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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68화 (68/916)

68화. 선천고수와의 조우

우렁찬 나팔소리가 울리자 거점의 야만인들이 신속히 잠에서 깨어나 횃불을 밝히고 정문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뭐라고? 인족 병사들이 들이닥쳤다니! 전황이 어떻지?”

거점 깊은 곳에 위치한 어느 큰 건축물의 내부에서 철탑같이 거대한 야만족 사내가 눈앞의 연락병을 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의실 같아 보이는 이곳 벽엔 기괴한 괴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박제된 괴수의 머리도 걸려있었다. 또 중앙 바닥엔 커다란 괴수 가죽이 깔려있었다.

거대한 사내의 뒤에는 건장한 청년 야만인이 서있었다. 상반신을 벗고 있는 그의 가슴엔 남색 늑대 문신이 새겨져 있었는데, 차갑고 과묵한 인상의 그는 마치 조각상 같아 보이기도 했다.

“침입자 10여명을 입구에서 막고 있습니다. 그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고강하며 숲의 안쪽에도 증원군 100여명이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연락병이 한쪽 무릎을 꿇고서 빠르게 말했다. 온몸엔 그의 것으론 보이지 않는 새빨간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침입한 인족 중엔 상당수 후천무인이 있나 보군. 허나 어찌 그리 많은 인족이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거대한 사내가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때, 연달아 폭발소리가 들려왔다.

야만족 사내는 매우 놀라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몇 리 떨어진 입구 방향에선 불꽃이 활활 타오르며 짙은 연기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런! 치사한 인족놈들이 이곳의 군량을 태워버리려 하는구나. 도마골, 즉시 토템용사를 이끌고 입구로 가라. 모든 병력을 동원해 인족의 침입을 막아내야 한다!”

크게 놀란 거대한 야만인이 돌아서 젊은 토템용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예!”

답을 한 젊은 토템용사가 빠르게 회의실을 나서 먼 곳으로 몸을 날렸다.

거대한 야만인은 손을 휘둘러 바닥에 무릎을 꿇은 연락병을 물렸다. 그리고도 가만히 서서 잠시 망설이던 야만인은 뒤돌아 건물 깊숙이 들어갔다.

* * *

산골짜기 측면에 위치한 산봉우리엔 석목과 백옥수를 비롯한 총 네 사람이 나란하게 서있었다.

“보아하니 성공적으로 적들을 꾀어낸 것 같군요. 대부분의 야만족이 모두 입구로 향했어요.”

등에 검을 멘 청년이 말했다

현재 응수간 입구의 전투는 더 없이 과열되어 있었다. 화염과 짙은 연기가 자욱했으며 서로 죽고 죽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인족은 10여명뿐이라 수적으로 굉장한 열세에 처해 있었지만 전원이 후천무인이었다. 실력이 일반 야만족 병사보다 훨씬 강해, 한 명이 족히 10명 이상을 상대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더 시간을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니 우리도 행동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긴 시간은 버틸 수 없을 것입니다.”

검은 피부의 청년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 청년의 시선을 따라가자 아래 10여명의 야만족이 입구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토템용사였다.

“가자!”

백옥수가 나무에 묶인 밧줄을 강하게 쥐고 먼저 아래로 뛰어 내렸다.

다른 세 사람도 마찬가지로 손에 밧줄을 쥐고 뛰어내렸다.

잠시 후, 조용히 착지한 네 사람은 어느 건물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백옥수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손을 흔든 뒤 몸을 날렸다. 그러자 나머지도 그를 따랐다.

사전에 조사한 바로는 거점 대부분의 군량은 성채의 내성에 보관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야만족은 다 입구로 향했지만 안에도 야만족은 남아 있었다.

네 사람이 잠입하는 길에도 망을 보는 야만족이 몇 명 있었다. 허나 실력이 뛰어난 그들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야만인들은 심지어 이들을 발각도 하지 못하고 원인도 모른 채로 그 자리에 즉사했다.

침투조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순조롭게 성채의 내성에 진입했다.

“군량이 정말 많구나…….”

내성에 진입한 네 사람 모두 깜짝 놀랐다.

내성에는 수십 동의 원형 건축물이 지어져 있고 거의 모든 건축물 안에 군량과 공성무기, 병기, 갑옷 등이 가득 차 있었다. 뿐만 아니라 건물 밖의 공터에 설치된 10여개의 대형 천막 안쪽에도 군량이 쌓여있었다.

