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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73화 (73/916)

73화. 양패구상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한 왕천호가 크게 웃으며 은색 장창을 휘둘렀다. 곧 창끝의 전반부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훅! 훅! 훅!

그의 앞에 갑자기 12개의 붉은 화염이 나타났다.

석목이 사라지고 2년 사이에 왕천호는 요화창법의 후반부를 수련해 대성했다. 화염의 위력이 몰라보게 강해졌고 십이염연격(十二焰连击)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왕천호가 이내 창을 쥔 두 손을 빙빙 돌리니 창끝이 은색 원을 그렸다. 그에 12개의 화염도 신비로운 힘에 이끌리듯 허공을 한 바퀴 돌더니 전부 그 동그라미 안으로 향했다.

은색 원이 열염에 완전히 뒤덮이자 왕천호가 창을 찔렀다. 뜨거운 화염에 뒤덮인 창은 마치 화룡처럼 석목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공격이 석목에게 닿기도 전, 뜨거운 열기가 몰려와 호흡도 어려워졌다.

표정을 굳힌 석목은 하얗게 빛나는 주먹을 휘둘렀다.

콰르릉!

마치 거대한 돌이 불더미를 내리친 듯, 불꽃이 사방으로 현란하게 튀었다.

아무래도 석목의 쇄석권이 조금 더 우세한 듯 점점 화룡의 빛이 어두워지며 은색 창이 드러나려 했다.

그때, 갑자기 석목이 두 팔에서 뼈마디가 폭발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돌연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며 표면에 구불구불한 핏줄이 섰다.

백옥같이 반짝이는 주먹이 다시 한 번 화룡의 머리를 매섭게 내리치자, 금속이 부딪치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불빛이 흩어지고 은색 창이 드러났다.

왕천호는 창을 통해 전해지는 거대한 힘에 몸을 비틀거리며 서너 번 뒷걸음진 친 후에야 멈췄다.

왕천호는 크게 놀란 얼굴이었고, 석목은 그냥 제자리 그대로 서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주먹을 거둬들였다.

몸을 똑바로 세운 왕천호가 석목을 살벌하게 쳐다보며 창을 쥐는 자세를 바꿨다.

석목은 그제야 창의 뒷부분에 붉은색 부문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왕천호의 창 역시 법기였다.

“역시나 명불허전이군. 나의 이 용미창(龙尾枪)을 받아낸다면 패배를 인정하도록 하겠네.”

왕천호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용미창은 왕천호가 개원무원의 혈맥전에서 배운 혈맥의 위력을 강화시켜주는 특수한 무예로, 혈맥이 일치하는 사람만이 수련할 수 있는 무예였다.

순간 왕천호의 창에서 불이 크게 일어나더니 창의 몸통이 마치 살아있는 구렁이처럼 꾸불꾸불 굴절돼 보였다. 열기는 이전보다 더욱 뜨거워져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왕천호는 창끝을 바닥에 끌며 빠르게 몇 걸음 달려가다, 갑자기 허리를 비틀어 창끝을 올려쳤다. 그러자 화염 10여개가 마치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며 매우 빠른 속도로 석목을 덮쳤다.

이내 석목은 운철흑도를 뽑아 휘둘렀다.

13개의 검은색 검광이 화염구렁이를 향해 몰아쳤다.

쾅! 쾅! 쾅!

폭발음이 연달아 울리며 13개의 검광과 화염구렁이가 동시에 흩어져 사라졌다.

왕천호는 기쁜 표정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창을 휘둘렀다. 창의 바닥이 붉은 뱀 꼬리처럼 변하며 빠르게 석목을 공격했다.

“화룡파미(火龙摆尾)!”

왕천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살짝 놀란 석목은 체내의 법력을 끌어올렸고, 그에 운철흑도의 술법진이 붉은 빛을 뿜으며 도신이 활활 타올랐다. 석목은 불타오르는 운철흑도로 붉은 뱀 꼬리를 베었다.

콰르릉!

충돌과 함께 폭발이 발생했다. 쏟아지는 강한 힘을 막아내지 못한 왕천호는 손이 저릿해져오는 느낌에 무기를 놓쳤다. 은색 장창도 몇 장 밖으로 날아가 바닥에 꽂혔다.

