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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72화 (72/916)

72화. 열염전(烈炎箭)

한 달 후, 복주의 어느 숲.

석목은 운철흑도를 쥐고 자신과 비슷한 덩치의 야만인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야만인은 덩치는 왜소했지만 가슴에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푸른 늑대 문신을 새긴 토템용사였다.

석목의 뒤로 키가 1장을 넘는 금귀거리를 찬 토템용사가 한 명 더 있었는데, 석목을 앞뒤로 포위한 이들은 협공을 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반나절 전, 석목은 복주에 위치한 야만족 병영에 잠입해 조사임무를 수행했다.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으나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나타난 두 토템용사에게 포위됐다.

이곳은 상대의 병영과 굉장히 가까워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위험했다.

석목은 눈을 매섭게 빛내다가 눈 깜짝할 사이 왜소한 야만인의 바로 앞에 나타나 운철흑도를 휘둘렀다.

“핫!”

운철흑도가 떨리다 일순간 13개의 검광으로 나뉘어 강하게 몰아쳤다.

곧 왜소한 야만인의 가슴에서도 푸른빛이 반짝이더니 그의 두 팔이 털이 무성한 늑대의 발로 변했다. 날카로운 발톱에는 푸른색 기가 맴돌고 있었다.

야만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두 늑대 발을 종횡으로 교차해 검은색 검광을 받아쳤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검은색 검광이 흩어졌다.

왜소한 야만인은 늑대 발을 다시 한 번 빠르게 휘둘렀다.

바로 그때, 석목은 등 뒤로 다가오는 무거운 권풍을 느꼈다.

하지만 석목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돌진하며 푸른빛이 감도는 발톱을 베었다. 체내의 법력이 주입된 운철흑도는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쾅!

붉은 빛이 폭발하며 작렬하는 기의 파도가 몰아쳤다.

왜소한 야만인은 몰아치는 뜨거운 기의 파도에 휩쓸려 뒤로 날아갔다. 더불어 석목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흰색 빛줄기가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 날아오는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폭술을 펼친 석목은 즉시 고개를 돌려 새하얗게 빛나는 주먹으로 지척까지 다가온 검은색 소의 발굽을 가격했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석목은 무거운 야생소에게 들이 받친 것처럼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뒷걸음질을 쳤다. 뒤에서 석목을 습격한 야만인 역시도 석목의 거대한 힘에 뒤로 밀려났다.

쾅!

날아오는 기폭술을 막아내려던 왜소한 야만인의 두 팔이 터져 조각났고, 야만인은 자신의 피와 살로 범벅이 된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때, 석목이 빠르게 그의 앞으로 가 운철흑도로 그의 머리를 잘라 버렸다.

그 사이 석목의 뒤에서 빠르게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귀걸이를 찬 야만인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숲을 향해 냅다 도망치고 있었다.

석목은 차갑게 웃었다. 빨갛게 불타오르는 운철흑도는 어느새 석목의 손을 떠나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석목과 거리를 상당히 벌린 야만인은 막 마음을 놓으려던 때 뒤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허나 그가 소리에 반응하기도 전, 적색 검 끝이 그의 가슴을 뚫고 나왔다.

화르륵!

뜨거운 화염이 그의 가슴에서 용솟음치다 눈 깜짝할 새 전신을 불태웠다.

석목은 운철흑도를 집어 들고 빼곡한 숲속으로 민첩하게 자취를 감췄다.

* * *

몇 개월 후, 예주. 전쟁으로 파괴된 어느 마을.

석목은 한 황폐한 집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가슴이 살짝 들썩거리는 것을 보니 아마도 체력을 회복하는 중인 것 같았다. 그의 옆에는 또 자강궁이 놓여 있었다.

갑자기 먼 곳에서 어렴풋이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은 눈을 뜨고 튕겨지듯 일어나 자강궁을 챙겨 동쪽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석목은 반 정도 불타오른 건물 옥상에 나타나 소리가 들려오는 먼 곳을 바라봤다.

