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69화 (69/916)

69화. 흑사(黑蛇)

응수간 입구.

야만족 토템용사가 가세하자 전황이 즉시 뒤집혔다.

교란조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후퇴했고 야만족 병사는 이들을 즉시 포위했다. 분분히 흩어진 교란조에서도 사상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주위의 숲속, 옥석장을 들고 주문을 외우는 가아의 주위엔 수십 개의 덩굴이 솟아올라 있었다. 덩굴들은 횃불을 들고 끊임없이 흔들며 입구 방향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가아는 한 번에 많은 덩굴을 소환해 법력의 소모가 매우 큰 듯 안색이 약간 창백해져 있었다. 코끝에도 작은 땀방울들이 맺혀있었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가아 곁으로 다가왔다. 천음종의 다른 여제자였다.

“시간이 없어요. 어서 철수해요!”

천음종의 여제자가 말했다.

놀란 가아는 응수간 성채 방향을 바라보며 주저했다.

그곳에선 어렴풋하게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잠깐 사이에 또 사라졌다.

“야만인이 점점 몰려들고 있어요. 지금 가지 않는다면 늦어요.”

여제자가 재촉했다.

가아는 곧 고개를 끄덕인 뒤 석장을 휘둘렀다.

흔들거리던 수십 개의 덩굴은 빠르게 바닥 속으로 사라졌다.

순간 종이같이 창백한 얼굴의 가아가 몸을 비틀거렸다. 천음종의 제자는 재빨리 가아를 부축하고 입구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입구 근처엔 일고여덟 명의 인족 제자가 사방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제자는 야만족 토템용사와 병사에 포위돼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숲속의 적이 눈속임이라는 것을 눈치 챈 토템용사들은 잔뜩 성이나 포효하며 그들을 쫓았다. 그 광경을 본 야만족 병사들도 무기를 휘두르며 도망치는 이들을 추격하려했다.

그때, 통솔자로 보이는 한 중년 야만인이 크게 소리쳤다.

“적들은 이미 궤멸되었다. 남은 일은 토템용사들이 처리할 테니 나머지는 퇴각해 손실을 집계하라!”

야만족 통솔자가 상황을 보다가 부대를 퇴각시켰다.

그 순간, 괴수의 가죽을 걸친 젊은 야만인이 혼란스러운 무리 사이를 역행하며 주위의 숲으로 향했다.

“멈춰라! 어느 부대 소속이지? 명령을 듣지 못한 것이냐!”

야만족 통솔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젊은 야만인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듯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인족이구나!”

놀란 야만족 통솔자가 소리치며 허리춤에 있는 장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때 젊은 야만인복장의 사내가 팔을 휘둘렀고, 순간 검은 빛이 나타나 야만족 통솔자의 목을 꿰뚫었다. 장도를 뽑으려던 야만족 통솔자는 그대로 쓰러졌다.

젊은 야만인복장의 사내는 갑자기 속도를 높여 야만족 무리를 뚫고 숲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주위 야만족들은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허나 숲에 도착했을 땐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고,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질 않았다.

머쓱해진 야만족들은 그 자리에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그때, 한 기다란 그림자가 그들을 지나쳐 순식간에 숲속으로 들어갔다.

야만인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숲을 바라봤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 젊은 야만인은 바로 변장을 한 석목이었다.

키가 크고 몸집도 좋은 구릿빛 피부의 석목이 괴수의 가죽을 걸치자 야만인과 모습이 상당히 닮아보였다.

그는 그렇게 골짜기를 탈출해 숲에서 10리 이상을 내달린 후에야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 * *

석목은 숨을 길게 내뱉으며 돌아서 산골짜기 방향을 바라봤다. 얼굴엔 아직도 두려운 빛이 남아있었다.

석목은 이런 곳에서 선천고수를 만날 줄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석목은 선천무인의 두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선천무인은 지금의 그가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던 석목은 곧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석목이 다시 발을 내딛으려고 하는 그 순간, 갑자기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피비린내를 몰고 그의 목을 덮쳐왔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와 함께 있던 검은 뱀이었다.

놀란 석목이 몸을 숙이고 옆으로 피하며 동시에 주먹을 날렸다.

퍽!

석목의 주먹이 검은 뱀의 아래턱에 명중했다.