매우 놀란 왕천호는 석목의 태연한 얼굴을 보고 입술을 살짝 움직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위에서 구경을 하던 병사들도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때, 무리 중에서 한 병사가 앞으로 걸어 나와 석목에게 화살 20개를 공손하게 건넸다. 석목이 방금 쏜 화살들이었다.

석목은 사양하지 않고 화살을 받아 화살통에 넣은 후, 바닥의 자강궁을 주워들고 먼 곳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왕 형, 돈은 근처의 거점에 맡기면 나중에 가지러 가겠습니다. 저는 임무가 남아 가보겠습니다.”

석목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알겠네!”

왕천호는 멀어지는 석목을 보며 한숨을 쉬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야만족 선천고수 종연의 일격을 두 번이나 막아내고, 운철흑도로 토템용사를 여럿 처치한 석목의 명성은 점점 퍼져나갔다. 일부 토템용사는 그를 화도(火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반년 후, 예주의 어느 험한 산골짜기에서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곳에서는 석목을 포함한 인족 종문의 다섯 제자가 아홉 명의 야만족 토템용사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주위에는 20여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으며, 그중 절반 이상이 인족의 시체였다. 시체는 마치 괴수에게 찢긴 듯 사지가 끊어지거나 터진 내장이 바닥에 흘러내리는 등 굉장히 잔혹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산골짜기에는 메스꺼운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날 십여 명의 인족 일행은 야만족 거점 습격임무를 완수하고 복귀하던 중 산골짜기에서 뜻밖의 복병과 맞닥뜨렸다. 일고여덟 명의 야만족 토템용사였다.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인족 일행은 도주보다는 맞서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 명 이상의 토템용사가 잇따라 싸움에 가세하면서 형세가 역전되고 말았다.

인족 일행의 우두머리인 천음종의 제자 하후현이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이미 탈출의 적기를 놓친 후였다.

수적으로 밀리게 된 인족 일행은 목숨을 걸고 저항했고, 수 명의 토템용사를 쓰러트렸다. 그러나 방금 임무를 마치고 온 탓에 쌓인 피로는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인족 일행은 목숨을 걸고 싸워 몇 명의 토템용사를 해치웠지만, 자신들도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양측에서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도 대부분 부상을 입은 상황이었다. 네 명의 적에게 포위를 당한 석목도 예외는 아니었다.

석목의 얼굴은 온통 피로 뒤덮여 있었고, 등에 입은 2척 길이의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배어 나와 옷을 적셨다. 늑골 아래와 허벅지에도 손바닥 길이의 베인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가아가 준 회춘부를 재빨리 발동시켜 응급처치를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서 있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야만족 지원군이 나타나며 위험에 처하자 석목은 즉시 금갑부를 사용해 가장 약한 상대 두 명을 먼저 해치웠다. 이어 하후현이 몇 명을 더 처치하면서 상황은 안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곧 석목이 소문의 화도라는 것이 적들 사이에서 알려졌고, 그 때문에 석목은 집중공격을 받게 되었다.

토템용사들의 협공을 막아내고 있는 석목의 표정은 침착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매우 초조한 상태였다.

하후현이 야만족 두 명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인족 일행 세 사람은 이미 기력이 다한 상태였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한쪽 팔이 잘려나간 채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네 명의 야만족은 상황이 자신들에게 매우 유리한 것을 알고 성급하게 덤벼들지 않았고, 그들은 석목의 운철흑도를 무척 경계하고 있었다.

석목은 자신과 하후현을 제외한 세 사람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과 하후현은 매우 큰 위험에 처할 것이 분명했다.

이때 야만족과 대치하던 석목은 이상한 느낌에 잠시 뒤를 보았고, 그 순간 크게 놀랐다.

초인적인 시력을 가진 그의 눈에 수백 장 떨어진 곳에서 십여 명의 사람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들은 전부 야만족 토템용사였다.

