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응수간
곧 백옥수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산골짜기 지형도를 그리며 말했다.
“모두 반대 의견이 없다면 구체적인 계획을 의논하도록 하지. 이전에 응수간에 간 적이 있다. 그곳은 원래 산적들의 산채라 매우 은밀한 위치에 지어져 있다. 야만족의 침입 이후 산적들이 산채를 포기하고 도망가자 지금은 야만족이 차지해 군량을 저장하는 창고로 사용하고 있지. 그곳의 지형을 대강 그렸으니 모두 참고하도록.”
석목도 백옥수가 그린 지형도를 살펴보았다. 지형은 매우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고, 산골짜기 주위 지형들도 매우 명확하게 그려져 있었다.
호리병 모양의 산골짜기엔 성채로 추정되는 건축물이 그려져 있었는데, 전에 응수간을 봤다던 풍화문 제자도 그림에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
“정 사제의 말대로 응수간을 지키는 야만족이 매우 많고 실력이 강한데 비해 우리는 20명이 채 안되니 정면으로 맞서는 임무를 성공할 순 없다.”
백옥수가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해둔 묘책이 있나요?”
가아가 백옥수의 말을 듣고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하, 묘책까진 아니고. 병력을 둘로 나눠 한 부대가 산채를 공격하는 척하며 야만인의 주의를 끌면 다른 한 부대가 혼란을 틈타 군량을 불태우는 것이지.”
백옥수가 가아를 향해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모여 있던 이들은 무언가 생각에 빠졌다. 이 계책은 묘책이라 말할 순 없으나 확실히 나쁘지는 않았다. 뜻밖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면 임무를 성공할 가능성도 높아보였다.
잠시 시간이 흘러도 반대의견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이 모습에 백옥수가 드물게 웃음을 보였다.
“다른 의견이 없다면 부대 편성에 대해 의논하도록 하지.”
모두가 백옥수를 바라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침투조는 인원이 너무 많아서는 안 된다. 눈에 너무 띄어 기습에 실패할 확률이 높지. 생각을 해봤는데 나와 천음종(天阴宗)의 진경 사제, 풍화문의 적동 사제, 그리고 흑마문의 석목 사제, 이 넷이면 충분할 것 같더군.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교란조로 편성할 것이니 야만인의 주위를 끌도록.”
백옥수가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석목의 표정이 살짝 변했지만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방금 석목에게 말을 건넸던 청년과 키가 큰 검은 피부의 청년도 잠시 몸을 움찔했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은 속으로 한숨을 돌렸다. 침투조에 편성된다면 공로점수는 높게 받겠지만 일단 발각되면 죽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자리였다.
그들은 기뻐하는 동시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석목을 바라봤다.
“백 사형, 무공이 강한 다른 3명과는 달리 석 오라버니는 술사라 무공이 약합니다. 잠입조에 편성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가아가 말했다.
백옥수는 웃음을 지으며 가야를 바라봤다.
“가 사매, 내가 석 사제를 선택한 건 술사이기 때문이라네. 내게 화염계 중급 부적인 화운부(火云符)가 있어. 잠입에 성공해 이 부적을 사용하면 손쉽게 군량을 태울 수 있지. 이 부적은 술사의 정순한 법력으로만 발동되니 석 사제는 우리와 함께 가야만 하네.”
백옥수가 품에서 붉은색 부적을 꺼내며 말했다. 그 부적에 그려진 붉은색 부문은 강력한 법력의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적을 본 석목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중급 부적은 처음 봤지만 그 위력에 대해선 들은 적이 있었다. 저 부적이 있다면 거점의 군량을 태우는 건 백옥수의 말처럼 매우 간단할 것이었다.
가아가 아름다운 눈썹을 찡그리며 무언가 더 말하려 했다. 그 순간 석목이 가아를 향해 손을 젓곤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함께 가겠습니다.”