허나 검은 뱀은 석목의 일격을 맞고서도 잠시 몸만 비틀었을 뿐, 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석목을 덮쳤다.

석목은 깜짝 놀랐다.

방금 일격으로 얻은 건 뱀의 비늘이 굉장히 두껍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대원만의 경지에 오른 쇄석권도 저 뱀에겐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석목은 바닥을 박차고 뒤로 물러나 다시 뱀의 공격을 피했다. 그의 몸엔 아직 경신부의 효과가 남아있어 검은 뱀과 속도가 엇비슷했다.

이미 2번의 공격을 다 실패한 검은 뱀은 잠시 공격을 멈추고, 얇고 긴 눈을 흉흉히 치켜뜨며 혀를 날름거렸다.

석목은 무거운 표정으로 운철흑도를 뽑아들고 검은 뱀과 시선을 마주쳤다.

석목은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굉장히 초조했다. 그는 계속 산골짜기 방향을 곁눈질 하고 있었다.

‘설마 그 남자도 추격해온 것인가?’

석목의 걱정과는 다르게 산골짜기의 방향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이 뱀은 단신으로 석목을 추격해 온 듯했다.

석목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아무래도 남자는 백옥수 일행을 따라간 것 같았다.

석목이 생각을 하던 중, 검은 뱀이 인내심을 잃고 다시 석목을 덮쳤다. 속도는 전의 공격들 보다 더욱 빨랐다.

뱀은 석목을 향해 날아오며 머리를 흔들어 실체와 구분하기 어려운 잔상을 만들어 냈다.

석목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두 눈을 금빛으로 반짝이며 여러 잔상 중 하나를 횡으로 베었다.

퍽!

몇 장 뒤로 날아간 뱀은 한참을 구른 뒤 겨우 고개를 들었다.

뱀은 운철흑도에 목이 베여 비늘이 깨졌고, 상처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뱀은 잠시 혼미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골이 흔들려 의식이 약간 흐릿해진듯했다.

석목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운철흑도의 날카로움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전력으로 베었는데도 고작 비늘밖에 상처 입히지 못하다니, 도대체 저 뱀의 몸이 얼마나 단단한지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

석목은 크게 놀랐지만 움직임을 멈추지는 않았다. 석목은 검은 뱀의 의식이 몽롱한 기회를 틈타 빠르게 달려들었다.

순간 운철흑도에 새겨진 부문이 붉게 빛나며 도신이 화염에 휩싸였다. 석목이 팔을 휘두르자 곧 13개의 붉은 검영이 검은 뱀을 향해 휘몰아쳤다.

뱀은 정신을 차리고 얼른 피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뱀은 얼른 몸을 뒤로 돌리며 거대한 꼬리를 휘둘러 붉은 검영을 맞받아쳤다.

퍽!

다시 한 번 석목의 공격을 맞고 날아간 뱀이 몇 장 밖에 있던 커다란 나무와 강하게 충돌했다.

뱀의 꼬리에 화상을 입은 검은 상처가 났다. 비늘도 여러 곳이 깨졌다.

뜨거운 통증이 뱀의 흉악한 본성을 자극했는지, 뱀은 더욱 혀를 날름거니며 쉬이익 소리를 냈다.

나무줄기에 몸을 감은 뱀은 다시 한 번 석목을 덮치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나무 옆의 지면에서 녹색 빛이 반짝이더니 두꺼운 덩굴들이 솟아나와 나무와 함께 검은 뱀을 휘감았다.

뱀은 당황한 기색으로 온 힘을 다해 벗어나려했다. 결국 상당수의 덩굴이 곧바로 끊어졌다. 남은 덩굴도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았다.

“오라버니, 공격하세요!”

숲속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아의 목소리였다.

이내 석목의 신영이 순식간에 쏘아져나가, 눈 깜짝할 사이 뱀의 앞까지 도달했다. 곧이어 석목이 팔을 흔들자 불타오르는 도신이 흔들리더니 다시 13개의 붉은 검광을 흩뿌렸다.

“핫!”

석목의 기합소리와 함께 13개의 검광이 하나로 합쳐졌다. 하나의 두꺼운 적색 검영으로 변한 검광은 그 길로 뱀의 급소를 벴다.

촤악!