바로 그 때, 두 차례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 하후현의 창이 토템용사의 목을 꿰뚫은 것이다. 그러나 하후현 역시 다른 토템용사의 도끼에 등을 찍혀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 순간 한 토템용사의 도끼가 한쪽 팔만으로 필사적으로 싸우던 인족 제자의 몸을 갈랐다. 그러나 그는 피를 흩뿌리며 숨이 끊어지는 와중에도 일격을 날려 상대의 한쪽 눈을 멀게 했다

한쪽 눈을 잃은 토템용사가 피를 흘리며 하후현에게 돌진했다. 이미 큰 상처를 입고 있는 하후현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석목은 주위를 재빨리 한 번 훑어본 뒤, 무언가 결심한 듯 마지막으로 남은 금갑부 한 장을 조용히 손에 쥐었다. 그리고 왼쪽에서 가로로 베어 들어오는 곡도를 우측으로 피하며 오른쪽에 있는 대머리 야만족 사내를 유인했다.

대머리 사내는 빈틈을 발견하자 두 눈을 흉흉하게 빛내며 지체 없이 공격해 들어왔다. 그가 곰발 같은 손으로 석목을 내려찍자 강풍이 석목의 오른쪽 어깨를 짓눌렀다.

이어 뒤쪽에 있던 쌍둥이 야만족이 사마귀 다리로 변한 양 팔을 휘두르며 석목의 퇴로를 막았다.

그때 석목이 금빛으로 반짝이는 왼손을 몸에 대자, 희미한 금빛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석목은 대머리 야만족의 공격은 아예 무시한 채 몸을 돌려 쌍둥이에게 달려들며 운철흑도를 휘둘렀고, 열세 개의 붉은 검영이 휘몰아쳤다.

“핫!”

석목이 기합을 내지르자 체내에서 모인 진기가 운철흑도에 주입됐고, 검영들이 하나로 합쳐졌다. 크기가 1장에 달하는 거대한 화염도가 왼쪽에 있는 쌍둥이의 머리를 빠르게 내려찍었다.

놀란 야만족은 사마귀의 다리를 머리 위로 교차해 막아보려 했지만, 서걱 소리와 함께 그의 두 팔과 머리가 동시에 베여 날아갔다. 머리를 잃은 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분수처럼 피를 뿜었다.

바로 그 순간 남은 쌍둥이 한 명의 사마귀 다리와 대머리 사내의 곰발같은 손이 석목을 동시에 가격했다.

펑! 펑!

석목의 몸을 덮고 있던 금빛이 강하게 빛났다가 순간 어두워졌다.

눈앞에서 자신의 형제가 살해당하는 것을 목도한 사마귀 손의 야만족은 눈이 벌개져서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는 흥분한 나머지 석목이 한손으로 수인을 맺고 있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쾅!

석목의 입에서 흰색 빛줄기가 발사됐다.

석목에게 너무 가까이 접근해 있던 야만족은 공격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가슴에 맷돌만한 구멍이 뚫린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어서 석목은 운철흑도를 휘둘러 대머리 야만족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동시에 나머지 한 손을 뻗어 옆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다른 거대한 야만족의 도를 막아냈다.

석목과 두 야만인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로 거리를 벌렸다.

체력과 법력을 이미 상당히 소진해버린 석목의 안색은 창백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손에 힘을 주자 운철흑도의 도신에 불그스름한 빛이 감돌았다. 다시 한 번 술법진을 발동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를 본 두 야만인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웠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더니 동시에 뒷걸음질을 쳐 석목으로부터 10장 가까이 물러났다.

바로 그때, 또 한 번 비명이 연달아 울리며 인족의 남은 제자 두 명이 쓰러졌다. 그러나 이들 역시 토템용사 한 명을 죽였고, 다른 하나에게는 상처를 입혔다.

살아남은 토템용사는 자신의 상처를 전혀 돌보지 않으며 곧바로 하후현에게 달려들었다.

이를 본 석목이 재빨리 앞으로 튀어 오르며 운철흑도를 휘둘렀고, 순식간에 열세 개로 나뉜 검영이 하후현에게 덤벼들던 토템용사에게 몰아쳤다.

그러자 석목을 경계해 거리를 두고 있던 두 야만족이 포효하며 급히 석목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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