“역시 석 사제는 대의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군. 임무를 성공한다면 자네를 최고 공로자로 인정해 주겠네. 모든 것이 결정됐으니 돌아가 각자 준비를 하고 오후에 출발하도록 하지. 저녁에 응수간 근처에 미리 도착해 밤을 노려 작전을 실행할 것이다.”
백옥수가 석목을 바라보고 거짓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곧 모두가 흩어져 각자 준비를 시작했다.
* * *
석목은 제 방으로 돌아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방 안을 어슬렁거렸다.
백옥수가 자신을 침투조에 포함시킨 목적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허나 석목은 선천강자를 마주치지 않는 이상 목숨을 보전할 자신이 있었다. 거기에 백옥수 역시 석목보다 하수였으니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그곳엔 녹색 옷을 입은 미녀, 가아가 서 있었다.
“가 사매, 무슨 일인가요?”
석목이 그녀를 안으로 들이며 물었다.
“석 오라버니, 전부……, 전부 저 때문이에요. 저 때문에 오라버니와 백 사형의 관계가 나빠진 거예요. 이틀 전의 오해가 없었더라면 사형도 오라버니를 침입조에 들이지 않았을 거예요.”
방에 들어온 가아가 양심에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했다.
“하하, 자책할 필요 없어요. 현무종과 흑마문은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걸요? 사매와는 큰 상관없어요.”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응수간에 잠입하더라도 제 자신을 지킬 방법이 있어요. 사매야말로 교란작전을 하더라도 몸조심해요.”
가아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석목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석 사형이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어요. 그럼……. 회춘부에요. 가지고 있으면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예요.”
가아가 품에서 녹색 부적을 하나 꺼냈다. 부적에 그려진 푸른빛을 뿜는 부문은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석목은 감동했다. 회춘부는 목속성의 하급부적이지만 제작하긴 굉장히 어려웠으며 가격 또한 일반적인 하급부적보다 훨씬 비쌌다. 석목 마저도 제작에 도전해 성공한 적이 없었다.
짧은 시간에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 부적은 언제 어디서나 귀한 취급을 받았다. 하물며 지금과 같은 전란시기에는 더더욱 그랬다.
“이 귀한 물건을 제가 어떻게 받겠습니까. 사매가 가지고 있어요.”
석목이 즉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석 오라버니, 저는 여분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받으세요.”
가아가 아름답게 미소 지으며 회춘부를 억지로 석목의 손에 구겨 넣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공격용 부적을 몇 장 드릴 테니 몸을 지킬 때 사용하도록 해요.”
손 끝에 전해지는 가아의 온기에, 석목은 가슴까지 다 따뜻해졌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 석목은 품에서 화염부와 수검부(水剑符)를 몇 장 꺼내 가아에게 건넸다. 가아 역시 사양하지 않고 부적을 받은 후, 석목과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곤 자리를 떠났다.
* * *
거점의 어느 은밀한 곳.
백옥수와 현무종의 뚱뚱한 제자가 나란히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백 사형, 연맹에서 어째서 이런 임무를 갑자기 하달한 걸까요? 우리의 거점은 크지 않지만 후방부대의 눈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적에게 발각된다면 연맹에게도 큰 손실일 텐데요.”
뚱뚱한 제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하, 스스로 생각해 보게나.”
백옥수가 하하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연맹에서 무언가 큰 행동을 하려는 걸까요?”
뚱뚱한 제자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눈빛을 빛냈다.
“사실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 있다네. 연맹에게 받은 확실한 정보지. 야만족이 우리가 있는 이 구역을 샅샅이 뒤지기로 결정했다고 하더군. 이제 이 거점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즉각 철수를 해야 해, 이 임무는 철수하기 전 마지막 임무야.”
백옥수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안 그래도 최근 석목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굉장히 적절한 때 임무가 왔어…….”
백옥수가 윗입술을 핥으며 음험하게 말했다.
