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두 여인
세 야만인에게 둘러싸인 하후현의 얼굴에 광기가 떠올랐다. 검은 빛이 어린 그의 창이 애꾸눈 야만족의 목줄기를 향해 길게 호를 그렸다. 나머지 둘을 완전히 무시한 듯한 양패구상(兩敗俱傷)의 일격이었다.
쾅!
하후현을 향해 가장 앞서 달려가던 상처 입은 토템용사가 비명을 질렀다. 두 개의 검영이 그의 몸을 베고 지나가며 세 동강을 냈다.
동시에 하후현의 창은 애꾸눈 사내의 목을 꿰뚫었다. 그러나 그도 작은 야만족의 도끼에 허리를 찍혔고, 피와 내장이 바닥에 쏟아졌다.
그때, 골짜기를 향해 몰려오는 십여 명의 사람을 발견한 대머리 야만족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하하! 돌연대인께서 수하들을 데리고 오는구나! 화도, 네가 죽을 때가 되었다!”
이어 두 야만족이 대머리 야만족의 좌우에 서서 좁은 골짜기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앞이 가로막히고 뒤에서 지원병이 다가오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인 석목의 낯빛이 흐려졌다.
휙! 휙!
석목은 지니고 있던 공격 부적을 모두 꺼내 발동시켰다. 화염구, 화사(火蛇), 거석(巨石), 수검 등의 술법이 앞을 막아선 대머리 야만족을 향해 날아갔다.
이어 거의 동시에 그의 두 왼손가락이 살짝 움직이자, 등 뒤에서 두 줄기의 은색 빛이 날아올라 두 야만족을 향해 쏜살같이 뻗어갔다. 새로 만든 두 자루의 월광해담이었다.
키 작은 토템용사가 차갑게 웃으며 날아오는 월광해담을 향해 흰색 빛을 뿜는 도끼를 휘둘렀고, 키 큰 야만족 용사도 실체와 허상을 구분하기 힘든 환영을 만들며 곡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그들의 무기가 채 닿기도 전에, 월광해담의 도신에 있는 부문이 순간 빛나더니 자홍색 빛으로 뒤덮였다.
두 야만족 용사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월광해담이 폭발했다. 태양처럼 눈부신 자홍색 빛이 세 토템용사를 집어삼켰다.
콰르릉!
빛이 사라지자 토템용사들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구덩이 두 개만 남아 있었다.
공격이 성공하자 석목은 지체 없이 경신부를 발동시켰고, 골짜기의 입구를 향해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간, 대제국 청주(青州)에 있는 천청산(天青山).
가파른 산세가 구름 속으로 높이 솟아 있는 가운데, 산의 정상에 자리 잡은 여러 건물 사이로 많은 사람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이곳은 3국 7종 연맹의 총본부가 있는 곳이었다.
건물들의 가장 안쪽에는 높고 큰 전당이 있었는데, 고만고만한 건물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흡사 닭 사이에 낀 학처럼 보였다. 이곳은 낭떠러지를 등지고 있는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에 따로 보초 임무를 맡은 제자는 보이지 않았다.
전당의 내부에서는 여러 사람이 격렬하게 말싸움을 하는 듯한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전의 후문이 열리고 좁은 통로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이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낭떠러지 근처의 대나무 숲 쪽으로 향했다.
둘 중 한 사람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닌, 흰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금빛 옷차림의 다른 여인은 흰 옷의 여인만큼 절세미녀는 아니었지만, 옷 아래에서 풍만한 몸이 움직일 때마다 요염함이 뿜어져 나왔다.
흰 옷의 여인은 천음차녀, 금빛 옷의 여인은 금소채였다.
“늘 저렇게 다투기만 하니 반나절을 토론해도 결론을 못 내지. 지금은 이해득실을 따질 때가 아닌데. 한심한 늙은이들이야.”
금소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너무 불평하지 마. 야만족의 침입이 이토록 거세지 않았다면 말다툼만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야.”