뱀을 휘감은 커다란 나무가 절단돼 쓰러졌다. 절단된 부분은 검게 타있었고, 검은 뱀의 몸통도 양단돼 바닥으로 떨어졌다. 뱀은 둘로 절단된 몸을 격렬하게 비틀다가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다.

석목이 비로소 숨을 길게 내뱉었다. 뱀의 몸은 더 없이 단단하고 빨랐다. 운철흑도에 새겨진 열염술법진과 가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었다.

팍!

그때, 운철흑도에 꽂혀있던 화속성 영석이 부서졌다.

석목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한껏 위력을 끌어올린 방금 전 참격으로 결국 영석의 영력이 전부 소진된 것이었다.

더 이상 화속성의 영석을 소지하고 있지 않던 석목은 영석이 힘을 다하기 전에 강적을 살해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석목은 운철흑도를 칼집에 넣고 숲의 한쪽을 바라봤다.

가녀린 여인 2명이 나란히 걸어 나왔다. 가아와 천음종 다른 여제자였다.

“가아 사매, 도움 고마워요.”

석목은 가아를 향해 감사인사를 하고 천음종의 여제자를 향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전했다.

“석 오라버니, 무사히 돌아올 줄 알았어요. 참, 거점의 군량은 어찌됐죠?”

창백한 얼굴의 가아가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말도 마세요. 거점에 야만족의 선천고수가 지키고 있었어요. 임무는 신경 쓸 틈도 없이 바로 도주했어요.”

“선천고수!”

가아와 천음종의 여제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맹의 정보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이 검은 뱀 역시 그 사람이 사육한 것입니다.”

석목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다른 세 명은……, 설마 이미?”

가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 사람이 방심한 틈을 노려 둘로 나뉘어 도주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도주에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환할 가능성이 크지는 않은 것 같아요.”

석목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가아의 표정이 순간 암담해졌다.

“이 뱀이 정말 그 사람의 것이라면 즉시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요!”

한쪽에 있던 천음종 여제자가 급하게 말했다.

“기 낭자, 무슨 일이죠?”

가아가 놀라 물었다.

석목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기 낭자를 바라봤다.

“집안의 어르신들께 야만족이 요수를 사육하는 방법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어요. 요수와 주인 간에는 어느 특수한 연결이 존재해서 요수가 사망한다면 주인은 100리 밖에서도 즉시 위치를 알 수 있다고 했어요.”

기 낭자가 말했다.

“그럼 어서 이곳을 벗어나죠!”

가아의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막 세 사람이 몸을 움직이려던 그 순간, 세 사람의 뒤쪽에서 얼음같이 차가운 살기가 폭발적으로 휘몰아쳤다.

석목은 번개같이 빠르게 몸을 돌리며 운철흑도를 뽑아 들었다.

다른 두 사람 역시 석장과 세검을 들어 올리며 경계태세를 취했다.

검은 옷을 입은 야만인이 세 사람 앞에 나타났다. 그는 손에 파란색 물건을 들고 있었다. 석목은 그것을 자세히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들고 있는 건 파랗게 얼어붙은 백옥수의 머리였다. 그의 얼굴엔 죽음에 직면한 자의 두려운 표정이 역력하게 남아있었다. 동그랗게 뜨고 있는 두 눈엔 초점이 없었다.

두 여인 역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남자는 절단된 뱀을 보고 속이 쓰리단 얼굴로 다섯 손가락에 힘을 줬다.

펑!

백옥수의 머리가 뒤덮인 얼음과 함께 가루가 되어 바닥에 흩뿌려졌다.

“내가 직접 사육한 아이를 죽이다니, 너를 함께 묻어주겠다!”

남자가 석목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석목은 마치 독사에게 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진저리를 쳤다.

석목이 천상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며 두 여인에게 말했다.

“어서 분산해서 도주하세요! 한 명은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기 낭자가 머뭇거리는 가아를 잡아채고 뒤로 달아났다.

“아직도 도망이란 헛된 꿈을 꾸는구나. 너희는 오늘 모두 죽을 것이다.”

차갑게 웃는 남자의 몸에서 짙은 남색 빛이 피어올랐다. 남자가 손을 뻗자 선천진기가 모여 1장 크기의 거대한 손바닥으로 변해 세 사람에게 날아왔다.

그의 공격이 도착하기도 전, 세 사람 주위 공기가 끈적끈적하게 변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기운이 세 사람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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