“이렇게 많은 군량이라면 수만 명의 대군에게도 족히 공급할 수 있겠군요. 복주의 군수물자가 전부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는데요?”

등에 검을 멘 청년이 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네 사람은 한 건물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석목은 주위를 한번 훑어보곤 어렴풋이 무언가 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가장 중요한 군량고임에도 불구하고 수비가 너무 느슨했다. 순찰을 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어쩌면 입구의 난동 때문에 이곳 사람들까지 모두 입구로 향한 것일 수도 있었다.

“지금 바로 시작하지요. 이 군량들을 전부 태워 돌아간다면 큰 공을 인정 받을 겁니다.”

검은 피부의 남자가 기뻐하며 말했다.

“하하, 임무가 이토록 쉬울 줄은 상상도 못했군요. 돌아가면 공로점수로 좋은 검을 얻을 수 있겠어요.”

등에 검을 멘 청년의 눈에도 흥분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좋다.”

백옥수가 주위를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주위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그럼 계획대로 석 사제가 잠입해 이 화운부를 발동하는 동안 우리 셋은 주위에서 망을 보도록 하겠다. 반드시 이곳의 군량을 모두 불태워야 한다.”

백옥수가 품에서 화운부를 꺼내 석목에게 건넸다.

손을 뻗어 부적을 받으려던 석목은 순간 놀란 표정으로 뒤로 도약했다.

휙!

석목의 몸 앞으로 누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며 백옥수의 손에서 화운부를 낚아채고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백옥수도 비명을 지르며 뒤로 도약했다. 그의 오른손엔 선혈이 낭자했고, 두 손가락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크게 놀란 석목이 운철흑도를 뽑았다.

다른 두 청년 역시 긴장한 모습으로 이미 무기를 뽑아 들고 있었다.

“누구냐!”

백옥수가 고통을 참으며 전방을 향해 소리쳤다.

“흥, 정말 쓸모없는 놈들이군! 오백의 정예병사와 20명의 토템용사가 지키고 있는데도 생쥐 네 마리가 숨어들었구나.”

어둠속에서 냉담한 목소리와 함께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냉혹한 인상의 그는 수염이 없는 하얀 얼굴에 다른 야만인들만큼 키가 그리 크진 않았다. 그래도 그의 키 역시 9척은 넘었다. 또 그가 입고 있는 까마귀 깃털 옷은 달빛에 반사돼 빛나고 있었다.

그는 이국적인 노란색 머리를 제외하곤 전체적인 외형이 커다란 인족 남자와 차이점이 거의 없었다.

까마귀 털옷을 입은 남자의 옆에는 철탑과 같이 거대한 야만족 사내가 위축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야만족 사내는 자신의 어깨 까지도 오지 않는 이 남자에게 굉장한 공포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쉬이익!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몸 뒤로 그릇만한 크기의 뱀 머리가 보였다. 몇 장은 족히 돼 보이는 검은색 무늬의 뱀이 남자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뱀의 두 눈은 얼음같이 차가웠고 입에는 부적을 한 장 물고 있었다. 핏자국이 묻어있는 그 부적은 백옥수의 화운부였다.

더불어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무거운 위압감은 석목의 일행을 짓눌러 호흡을 하는 것조차도 힘겹게 만들었다.

“선천고수!”

석목이 크게 놀랐다.

다른 세 사람도 그의 경지를 가늠하고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화운부라……, 중급 부적까지 내주다니 너희 인족 늙은이들은 정말 돈을 아낌없이 쓰는구나.”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감탄하며 말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적홍색 화염구가 나타나 화운부를 향해 유성처럼 날아가며 뜨거운 열기를 세차게 뿜었다.

일행은 화염구를 날리는 석목을 보고 크게 놀랐다.

석목의 손엔 어느새 네다섯 장의 붉은색 부적이 들려있었다. 이번엔 석목의 손이 번쩍이더니 네다섯 개의 화염이 나타나 사방의 건물로 날아갔다.

화염구를 쏜 석목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바닥을 박차고 도주했다.

석목의 행동은 매우 신속했다. 다른 일행은 차마 반응하기도 전에 석목은 이미 몇 장 이상을 달아난 상태였다.