“하하, 정말 잘됐군요.”
뚱뚱한 남자가 하하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 * *
하늘이 어두워지고 달이 떠올랐다.
차가운 달빛은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고 한 산골짜기를 덮고 있었다.
산골짜기 깊숙한 곳엔 높고 낮은 목재 건축물들이 있었다.
이곳 진입로엔 원목 울타리와 관문이 설치돼있었다. 2장 높이의 울타리는 상당히 두꺼웠으며 끝이 화살처럼 뾰족하게 깎여있었다.
울타리의 양 측에는 성루가 하나씩 설치돼있었는데 그 위에는 야만인이 각각 한 명씩 보초를 서며 주위의 거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곳은 바로 응수간의 입구로 복주 내 야만족의 거점 중 한 곳이었다.
거점은 은밀함을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늦은 밤임에도 불빛이 거의 없었다. 허나 거대한 나무문 뒤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안쪽 상황은 밖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 평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주위 숲에선 10여명의 사람이 기척을 숨기고 응수간 입구로 다가가고 있었다. 곧 선두에 선 마르고 키 큰 자가 손을 가볍게 휘젓자 주위에 있던 이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마르고 키 큰 사람은 이내 등 뒤에서 어떤 물건을 꺼냈다. 그러자 순간 하늘의 달빛이 반사되며 반짝거렸다.
이 광경을 보고, 성루 위의 한 야만족 사내가 소리를 크게 지르려 했다.
휙!
그 순간 빠른 속도로 날아온 화살이 야만족 사내의 목을 정확히 관통했다.
야만족 사내는 동그랗게 뜨고 호흡을 하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목에선 더 기괴한 소리만 났다. 이윽고 뒤로 쓰러진 그는 성루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피를 비처럼 흩뿌렸다.
반대쪽 성루에 있던 야만족 사내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크게 놀랐다.
바로 그 순간 어둠속에서 화살이 하나 더 날아왔다. 야만족 사내는 곧 심장에 화살이 꿰뚫려 나무기둥에 박혔다.
“악…….”
처량한 비명이 밤하늘에 널리 울려 퍼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자색 옷을 입은 한 덩치가 우람한 청년이 숲에서 나와 나무문 앞에 다가갔다.
그가 사람의 키보다 더 큰 장도를 꺼내 휘둘렀다.
장도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반월모양으로 푸른빛을 뿌리며 나무문을 벴다. 거대한 나무문은 일도에 둘로 갈라져 큰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때마침 나무문 근처에 순찰을 돌던 18명가량의 야만족 부대는 연달아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야만족 부대는 곧 나무문 사이로 침입한 적을 확인하고 무기를 뽑아들며 고함과 함께 달려들었다.
자색 옷을 입은 남자는 손에 쥔 장도를 휘두르며 정면으로 맞섰다.
무기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렸고, 장도의 푸른 검광이 난무했다.
곧 야만족 병사 서너 명의 목이 떨어지며 땅에 피를 흩뿌렸다.
“죽여라!”
숲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와 입구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동시에 숲의 안쪽에선 화살이 연달아 쏘아졌다. 화살들은 어느 하나도 빗나가지 않고 야만인의 목숨을 하나씩 끊어 놓았다.
순찰을 돌던 이들은 전부 일반 야만인들이라, 인족 무인들에 의해 순식간에 몰살을 당했다. 하지만 그 즉시 입구에서 가까이 있던 건축물에서 더 많은 야만인이 쏟아져 나와 전투에 가세했다.
바로 그때, 멀리 있는 숲 깊숙한 곳에서 수십 개가 넘는 불빛이 일렁거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 같아 보였다.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야만인들은 이 광경에 크게 놀랐다.
“인족이 대규모 침투를 했다!”
한 부대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야만인이 크게 소리를 지른 뒤, 품에서 검은 뿔 나팔을 꺼내 힘껏 불었다.
뿌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