수백 장 떨어진 곳에서 야만족 병사 200여명과 이와 비슷한 규모의 인족 군대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인족은 야만족보다 더 좋은 무기를 사용했지만 타고난 덩치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해 확연한 열세에 처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족은 전혀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싸우면서 천천히 마을 방향으로 후퇴했다. 마을에 진입해 수비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야만족은 인족이 원하는 대로는 해주지 않겠다는 듯 더욱 거세게 달려들어 전황이 더욱 격렬해졌다.

양측 병력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지만 인족이 서너 명 쓰러질 때 야만족은 겨우 한 명 쓰러질 뿐이었다.

전황은 인족에게 매우 불리했다.

석목은 곧 시선을 돌려 전장의 중심을 바라 봤다.

전신 갑옷을 착용하고 은색 장창을 든 대제국의 장군이 거대한 도끼를 든 야만족 토템용사와 막상막하로 싸우고 있었다.

석목은 인족 장군이 야만족 토템용사를 재빨리 쓰러트리지 못하면 결국 인족 군대가 전멸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둘의 싸움은 한동안은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석목은 어째서인지 인족 장군의 움직임이 익숙하게 느껴졌으나 투구를 쓰고 있어 얼굴을 자세히 볼 순 없었다.

지금 석목은 임무를 완수하고 폐허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허나 이렇게 야만족이 인족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도 못 본체 할 수가 없었다.

석목은 그들의 싸움을 잠시 관찰한 후 옥상을 내려가 기척을 숨긴 채 교전지 근처로 이동했다.

1각 후, 두 부대가 교전 중인 곳에서 멀지 않은 도랑에 석목이 나타났다.

그 사이 인족 병사는 20명 정도 전사했으며 야만족의 맹렬한 공세에 후퇴를 포기하고 맞서 싸우고 있었다.

어느새 두 눈이 금빛으로 변한 석목이 화살통에서 특별해 보이는 화살을 뽑아 들었다. 붉은색 화살촉에 어렴풋하게 아주 작은 술법진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화살은 화살촉에 열염술법진을 3겹 중첩한 열염전이었다.

석목은 술법진을 더 많이 중첩하고 싶었지만 화살촉 면적이 너무 좁아 세 겹을 중첩하는 것에 그쳤다. 세 겹뿐이었지만 난이도는 월광해담에 술법진을 아홉 겹 중첩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웠다.

열염전 자체의 위력은 월광해담의 1할 밖에 되지 않으나 인체에 박혀 폭발하는 열염전은 실제로 상당히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다. 하여 석목은 자강궁을 얻은 후 10개의 열염전을 공들여 제작했다.

이 열염전을 제외한 화살통의 모든 화살은 다 일반적인 화살이었다.

석목은 열염전 위력을 시험해 볼 요량으로 열염전을 건 활시위를 당겼다.

교전 중인 양측은 모두 상대를 죽이기에만 혈안이 되어있어, 멀지 않은 곳에서 화살이 조준됐다는 사실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쉬익!

검은 그림자가 번개처럼 순식간에 공기를 가르고 날아갔다.

공기 중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순간 치열하게 전투 중이던 야만족의 토템용사와 인족의 군관이 크게 놀랐다. 야만족 토템용사가 지척에 다가온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퍽!

야만인의 가슴에 박힌 열염전이 반짝이며 폭발했다.

단말마를 내지른 야만족 토템용사의 가슴에서 열염전이 폭발하며 사람 머리만한 구멍이 생겨났다. 쓰러지는 야만족의 상처에서 터져 나온 선혈이 맞은편에 있던 인족 장군의 갑옷을 적셨다.

인족 장군은 너무 놀란 나머지 피하지도 못했다.

휙! 휙! 휙!

화살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인족 병사의 무기를 쳐서 떨어뜨린 야만족 전사가 돌망치를 높게 들어 올려 내려치려던 찰나, 또 검은 그림자가 그의 목을 꿰뚫었다.

전장의 가장자리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뼈창을 던지는 야만족 전사가 손에 쥔 뼈창을 막 높게 들어 올린 순간, 또 다시 검은 그림자에 이마를 관통당해 그대로 쓰러졌다.