남자는 콧방귀를 뀌며 부적을 몸 뒤로 숨긴 뒤, 몸에서 짙은 남색 빛을 뿜어내며 주먹을 내질렀다.

화운부는 극히 적은 화속성 영력과 접촉만 하더라도 발동될 수 있었다. 아무리 선천무인이라 하더라도 근거리에서 중급부적의 폭발에 휘말린다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콰르릉!

짙은 남색의 권풍과 충돌한 화염구는 산산조각이 나 허공에 흩어졌다.

바로 그 틈에 다른 세 사람도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려 도주했다.

남자가 눈을 번뜩이며 그들을 즉시 뒤쫓으려 했다.

콰르릉!

석목이 달아나기 전에 쏜 화염구가 주위의 건축물로 떨어졌다. 법력을 내포한 화염의 온도는 극도로 높아 순식간에 몇몇 건물에 불이 붙었다.

건물 안에 보관하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쉽게 타는 물건들이라 즉시 진압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불이 퍼질 위기였다.

남자가 낯빛을 흐리며 두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네다섯 개의 거대한 남색 손바닥이 나타나 막 불이 붙은 건물을 향해 날아갔다.

남자가 수련한 심법은 차가운 속성이었기 때문에 화염에 특히 강했다. 거대한 남색 손바닥은 어느새 안개로 변하더니 주위의 온도를 극도로 낮춰 화염을 절반 이상 진화했다.

그의 몸에 휘감겨 있던 검은색 뱀은 남자가 손을 뻗는 순간 날아가 불을 꼬리로 쓸어서 껐다.

“사람을 모아 불을 꺼라. 저놈들은 내가 맡겠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얼굴이 파랗게 질린 거대한 야만인에게 지시한 후 석목 일행이 도망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검은색 뱀은 몸을 비틀며 마치 검은색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남자를 쫓아가는 뱀의 속도는 남자에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입구를 향해 질주해가는 석목의 몸은 경신부를 사용한 덕에 은은한 푸른빛에 덮여있었다. 경신부의 도움으로 움직임이 더욱 빨라진 그는 건물 사이로 질주하는 모습이 마치 늘어진 검은색 선으로 보일 정도였다.

다른 일행은 10여장 뒤쳐진 곳에서 달려오고 있었는데, 속도는 석목보다 훨씬 느려서 시간이 지날수록 간격이 점차 벌어져갔다.

하지만 석목은 전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뒤에서 자신들을 빠르게 쫓고 있는 살기가 너무도 뚜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석목은 후회했다. 만약 화염구 부적을 더 준비했더라면 그 남자의 추격을 더 늦출 수 있었을 것이었다.

야만인들은 도망치는 이들을 발견하고 저지를 시도했으나 이들의 그림자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휙!

석목이 내성을 뛰어넘고 바닥에 착지했다.

그런 뒤 그는 왼쪽 방향을 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이곳은 그들이 뛰어내린 절벽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왼쪽으로 가면 밧줄이 남아있을 테니 위로 오른다면 골짜기 밖으로 쉽게 도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나 석목은 왼쪽 절벽이 아닌 교란조가 있는 입구를 향해 달렸다.

다른 세 사람 역시 내성을 뛰어넘어왔다.

검을 등에 멘 청년과 피부가 까만 청년은 별다른 고민 없이 즉시 절벽을 향해 달려갔다. 백옥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두 사람과 같이 절벽의 밧줄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잠시 후, 바람 소리와 함께 검은 옷을 입은 남자도 그곳에 도착했다.

“이런, 둘로 나뉘었군…….”

남자가 입구와 절벽 방향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가라, 저쪽의 사람은 네 저녁밥으로 주마.”

남자가 한 손가락으로 입구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휙!

남자를 바짝 쫓아오던 검은 뱀은 골짜기 입구 방향으로 향했다.

남자가 차갑게 웃었다. 이 뱀은 남자가 야만족의 오래된 비술을 사용해 키운 뱀이었다.

후각이 극도로 예민하고 강한 힘을 가진 남자는 선천무인과 비교되진 않았지만 후천후기의 무인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감히 자신을 희롱한 네 사람을 하나도 놓치지 않을 요량이었다.

남자는 세 사람을 쫓아 절벽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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