천음차녀가 어렴풋이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금소채가 천음차녀를 바라보며 요염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맞는 말이네! 게다가 덕분에 우리 자매가 이렇게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야만족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지.”
“너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니 그렇게 분별없이 말해서는 안 돼. 야만족의 침입은 심각한 사태야. 자칫 잘못하면 7종문이 수백 년간 쌓아온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다고.”
천음차녀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살짝 꾸짖는 투로 말하자, 금소채는 또다시 입술을 삐죽거렸다.
“한낱 야만족 무리일 뿐인 걸. 어디 그게 그렇게 심각한 일인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두 사람은 어느새 대나무 숲에 도착했다.
푸른 대나무가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거리는 수려한 풍경이 더해지니 두 여인의 아름다움은 더욱 두드러졌다.
“얼마 전 한연검의 시체가 복주의 구양산에서 발견됐다던데, 네가 한 짓이지?”
금소채가 묻자 천음차녀가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교활하고 간사한 놈이었어. 운아가 그의 거짓말에 속아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지? 그놈은 최근 몇 년간 신분을 숨기고 복주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야만족이 침입하면서 정체를 드러냈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쉽게 찾지 못했을 거야.”
“흥, 남자들이란! 그놈은 너무 편하게 죽었어. 갈기갈기 찢어 죽인 뒤 혼백을 내 뱀굴에 처박아 영원히 갉아 먹히는 고통을 줬어야 했는데. 운아가 그 따위 놈을 위해 죽은 게 너무 한스러워!”
금소채가 얼굴을 얼음처럼 굳히며 분노에 찬 말을 쏟아냈다.
그녀의 말에 천음차녀는 열렬하면서도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던 남운의 눈빛을 떠올리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금소채는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운아의 유일한 제자가 전방에서 야만족과 싸우고 있다고 했지? 어째서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지 않는 거지? 선아라는 그 아이를 딱 한 번 봤을 뿐이지만, 운아와 많이 닮아 있었어.”
“나도 그녀를 종문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고집 센 성격까지 운아와 필적할 정도였어. 생사를 건 싸움을 통해 실력을 갈고 닦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더라.”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천음차녀의 말에 금소채도 깊게 한숨을 쉬었다.
천음차녀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긴 생사의 시련을 겪지 않고 어떻게 정진하겠어?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7대 종문의 젊은 제자들도 이 년 동안 야만족과의 싸움을 통해 강해진 것이니까.”
그러자 금소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지. 그나저나 최근에는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을 많이 쓰네? 이전에는 젊은 제자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잖아.”
“스승님이 망양에게 입은 상처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하셨으니, 당연히 내가 그녀의 일을 분담해서 맡아야지.”
천음차녀가 담담히 대꾸하자 금소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느 제자가 네 눈에 들었는지 호기심이 생기는 걸? 설아 너는 언제나 사람을 보는 눈이 높았으니까.”
천음차녀는 천천히 생각한 뒤에 대답했다.
“반년 전쯤 선아가 야만족 거점을 습격하는 임무를 맡았을 때, 도통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상황을 살피러 간 적이 있었지. 그 거점에 속해 있던 너희 종문의 석목이라는 제자가 눈에 띄었어. 기량과 담력 모두 출중하더구나.”
“석목?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인데…. 그의 용모가 어떻지?”
금소채가 흥미를 보이며 재차 물었다.
“장신에 체구가 상당히 크고, 피부는 살짝 까무잡잡한 편이고 생김새는 단정했어. 무기는 도를 사용하지. 아, 그리고 그는 부적술사였어.”
천음차녀의 말에 금소채가 생각났다는 듯 박수를 치며 웃었다.
“아, 누군지 알겠어. 나도 석목이라는 그 제자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거든. 그가 흑마문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게 바로 내 덕분인 걸.”
그러나 그녀는 곧 미간을 찌푸리더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천음차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 설마 석목에게 관심이 있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일개 제자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지?”
“그저 그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고, 너희 흑마문의 사람이라 하니 말해준 것뿐이야.”
천음차녀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자 금소채가 갑자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설아, 나와 약속했지? 영원히 나와 함께 하고,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지 않기로 말이야.”