비슷한 광경이 연이어 벌어졌다. 화살소리가 한 번 날 때마다 야만족 병사가 한 명씩 바닥에 쓰러졌지만 더 이상 처음과 같은 폭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몸을 숨긴 이 궁수가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깨달은 인족 장군이 정신을 차리고 포효하며 야만족 병사를 무찌르기 시작했다.

일반 야만족들은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의 은색 장창은 마치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듯 늘었다 줄었다 하며 한 번에 한 명씩을 상처 입혔다.

의문의 궁수와 장군의 활약에, 인족 병사들도 사기가 크게 진작돼 반격을 시작했다.

불과 2각 사이에 200명에 달하는 야만족 부대가 궤멸되고 인족 병사들이 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전신갑옷을 착용한 인족 군관이 석목이 숨은 쪽으로 크게 소리쳤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석목은 화살통이 반 정도 빈 것을 확인하고 도랑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석목?”

인족 장군은 놀라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 멈춰 섰다.

그 반응에 석목은 어리둥절해졌다.

인족 장군은 석목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 깨달은 듯 급하게 투구를 벗었다.

곧 석목의 눈앞에 아주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왕천호!”

하얀 얼굴의 소년을 본 석목 역시 크게 놀랐다.

“정……, 정말로 흑마문의 제자가 된 것인가?”

왕천호가 석목이 입은 옷소매에 새겨진 화염 모양의 문양을 보고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흑마문은 대제국의 3대 종문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염국의 종문으로 그가 현재 속해있는 개원무원은 그들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석목은 하하 웃을 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그동안 겪은 우여곡절은 겨우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하, 염국으로 도망갔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구나. 오씨 가문과 금씨 가문이 널 찾기 위해 각각 50만 냥의 은자를 현상금으로 내걸었던데 네가 종문에 들어간 것을 알게 된다면 편히 먹고 자기도 힘들어 하겠군.”

왕천호는 더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리며 하하 웃었다.

역시 금씨, 오씨 가문의 행동은 석목의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저에 관한일은 말하기 어렵습니다. 왕 형은 어쩌다가 대제국의 장군이 된 것입니까?”

석목이 왕천호의 갑옷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가 풍성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난 개원무원에 들어갔다. 야만족의 침입으로 무원에선 신입 제자들을 대제국 군에 순차적으로 파견 보내고 있었지. 네가 이곳에 있는 것 역시 분명 종문의 명령 때문이 아닌가?”

왕천호가 태연스럽게 말했다.

“맞습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후폐맥으로 밝혀진 덕에 오히려 종문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구나. 흑마문은 3국 7종 중 하나로 무수히 많은 비급을 가지고 있으니 분명 후천초기의 경지에 올랐겠지?”

왕천호가 석목을 보고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석목은 코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비무를 한 번 해보는 것이 어떤가? 이전부터 종문의 제자와 겨뤄보고 싶었지만 줄곧 기회가 없었네.”

왕천호가 은색 장창을 손에 쥐고 뜨거운 표정으로 석목을 바라봤다.

석목은 방금 전투를 통해 왕천호의 실력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봤지만 자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저 겨루는 것뿐이야. 이기던 지던 은자 10냥을 내겠네. 어떤가?”

왕천호는 아무 대답 없는 석목이 자신과의 비무를 원치 않는다고 생각하고 급히 말을 덧붙였다.

“왕 형이 졌을 때 하급 영석 2개를 얹어준다면 고민해 보겠습니다.”

석목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웃으며 말했다.

“좋다. 다른 말하기 없다!”

왕천호가 크게 기뻐하며 대답했다.

석목도 고개를 끄덕이곤 자강궁을 한곳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손을 들어올렸다.

주위에서 전장을 정리하던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사람을 중심으로 10장 크기의 원을 형성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병사들은 대부분 석목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자신의 대장이 그를 알아봤을 뿐만 아니라 그와 비무를 한다고 하니 흥분해 환호하기에 이르렀다.

무예를 익히는 군인에게 있어서 고수들의 대결을 보는 것만큼 짜릿한 것은 없었다. 이런 기회는 매우 흔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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