석목을 따라 걸었다.
아름다운 숲속, 이른 아침의 따사로운 햇살이 앞뒤로 나란히 걷는 소녀, 소년의 몸에 흩뿌려졌다. 키와 덩치가 큰 소년과 작고 아름다운 소녀……, 마치 조그만 새가 사람을 쫓아가는 모습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 시간에 밖에 있다니 어제 밤에 또 수련을 했나요?”
가아가 빠르게 다가와 석목과 나란히 걸으며, 어여쁜 눈을 반짝였다.
“맞아요.”
가아의 물음에,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석 오라버니는 정말 대단해요. 무공 실력이 이렇게 뛰어난데 술법에도 재능이 있다니……. 묘음종의 젊은 제자들 중에서도 석 오라버니와 견줄만한 사람은 매우 적을 거예요.”
가아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과찬이에요. 사매의 목속성 술법도 대단하던데요? 방금 그 덩굴도 평범한 생물이 아니지요?”
석목이 물었다.
“평범한 술법일 뿐이에요. 어찌 석 오라버니와 비교하겠어요. 참, 부적이 얼마 남지 않아 오라버니에게 화염구 부적제작을 부탁하려는데 가능할까요?”
가아가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재료만 제공해준다면 문제없어요.”
석목이 두말없이 승낙했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분위기는 상당히 화기애애해졌고, 그렇게 부드러운 분위기와 함께 곧 절벽 근처 거점에 도착했다.
그때, 앞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가아는 깜짝 놀랐다가 백옥수라는 걸 확인하고 한숨을 돌렸다. 허나 석목은 오히려 더 미간을 찌푸렸다.
“너희…….”
백옥수는 두 사람을 보고 갑자기 파래진 안색으로 표독스런 눈빛을 보였다. 정확히는 석목을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석목은 곁의 가아를 한번보고, 제 몸을 보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어깨까지 드리운 가아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아직 마르지 않아 누가봐도 갓 목욕을 끝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밤새 밖에 앉아 있는 동안 이슬에 몸이 젖은 석목 역시도 방금 목욕을 한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의 모습은 오해를 사기 충분했다.
가아도 석목과 같은 생각을 했지만, 문득 석목이 목욕하는 자신의 몸을 봤다는 사실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백옥수는 가아의 부끄러워하는 이 모습에 더욱 질투가 샘솟았다.
“무슨 일이죠? 별일 없다면 가보겠습니다.”
석목이 차갑게 말하고 거점을 향해 걸어갔다.
석목은 지금 자신이 설명을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해명하려 하지 않았다.
이내 가아도 백옥수에게 살짝 허리를 숙이곤, 옆으로 돌아가 사뿐사뿐 석목의 뒤를 쫓았다.
백옥수는 거점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보며 두 눈을 표독하게 빛냈다.
* * *
석목은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얼굴엔 망설임이 가득했다.
석목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던 백옥수는 몇 달 동안 줄곧 딴죽을 걸었지만 석목이 부적술사라는 사실 때문에 선을 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백옥수를 더욱 경계할 필요가 있어보였다.
석목은 자신의 실력을 거점의 다른 사람들에게 절반 가까이나 숨기고 있었다. 허나 석목은 각종 부적과 비장의 수단을 매우 많이 지니고 있어 백옥수가 어떤 음모를 펼치더라도 스스로를 지킬 자신이 있었다.
만약 백옥수가 석목에게 악독한 수를 쓴다면 석목 역시 그를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석목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품에서 병을 하나 꺼냈다. 반투명한 병의 안쪽으로 들끓고 있는 검은 기체가 어렴풋하게 보였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대력마원탈태결을 수련하기 위해 필요한 마살지기였다.
석목은 이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이 대력마원탈태결을 수련할 수가 없었다.
석목은 반야천상공 4단계에 오른 후, 공로점수로 마살지기와 원숭이의 정혈을 교환해 대력마원탈태결 수련을 시도했었지만 체내의 진기가 너무 부족해 마살지기의 침투를 견딜 재간이 없었다.
아무래도 반야천상공이 5단계에 진입한 후에나 수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석목은 한숨을 쉬며 병을 다시 챙겨 넣고 반야천상공 수련에 몰두했다.
일반적으로 임무를 마친 후에는 며칠간 휴식을 취하는 것이 관례였다.
순식간에 이틀이 지나갔다.
석목은 낮에는 거점에서 반야천상공을, 저녁엔 밖에서 탄월식을 수련했다.
3일째 새벽, 어김없이 탄월식을 수련하고 거점에 돌아온 석목은 살짝 놀랐다. 거점의 전원이 탁자에 모여 숙연하게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석 사제! 기다렸네, 어서 앉게나.”
석목이 금갑부를 제작해줬던 그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석목을 반겼다.
“어째서 모두 모여 있는 거죠? 무슨 일이 발생했나요?”
석목이 천천히 물었다.
이때, 사람들 사이에 있던 가아가 석목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석목은 곧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백옥수가 그늘진 표정으로 목에 새파란 핏줄을 세웠다.
“모두 왔으니 바로 본론을 말하겠다. 모두 이것을 보도록.”
그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흰 쟁반을 꺼냈다. 쟁반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며 허공에 흰 화면이 생겨났다. 화면에는 피처럼 붉은 글씨로 적힌 임무가 있었다.
석목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맹에서 내려오는 임무는 일정한 기준에 따라 색이 분류됐다. 일반적인 임무는 흰색, 특수한 임무는 검은색, 특별히 중요한 임무는 빨간색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빨간색 글자를 보고 모두 크게 놀랐다.
“오늘 아침에 내려온 임무다. 산맥에서 5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야만족의 군량창고를 기습해 군량을 모조리 불태우라는 지시다.”
백옥수가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며 말했다.
“산맥 근처의 군량창고라면……, 설마 응수간(鹰愁涧) 근처의 그 군량창고 말입니까?”
풍화문의 제자가 놀라 물었다.
“맞다, 바로 그곳이지.”
백옥수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한 임무입니다. 그곳을 정찰해 본적이 있는데 지형도 험악하고 수백 명의 야만족과 수많은 토템용사가 지키는 곳이었습니다. 20명이 채 되지 않는 우리가 어찌 그들과 맞선단 말입니까?”
풍화문의 제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맹에서 하달한 임무는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수행할 수밖에 없다.”
백옥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모두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본래 연맹의 명령에 불복하는 제자는 엄벌에 처하게 된다. 정도가 가벼운 경우에는 힘을 봉인당한 채 유배돼 노역을 하게 되고, 무거운 경우에는 무공을 폐하고 잡역제자로 삼아 평생 종문을 나설 수 없게 했다.
“이 임무는 어려운 만큼 보상이 두둑하다. 공로에 따라 공로점수 800점을 공평하게 나눌 것이다.”
백옥수가 모두를 훑어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제야 사람들 표정도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