금소채는 뜨거운 눈빛으로 천음차녀를 보며, 손을 뻗어서 눈보다 하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천음차녀는 한 걸음 물러나 금소채의 손을 가볍게 거두며 말했다.
“그건 소싯적에 했던 우스갯소리잖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금소채는 자신을 두고 멀어져가는 천음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의 높게 솟은 가슴이 거칠게 들썩거렸고, 두 눈에는 무언가 위험한 빛이 서려 있었다.
잠시 후, 평정심을 되찾은 금소채의 얼굴에서는 분노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미소를 띠며 천음차녀가 사라져간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야만족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석목은 사흘 만에 어느 산 중턱에 숨겨진 동굴에 다다랐다. 그동안 그는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도록 외진 길만 이용했다.
이 동굴은 예주의 중요거점 중 하나였으며, 석목이 이전에 머물렀던 지하의 거점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후천 대원만 경지에 오른 묘음종의 무인이 종문의 대표였고, 백여 명의 종문 제자가 있었다.
그들은 석목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석목이 화도라는 것, 그리고 부적술사라는 것은 모두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목이 중상을 입고 홀로 돌아온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다들 석목에게 자초지종을 캐묻지는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얼마 후, 동굴의 깊은 곳에 위치한 방에서 분노와 놀라움이 가득 찬 고성이 터졌다.
소리를 지른 사람은 거점의 대표 금신이었다. 그는 서른 살가량 되어보였으며, 야만족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근육질의 몸을 갖고 있었다. 키가 훤칠해서 석목보다도 머리 하나 정도가 더 컸다.
“이 일은 연맹에 보고하도록 하겠네. 정보를 가지고 돌아온 공로로 기존에 약속된 보상보다 공로점수 10점을 더 부여했다네. 한동안은 나가지 말고 이곳에서 머물며 상처를 치료하도록 하게나.”
금신에게서 신분영패를 돌려받은 석목은 인사를 한 뒤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갔다.
잠시 후, 자신의 방에 돌아온 석목은 상의를 벗고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몸의 상처는 지혈되어 피는 더 이상 흐르지 않았으나, 한눈에 봐도 무시무시한 상처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석목은 너덜너덜한 옷가지 사이에서 금빛 연갑을 들어 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금사갑은 지난 전투에서 너무 망가져서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석목이 이 년 동안 변경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백 회 가까이 치르는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금사갑의 보호 덕분이었다. 금사갑은 석목에게 중상을 입혔을 적의 공격을 수차례나 막아주었다.
그러나 사용이 불가능할 만큼 손상된 금사갑은 이번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말해주었다. 군량창고 습격 때 선천고수와 맞닥뜨렸던 것과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번 싸움도 손에 꼽힐 만큼 위험했다.
석목은 다시 씁쓸하게 웃으며 부서진 금사갑을 한 쪽으로 던져놓고 상처에 푸른 연고를 발랐다. 연고를 바른 상처 부위에서 청량한 느낌이 전해졌다.
이 연고는 가아가 다른 거점으로 이동하며 석목과 헤어질 때 선물한 것이었다. 도검 등에 당한 외상에 신통한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치료 술법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석목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와 함께하던 날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가아가 이곳에 있었다면, 이런 상처 정도는 약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만큼 빠르게 회복됐을 것이다.
석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고, 천천히 몸속의 진기를 운기하기 시작했다.
석목은 이전에 천음차녀가 준 현빈혈령단을 복용한 후 체내의 혈맥이 조금 뚫렸다. 그 덕분에 반야천상공의 수련 효율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본래 엄청났던 회복력이 더 강해졌다. 어지간한 상처는 닷새 정도면 대부분 회복됐다.
석목은 상처 치료에 전념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하급부적을 제작했다. 이전에 지니고 있던 부적은 며칠 전의 전투에서 모두 써 버렸다.
월광해담의 제작에 필요한 곡도도 조평에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해놓았지만, 종문에 돌아갈 기회가 없어서 아직 손에 넣지 못하고 있었다.